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1026)
1026. Episode of EVE 20
그 뒤.
어디서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몰라도, 나와 실피아가 연인사이라는게 은연중 제프린에 퍼졌다.
그것도 굉장히 명확한 소문이 퍼졌다. ‘울프람이 전 약혼녀와 파혼하고 실피아를 골랐으며, 그 결과 이브의 휘하에 들어갔다.’ 라는 내용이다.
내부자가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정보지만, 동시에 이 내용을 제프린 내부에서 아는건 나와 이브. 그리고 실피아 뿐이다.
우리 셋이 이 소스를 퍼트릴 일은 없으니 범인이라 하면 뻔하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다만…. 아마 우리 가문이 한 짓일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 가문에서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거겠지. 제프린 내에서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소문을 퍼트리고…. 어딘가에 있는 정보통이 우리의 반응을 수집해 보고할거다.”
“정말 친가족 맞나?”
“맞다.”
실피아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러는게 당연하다는 듯 보였다.
그렇군. 귀잽이 녀석들은 음습하다…. 메모….
“그러면 겉으로는 계속 연인 행세를 할 필요가 있겠군.”
“그럴…. 생각인가?”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래. 그래야 하지…. 그게 우리의 목표로 이어지는 길이니까.”
“음. 너도 불편해도 참도록 해라.”
“불편…. 너한테는 연인 행세가 불편한 건가….”
실피아는 무언가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면 어디, 좀 더 편하게 움직여볼까. 내 배후에는 이브가 있으니 울프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도 꽤 넓어졌을 터다.”
“정확하다. 앞으로는 이브님을 대신해 네가 각 부서와 협의에 들어가도 된다.”
음.
이건 생각보다 권한을 크게 받았는걸.
내가 뒷공작을 할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가보네.
실제로 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야.
협의…. 협의회라.
그러고보니 이 시기라면 마학련과의 협의가 있군.
마법학부 학생 연합. 일명 마학련.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지만 어마어마한 엘리트 집단이다.
그만큼 적폐 집단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이권이 무척이나 민감하다. 이브가 들어갔을 때는 매번 속쓰려 할 정도다.
“마학련으로 하지.”
“미쳤나? 갑자기?”
“음. 기왕 갈거면 가장 어려운 곳을 가는게 재밌지 않겠나.”
“알겠다. 그러면 다음 마학련 모임에는…. 네가 들어간다고 말해두도록 하지.”
“음. 잘 부탁하마.”
마침 좋은 기회다.
마학련의 현 련주.
레지나 시엘라도 만나볼 겸 말이야.
***
마학련 협의회라고 해서 항상 꼭 대단한 걸 할 필요는 없다.
원작에서도 본편을 진행시키기 위한 조직일 뿐,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진 않았다.
마학련 회의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론상 황손은 모든 학부 내 회의에 고문으로서 참석할 수 있기에, 내가 참석한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사전에 고지가 됐는지 이쪽을 힐끗거리긴 해도 대놓고 물어보는 녀석들은 없다.
“그럼 오늘의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마지막에 금발적안의 엘프가 들어와 회의를 시작했다.
의제는 향후 마학련 내부의 신입생 커리큘럼에 대한 것이었다.
원작에서는 이 부근에 아일라 트라이스타를 지탄했고, 마학련에서 제명되었으며, 이브와 협력을 구사해 타도 아일라를 외쳤겠지만, 그 녀석의 문제는 내가 전부 해결했다.
슬쩍.
레지나와 눈을 마주쳤고, 녀석은 나를 한 번 깊게 응시하다가 다시 회의로 돌아갔다.
회의는 그대로 끝났다. 뭐, 마학련이 멍청한 적폐 집단인 건 맞지만,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건 또 아니니까 말이야.
“울프람 황자님.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구나, 레지나 시엘라.”
중요한 건.
이 마법학부 루트 어둠의 히로인. 레지나 시엘라.
“잠시 담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단 둘이서요.”
