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9
제99화. 상급 마력석
‘아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1황자 마리브는 문득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고 창밖을 쳐다봤다. 어김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매년, 신기하게도 첫눈이 내리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황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첫눈이네요.”
보좌관이 마리브 책상에 서류를 건네주며 웃었다. 겨울은 춥고, 힘들지만 한 해의 마지막이자 시작을 위한 계절 아니던가. 마리브는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곧 신년회가 열리겠군.”
“그렇습니다. 황궁 본관에서 아주 정신이 없더군요. 담당 재무관이 딜라이나 님의 시종장과 매일 입씨름한다고 합니다. 예산이 뭐라고…….”
딜라이나는 황제의 후궁으로 유일하게 그의 곁을 보필하는 여인이었다. 황후 자리는 마리브의 생모와 게일의 생모가 모두 죽은 뒤로, 암묵적인 공석 자리로 남은 지 꽤 되었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나.’
몇 번인가, 새로운 황후를 취임하자는 말이 나돌았지만 결국에는 회의 안건에도 오르지 못했다. 유일하게 마리브와 게일의 뜻이 맞는 부분이었기에.
각자의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노라고.
저들의 생모가 아니면 그 누구도, 자신을 아들이라 부를 수 없노라고 말이다.
“참 속이 없다고 해야 할지. 신년회만 되면 그리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어.”
“신년회는 원래 황제 폐하의 담당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니, 제일 가까우신 후궁께서 하시는 건 당연지사지요. 영광 아닙니까.”
“아버지께 격려 한마디 받는 게?”
마리브는 어머니의 얼굴을 애써 지워가며 말을 이었다. 보좌관이 어서 쓸데없는 말이라도 늘어트려 자신의 집중을 분산시켰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음, 그래도 딜라이나 님이 있어서 좀 편한 건 있습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신년회 준비는 저희가 했었을 테니까요. 정시 퇴근도 못 하는 마당에 신년회 준비까지 하려면…….”
신세 한탄을 늘어놓던 보좌관이 자신의 주둥이를 가볍게 내려치며 서류를 정리했다. 눈이 와서 설렌 탓이다. 주둥아리가 때와 장소도 분간하지 못하고 나불대다니.
“로만드로는 언제쯤 올라온다 하던가? 그, 이안 경과 함께 말일세.”
“황궁에 따로 들어온 기별은 없었습니다만, 일정에 맞춰 온다 했으니 슬슬 출발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몰린은?”
“이안 경보다 먼저 중앙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아마 행정부에서 권고휴직을 내릴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올라오는 대로 사람을 붙여두겠습니다.”
“명이 참 질긴 자일세.”
마리브의 짜증 섞인 중얼거림에 보좌관이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신년회에 있을 대법관 임명과 그를 시험할 마법부의 견제가 해소되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몰린의 처단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첫눈이 내리고, 신년식을 앞둔 날까지.
“파알.”
“네. 저하.”
마리브는 미간을 가볍게 짓누르며 보좌관을 불렀다. 파알은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는데, 가끔 저리 이름이 불릴 때는 어김없이 질문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방도가 없겠나?”
몰린을 죽이고, 마법부의 견제를 쳐낼 수 있는 방도.
“실담물약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골머리 썩힐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마법부 특성상 타 부서에 개입할 여지가 하나도 없는 게 제일 커.”
물약 개발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실효성이 있는지, 신체적인 부작용은 없는지 등등. 서면 보고서로만 올라오고 있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보좌관 파알은 잠시 뜸을 들이고서 대답했다.
“사안이 꽤 중대한 만큼, 다른 곳에서도 합심하여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긴 합니다만.”
“행정부에서는 요지부동이니 하는 말 아닌가.”
침묵은 긍정이요, 하루가 멀다고 황제에게 관련한 건의서가 올라가고 있었으나 제대로 결재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
“몰린 경의 신병은 저희가 쥐고 있으니 신년회까지는 두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안 경이 마법부로 배치받으면 아무래도 그쪽 정보를 확인하는 게 용이해지리라 생각됩니다.”
