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1024)
1024. Episode of EVE 18
실피아 에버그린 그로브는 공터에서 조용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정확하게, 규칙적으로 내려치는 검. 진검이기에 조금의 실수도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적어도 휘두르기에 있어 실피아가 실수 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녀의 검은 ‘물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검 끝에 실린 마력은 기사학부의 기사들 중에서도 특별한 바람의 속성을 띄고 있다.
이 제프린에서도 정령사는 극히 드문 직업이다. 제대로 된 정령술 커리큘럼이 존재하지 않는 탓도 크지만, 그만큼 정령술이란 커리큘럼화 하기 어려운 재능의 직업이다.
정령사로서 1인분 취급은 하급정령과 전속 계약을 맺었을 때.
여기저기 불려가는게 아니라 정령계에서 오직 주인 한 명의 소환만 듣는 이와 계약했을때 부터다.
그리고 그녀는, 정령술을 익히고 처음으로 소환했을 때 부터 1인분이었다.
라피스라줄리. 10년이상 자신과 합을 맞춰온 자신의 소중한 파트너. 처음에는 하급 정령이었던 그녀는, 실피아와 합을 맞추며 어느새 중급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사로서 1인분도 어렵지만, 그 위에 직업을 얹는다는 것은 두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실피아는 자신의 육체가 축복받았다는 것을 알았으며, 검을 좋아했고, 노력하는것도 싫지 않았다.
결국 에버그린 그로브 가문의 장녀 답게 검과 정령술을 합쳐 정령검사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
이 정도로 정령술을 다른 직업에 겹쳐 유효하게 쓰는 것은, 제프린 내 정령사 중에도 열 손가락 안에들어가는 괴물.
허나, 그런 그녀가 생전 처음으로, 검 끝이 흔들렸다.
흔들린 검 끝은 동요를 만들어내고, 만들어진 동요는 자세를 무너트리며, 무너진 자세는 부상의 단초가 된다.
검을 제대로 휘두르는데 실패해 손아귀에서 칼이 빠졌고, 앞에 있던 바위에 검끝이 튕겨 돌가루가 흩날렸으며, 그 안에서도 특히 큼직한 돌조각이 실피아의 얼굴에 때려박히려는 그 찰나.
휙. 하고 바람이 불어 공중에서 돌조각이 정지하고, 파스스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후 머물던 바람은 실피아의 볼을 한 번 긁고는 사라졌다.
“미안…. 집중을 못 했네. 오늘은 이쯤 해야겠어.”
자신의 소중한 파트너의 잔소리를 들은 실피아는 검을 수납하고는 훈련장에서 걸어나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검을 쥔 순간부터 자신은 검사인데도, 검을 휘두르는데 소흘하고 실수 마저 하다니 직업 실격 아닌가.
“어쩔 수 없지…. 아니 어쩔 수 없나.”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몸은 이미 달아오를대로 달아올라, 다른 것은 하나도 눈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하면 그야 얼마전에 받은 선물이었다.
엘프들은 누구나 가드닝에 소양이 있으며, 식물 하나 둘 정도는 무조건 키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권력의 중추에 올라갈 때 요구하는 것도, 가신으로 삼을 때 제공하는 것도 넓은 정원이니 얼마나 엘프들이 식물의 생장에 민감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실피아 에버그린 그로브 또한 그런 엘프 중 하나로서, 아주 보편적이고 평범한 엘프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얼마전에 받은 선물이 바로 지금 그녀의 몸을 달아오르게 한 것들이다.
극성의 숲에서 얻은 묘목과 씨앗들, 우선 그 안에서 나무는 제외했다. 제프린은 곧 졸업하니까 이 곳에 나무를 심어서 굴취하여 스트레스를 주느니 정령력으로 감싸 보관하는게 낫다.
그래서 지금 남은 건 이동식 화분에 심을 수 있을 정도의 난초.
허나 보통 난초가 아니다. 이스탈시아의 풀이라 불리는 이 난초로 말할 것 같으면, 실내 공기정화는 물론 밤에는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 천장에 마치 별의 바다같은 문양을 새기는 아름다운 일품이다.
“이 아이를 찾아낼 수 있다니…. 정말…. 상상도 못했어.”
실피아는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처럼 갓 싹을 틔운 풀을 바라봤다. 앞으로 이 아이가 어떻게 성장할지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리고 실피아는, 정령력으로 감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묘목이나 열매도 바라봤다.
“괜찮아. 너희들도 아름답게 키워줄게. 지금 제프린에서는 힘들지만…. 반드시 꼭 키워줄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검술에 집중할 수 있을까.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열매와 풀들을 바라보다, 실피아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이것도 다…. 울프람 덕분인가.”