“상관 없다. 그리 길게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
레지나와 나는 둘만 남은 회의실에 앉았다.
다과를 꺼내려 한 녀석이지만, 이 다음에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사양했다.
그렇게, 친애나 우호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담화가 시작되었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그 악마같은 여자를 쳐내신 것 말이에요.”
“악마같은 여자?”
“네. 서부의 먼지냄새 나는 여자 말이에요.”
레지나는 그리 말하고 웃었다.
아, 뭔가 했더니 아일라 이야기인가.
그러고보니 두 사람은 견원지간이었지.
원래라면 남을 우습게 여기는 레지나한테 일갈했겠지만…. 아일라는 나도 좀 꺼려진다. 마녀와 계약하려고 한 여자를 어떻게 옹호할 수 있겠어.
“내 의사로 파혼하긴 했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신 것 같네요.”
“그것까지 알고 있나. 마학련의 련주가 소문에 능통하다는 건 또 처음 듣는군.”
“이 자리에 있으면, 여러모로 많은 정보들이 들어온답니다. 예를 들면 황자님께서 정말 풀냄새 나는 엘프와 연애를 하고 계신 건 아니라던가….”
“눈치가 빠르군.”
나는 양손을 들었다.
그렇군. 시엘라 가문은 중앙의 대귀족. 그 정보통을 통하면 나와 실피아가 진짜 사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쉬이 알아낼 수 있다.
“그럴만한 사유가 있으시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다시 제프린에서 얼굴을 뵙게 되어 다행이네요.”
“그렇게 안부 인사만 계속 물을 생각인가? 한가한 녀석이로다.”
“후후. 저도 마침 안부 인사만으로는 질린 참이랍니다. 그럼 어디.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황자님께서 얼마전에 내치신 그 먼지 냄새 나는 여자 말입니다. 사실 제가 좀 곤란하게 되었답니다.”
“곤란?”
“네. 황자님께서 눈치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블랙 마켓에도 발을 디디고…. 나아가 어두운 거래를 하고 있다는 정황 증거가 포착되었거든요. 알고 계셨나요?”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지나는 볼에 손을 가져다대고 과장된 한숨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런 모든 증거가 다 사라지고…. 마음 속 고민도 해결되었는지 평범하게 제프린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 뭐에요? 황자님과는 파혼했고, 마학련에서도 실적 부족으로 제명되었는데도…. 그런 것 따윈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면서 말이에요. 저는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든답니다. 마족과 거래한 정황증거를 가진, 시골 촌구석에서 올라온 먼지 여자가 행복한 제프린 생활이라니요.”
“본론만 말하도록.”
“혹시. 그녀가 마족과 거래한 증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가지고 계시다면…. 제가 비싸게 구매할 의사가 있습니다.”
“…….”
이건 또 화끈한 거래 제안이다.
아무래도 이 세계는 어떻게든 원작을 엮으려는 의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원망한 녀석이 1막의 귀신이 되었고, 2막의 저주는 시에스타로 업그레이드 되었으며 3막의 히로인 선정도 이러저러한 잡스러운 행사 끝에 정했으니 말이다.
4막은 누가 뭐래도 아일라 트라이스타의 파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레지나 시엘라는 그 선봉.
어떻게 해서든 녀석에게 파멸을 안겨주려는 세계의 복원 능력인지 뭔지…. 그런 건가.
거기에. 증거…. 증거라.
가지고 있지. 아일라의 마력이 똑똑히 새겨졌으며, 저주가 맺힌 물건도 있고 지금도 학생회실 건물 지하에서는 키메라 술사 반마족이 세끼 식사를 제공받으며 건강한 몸을 다지기 위해 하루 두 시간씩 운동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다. 참고로 황실을 경배하는 책을 매일 바꿔서 넣어주고 있다.
방구석에 쳐박혀서 마수와 맹수를 아트하게 붙여보는 일만 하던 반마족에게는 최고의 벌칙인 셈이다.