파알을 힐끔, 자신의 상관을 보며 어렵사리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마리브의 표정으로 보아 별로 흡족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 알고 있는 걸 다시 상기하는 것에 그쳤으니.
“마법부에서 올린 보고서나 가져오게.”
“넵. 죄송합니다.”
마리브는 마법부가 올린 실담물약 보고서를 다시금 뒤적거렸다. 꼼꼼하게 뭐라 표기는 했는데, 도저히 일반인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이해는커녕 몇몇 단어는 읽는 것조차 문제였다.
‘이걸 해석하려면 다시 마법부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게, 원.’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신성한 힘을 계승한 자들이라 하여,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마법부는 중립을 지키며 황궁의 중심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웨슬리가 마법부 장관이 된 이후로, 그 균형이 깨져버린 게다.
“동질 물약과 비교한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그나마 대중화된 동질 물약을 기준으로 실담물약에 무엇이 새롭게 들어가고, 빠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참을 꼼꼼하게 살피던 마리브가 멈칫거렸다.
“루론?”
루론. 난생처음 들어보는 명칭이다. 옆에 적힌 표기로 봐서는 마력석 같은데…….
“파알. 실담물약에 루론이라는 마력석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관련 자료를 찾아라.”
“아, 마침 제가 마법부에 요청해 둔 것이 있습니다.”
보좌관은 벌떡 일어서더니 트롤리에 쌓인 파일 더미를 뒤적였다. 그리고 한 뼘 정도 되는 종이 묶음을 꺼내 착착착 넘겨댔다.
“읽어드릴까요?”
“그래.”
마리브는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리며 보좌관의 설명을 기다렸다. 실담물약에만 들어가는 특별한 성질의 재료들이 도합 다섯 가지라.
“루론, 상급 희소성인 마력석입니다.”
“상급 희소성?”
말 그대로 희소하여 가치도 높고, 관련 자료도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첫 문장부터 마리브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상급 희소성이라면 연구하기에도 물량이 모자랐을 터인데, 인체 실험과 효능 실험이 모두 진행됐다고?”
“보고서로는 그렇습니다. 상급 희소성이지만 극소량만 들어가는 터라 보급에 문제없다 합니다.”
“하긴. 해봤자 임명 앞둔 인사들이나 쓸 것이니까.”
“마법부에서 관리한 루론은 총 15킬로그램인데, 연구 과정 중에서 5킬로그램을 사용했고, 실담물약 제조에는 한 회분에 10그램 정도가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흔하게 쓰이는 하급 마력석은 수백 킬로그램을 유지하고 있지 않나?”
“루론이 학계에 보고된 것이 불과 작년입니다.”
톡톡, 마리브는 계속해서 읽어보라는 듯 책상을 두드렸다. 처음 들어보는 마력석이었지만, 여타 다른 재료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희소성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매장지는 확인 불가, 보통 일반 광맥 인근에 있다고는 하는데 표본이 적습니다. 대신 좀 특이한 게…….”
“뭐지?”
보좌관은 이런 마력석은 처음 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액체로 존재하다가 외부 마력과 감응하면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린다고 합니다. 사례로, 신고받고 간 매장지에 마법사가 들어서자마자 루론에 서 있던 광부의 발이 묶이고 만 일이 있었답니다.”
발목까지 오는 깊이였는데, 그대로 굳어버리니 방도가 없었다. 조이는 강도가 심각해, 다리 전체가 괴사하기 전 멀쩡한 발목을 잘라 버려야 했다.
“발목이라 다행이군.”
“몸이 빠질 만큼 깊은 건 아직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큰일 날 뻔했죠. 하반신 전체가 묶였으면, 어후.”
“그 밖에?”
“아, 색은 보랏빛을 띠고, 굳었을 때 올라오는 기포가 많을수록 마력 감응이 좋다고 합니다. 감응이 좋다는 게 마법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마법부에서 협조하여 배포한 설명은 거기서 끝이었다. 아마 내부로는 더 상세한 데이터를 갖고 있겠지만…….