극성의 숲.
본디 실피아라면 졸업할 때 까지 평생 가 볼 일도 없을 장소였다.
그 곳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나…. 대륙 전체를 뒤져도 보기 힘든 풀이나 꽃 씨등을 안전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수확이었다.
울프람은 이를 뇌물이라고 했고, 엘프라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뇌물들이었다.
그렇기에, 실피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엘프 사이에서 나무나 풀을 선물한다는 것은 저는 당신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라는 표현이며, 품종에 따라서는 구애라고 느낄수도 있다.
그리고 울프람이 자신에게 내민 이 선물, 뇌물들은…. 종족 사이에서는 하나만 선물해도 ‘진짜 사랑받고 계시네요. 부러워요.’ 라면서 선망어린 평가를 듣기 충분하다.
물론 그 울프람이 엘프의 전승을 알리도 없으니 상관 없다.
이건 그냥, 녀석의 말마따나 뇌물이다. 큰 의미는 없다.
“그래. 없을거야. 그럴리가 없지…. 으.”
볼을 부풀리며 실피아는 바람을 일으켜 조용히 풀을 쓰다듬었다.
충직한 기사는 뇌물따위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법인데….
그녀가 일으킨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마냥, 조용히 파문이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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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마치고 학생회실로 올라가보니 이브가 서류 한 장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귀여운 얼굴에 주름이라도 잡힐라.
“고민이라도 있나? 내가 도움이 된다면 상담역이 되어주지.”
“네? 아…. 그러면 차라도 한 잔 내줘요. 과일 차에 설탕 타서요.”
“알겠다.”
시트러스계 차에 과당을 좀 넣고, 얼음을 띄웠다. 전형적인 아이스티다. 얼음귤차정도 될려나.
“차갑네요?”
“고민이 많을 때는,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브는 나를 빤히 보다가 이내 빨대로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후 쪼옥 쪼옥 하며 빨대로 음료를 빨아들이는 소리만 들렸고, 부그르르 하며 다 마신 이브는 컵을 내려놨다. 나는 말 없이 음료를 리필했고 녀석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고민이지?”
“음…. 하아. 이걸 당신한테 말해도 될지 어떨지….”
다른 학생회 멤버들은 다 퇴근했고, 이브와 단 둘만 있는 저녁임에도, 녀석은 입을 열기를 꺼렸다.
뭐 대단한 일이라도 생겼나? 내 기억으로 이브 루트 3막은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말해봐라. 편해질수도 있잖나.”
“좋아요. 당신도 어느 의미 당사자니까요. 에버그린 그로브 가문에서 편지가 왔어요, 내용은 하나. 실피아를 귀가시켰으면 좋겠다.”
“실피아를? 어째서?”
“그녀의 가문은 제 신하가 아니거든요. 아마 지금쯤 이시스 언니랑 이넬디아 언니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거에요. 저는 아예 후보에도 안 들어 있고요. 실피아만 완전히 가족과 동떨어진거죠. 절연을 했다고 봐도 될거에요.”
“절연한 딸을 부른다. 그렇군. 네 가신을 포기하고 귀가해라. 라는 건가. 돌아가면 감금이군.”
“그렇게 되겠죠. 실피아는 졸업에 필요한 학점도 다 땄으니 졸업장은 문제 없이 나올거에요.”
“그런가…. 꽤 갑작스럽군 그래. 왜 부른거지?”
이런 이야기는 실피아 루트에서도, 그리고 이브 루트에서도 없는 완전한 오리지널 전개다.
갑자기 에버그린 그로브가 호출한다?
“에버그린 그로브 가문은…. 실피아와는 다르게 굉장히 시류를 잘 읽는 가문이에요.”
“즉. 줏대가 없다.”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이오와 이넬디아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제쪽에도 한 명 붙여놔서 나쁠 건 없다. 그렇게 판단했겠죠.”
“과연.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결정을 뒤집었지?”
“방금 말했죠. 당신도 당사자라고, 여기서부터 당신이 나와요.”
“내가?”
“네. 울프람 폰 로엔그린을 타도하고 정의를 기치로 내건 이브 폰 로엔그린 정권이었지만, 지금은 울프람도 그 휘하에 두고 있지 않나. 혹여 이브 폰 로엔그린이 기대에 못 미치는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고, 학생회를 휘어잡지 못한거라면? 실피아라는 으뜸패를 이브 옆에 놓을 필요가 있나? 라는 거겠죠.”
“급진적이군. 하지만…. 영 설득력이 없는건 아니다.”
“아마 실피아가 귀가하는대로 이넬디아나 이시스쪽에 붙이고, 반대쪽으로 간을 보던가 하겠죠. 정말…. 정치란 이래서 싫어요.”