“루론에 대해 정보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조사해 보겠습니다.”
보좌관은 맡겨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그러모았다. 그러는 동안, 마리브는 다시 창밖을 쳐다봤다. 그새 내렸던 눈이 그쳤다.
“참, 응고된 마력석은 그대로 제조되는 건가? 액체가 아니라 가루로 넣는 모양이군.”
“보고서에는 융화되는 방법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다만 경도가 굉장해서, 어지간한 방도로는 흠집도 안 난다고 하네요.”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말이지?”
보좌관은 보고서를 빠른 손으로 넘겨대며 그가 원하는 정보를 읽어내렸다.
“마법사의 마력에는 부서지는 모양입니다. 마력 응축의 강도가 셀수록, 쉬이 다룰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마리브가 턱을 괴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 말은…….
“마력이 센 마법사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거군.”
* * *
“잠깐!”
로만드로는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덤덤한 이안과 별생각 없어 보이는 베릭과 달리, 얼굴의 모든 구멍이 확장되어 있었다. 눈은 띠용, 콧구멍은 벌렁벌렁, 입은 떡하니 벌어져서 다물어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자, 잠깐만.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몬느에 광산에 마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몬느에에 마력석이? 마력석? 내가 아는 그거 말인가?”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길 가다 돈벼락을 맞아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탄광이라고만 알고 있던 작은 광산에서 마력석이라니!?
“이안! 이안! 우아아아! 세상에!”
“로만드로 님. 잠 다 깨셨네요.”
“이게 지금 안 깨고 배기겠는가? 미쳤네, 자네 전생에 큰일을 한 게 분명해! 마력석이라니!”
전생에 큰일, 하긴 했지. 이안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제발, 흥분을 좀 가라앉히라는 뜻이었다.
“한데 문제는 마력석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정보가 없어요. 기사의 시체를 딱 잡고 있는 거로 봐서,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본 듯 만 듯, 이안은 난감하게 웃기만 했다. 그간 이안이 봤던 마력석들은 모두 수십 번씩 제련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원석으로 확인하려니 도통 헷갈려서 확신을 못 하겠다.
“문제 있나? 당장 마법부에 연락해서…….”
뜨겁게 달아오르던 로만드로의 흥분이 파삭 식어버렸다.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인지한 것이다.
“아무래도 게일 저하가 이곳을 노린 이유가 저것인 듯합니다.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서 여길 노린 것 같습니다.”
“마, 마법부가 이걸 알면 더 난리 칠 게 분명하네.”
“저도 동감합니다. 다행이라는 건, 우리 말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이안은 문득 쉼 없이 저택 밖으로 나돌던 맥과 드고르를 떠올렸다. 굴라에 관하여 수작질을 부리는 줄만 알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광산 쪽도 다녔던 것 같다.
“크, 크기가 얼마나 되던가?”
“성인 남자 하반신을 모두 잡아먹을 정도였습니다.”
“오, 세상에. 미치겠군. 자네 진짜 어마무시해!”
감히 환산할 수 없는 값어치였다. 하급 마력석이라도 그 가치는 같은 부피의 다이아몬드와 맞먹을 정도다.
혹시 중급이라면? 아니지. 상급이라면?
망상을 이어가던 로만드로가 정신을 바짝 차리며 이안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나라 하나 세워도 되겠어. 으하하하하!”
“…황궁 자문관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말이 그렇다고. 말이!”
이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선은 중앙에 보고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차피 광산은 이쪽 영지의 소유지이고, 제가 마법부로 들어가서 분위기를 본 다음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하네. 가서 마리브 저하와 상의도 하는 게 좋겠어.”
“그것도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말씀드리지요.”
“아아. 그래그래. 주인께서 하셔야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광산으로 가겠습니다.”
가서 좀 더 면밀하게 마력석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안의 말에 로만드로는 바로 고개를 휙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 시. 시간이 더럽게 안 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