이브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에서는 없을만한 시나리오다. 애당초 울프람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잖아.
“내가 살아서 문제가 된다면…. 내가 있는 곳에서 해결법이 나오면 되겠군. 너는 어떻게 생각지. 실피아?”
슬쩍 문 너머를 바라봤다. 내가 느낄 수 있는데 이브가 모를리가 없고, 우리가 문 너머를 주시하자, 끼익 소리를 내며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이브 님….”
“실피아. 전부 다 들었죠? 나중에 단 둘이서 이야기 할 생각인데, 울프람이 초를 쳤네요.”
“뭐 좋은 일이라고 숨기겠나. 셋이서 이야기 하는게 낫지.”
“말이나 못하면…. 아무튼, 실피아. 어떻게 생각해요?”
“저, 저는 돌아갈 생각이….”
“알아요. 저도 놔줄 생각은 없어요. 당신은 제 로열가드고, 제 신하에요.”
“이브니임….”
울먹이는 실피아.
주군간의 충의라, 참으로 좋군 그래.
“그럼 놔주지 않겠다는 걸 전제로 에버그린 그로브 가문을 설득할 수 밖에 없겠군. 우선 의절했는데도 가문의 명령이 강제성을 띌 수 있나?”
“대외의 시선이 문제다. 엘프는 전통을 중시해. 가문 내에서 서로 의절했다고 해도, 그게 밖으로 소문이 돌 정도가 되면 가문에도 먹칠하고, 나도 엘프 사회에서 설 곳을 잃는다. 그건…. 이브님께도 추문이 되어버린다.”
과연.
꽉 막힌 유교사회 같은건가,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진짜 호적에서 파였는데, 문중회의에는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던가…. 진짜 피곤하게 사는군. 음습한 귀잽이들같으니.
“후우…. 어떻게 한담.”
“이, 이브님 .일단 제가 돌아가서 설득을….”
“돌아가면 빨라도 내년쯤 오겠군. 아니면 그대로 황실로 특송될지도 모르겠구나.”
“으, 으으….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실피아도 이브도 답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
“우선 이 문제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렇지?”
“…….”
“…….”
두 사람이 빤히 나를 바라본다. 눈에 생기가 없다.
“아니. 그런게 아니다. 나를 죽여서 해결하라는게 아니다. 그 마력은 치워라. 에잇. 농담인 걸 알아도 몸이 떨린단 말이다.”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 그럴리가 없지 않나.”
마력이 거둬졌다. 어디가 농담이야. 이 자식들아.
“아무튼 이야기를 되돌리자. 내가 살아있다는게 문제라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자는 거다.”
“무슨 의미에요?”
“에버그린 그로브 가문은 박쥐에 간잽이. 염탐꾼. 신진부흥귀족이라 줏대도 없으며, 나아가 가문 내 이득만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절연한 딸이라도 회수해 재포장 한 후 다른 곳에 배달한다는 것 아닌가?”
“…….”
실피아의 눈이 가늘어진다. 뭐,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너도 의절했다면서.
“으, 음…. 어마어마한 폭언이네요. 아무튼 그래서요?”
“이브 님?!”
이브가 동의한 것에 크게 당황하는 실피아. 그런 녀석을 무시하고…. 나는 다음 단계를 입에 담았다.
“내가 살아있는게 에버그린 그로브 가문 입장에서 큰 쓸모가 된다. 그런 것을 증명하면, 그런 박쥐같은 녀석들은 관망으로 돌아서지 않겠나?”
“아…. 당신의 쓸모라…. 음…. 그게 증명이 가능할까요….”
“어렵습니다…. 이브님. 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으음….”
거 평가 한 번 신랄하네.
나도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말이야.
“예로부터 환심을 사는 데에는 뇌물이 최고지. 요컨데, 내 명의로 에버그린 그로브 가문에 뇌물을 부치면 된다.”
“그럴만한 돈이 있어요? 언제 빼돌렸어요? 전부 압수에요.”
“쯧. 누가 돈으로 부치자고 했나. 엘프들이 좋아하는 걸 보내자는 거다. 예를 들면…. 극성의 숲에서 주운 고급 씨앗이나 묘목을, 내 명의로 실피아를 위해 보내는 거다. 편지를 첨부해서 말이다.”
“아하. 그거 괜찮네요. 우선 그렇게 해볼까요. 실피아. 어떻게 생각해…요? 실피아?”
나와 이브가 서로 동의하고 실피아를 바라보자.
“어…. 아…. 으……? 그, 집에…요? 둘…의 명의…로, 묘, 묘목…을?”
실피아의 얼굴이 지나치게 붉어지고, 떠듬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뭐지.
뭔가 문제가 있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