이야기가 조금 엇나갔는데…. 아무튼, 아일라를 파멸시킬 재료는 내가 가지고 있다.
여기서 레지나에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어마어마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건데….
“과연…. 네가 나를 만족시킬 대가를 치를 수 있을런지.”
“어머나. 가지고 계시군요?”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말이다. 우선 레지나 시엘라가 내게 내미는 선물이 그렇게나 매력적일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고귀하신 분의 눈에 찰지는 모르겠으나…. 저희 가문도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거기에 열두 장로 가문의 차기 가주. 제 인맥과 힘을 사용하면 이 제프린에서, 아니 나아가 대륙에서도 불가능 한 건 없답니다.”
“흠.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뭘 줄 수 있지?”
“그렇네요…. 그 풀냄새 나는 여자와의 계약 연애를 파기하고 저와 계약하는 건 어떠신지요? 마학련을 위시한 제 모든 파벌이 황자님이 나아가는 길을 돕겠습니다.”
놀랐다.
이 녀석이 아일라의 파멸을 그렇게나 바라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내건 조건도 꽤 놀랍다.
레지나 시엘라가 내 곁에 선다. 실피아 대신 말이지.
이 거래….
“헛소리도 그 쯤 되면 유쾌하구나.”
“헛소리…. 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레지나 시엘라. 너 스르로를 포함해 네가 바치는 그 어떤것도 나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저희 시엘라 가문을 우습게 보시거나…. 그도 아니면 저를 너무 얕잡아 보시는게 아닐지….”
레지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글쎄다.
내가 네 루트는 스킵으로 넘기고 제대로 안 해서 스토리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공통루트 기준으로는 꽤 알고 있거든? 예를 들면….
“피카로 시엘라는 정말로 너를 차기 가주로 생각하고 있나?”
“뭐….”
녀석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래.
우선 개박살난 너희 집부터 이야기 해야지.
현 가주 피카로 시엘라는 진짜 싸이코패스라서 친딸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손패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한테 딸을 약혼녀로 팔아버릴수도 있을걸?
물론 레지나도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해서 그렇게 버려지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 녀석이 제시한 세력은 전부 피카로가 내어준거다.
그리고 두 번째.
레지나 시엘라 본인의 쓸모다.
“스스로의 마력을 믿지 못하고 어중간한 재능을 저주하며, 만년 2위라는 성적에 절망한 너 스스로의 무력이 과연 내게 도움이 될까.”
“울프람 황자님! 말씀이 지나치세요!”
“음. 인정하마. 하지만 틀린말도 아니지 않나. 너는 언제나 자신이 버려질 수 있다는 존재. 아비의 손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하고, 가진 바 재능 또한 이브에게 뒤처진다는 것에 절망하고, 남을 증오하고 파멸로 이끄는것에 맛들렸으며, 손에 들어온 건 무어 하나 빼앗기기 싫어서 아이처럼 떼쓰는 철부지 아닌가. 이게 내 평가다만?”
“그, 그런…. 그런 폭언을…. 감히….”
“지금 황손에게 ‘감히’ 라고 했나? 이걸 문제 삼아서 어전회의 안건으로 부쳐도 될 정도의 모욕이군.”
“아….”
물론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내가 ‘황실 체면이 있지 일개 귀족이 감히라고 하는데 참아? 그러고도 황실이야?’ 라면서 바닥을 구르면 시엘라 가문에 은근슬쩍 압박이 가해질거고, 쓸모 없는 손패에 짜증이 난 피카로가 무슨 지랄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지랄은 온전히 레지나에게 전해질거고 말이야.
그러니까.
레지나 시엘라가 줄 수 있는 허상뿐인 배경보다, 당장은 부족할지언정 신념은 확고한 실피아가 곁에 있어주는게 훨씬 낫고….
“그러니까 기왕 연을 맺을거라면, 아무것도 없는 가짜보다는 진짜가 낫지 않겠나. 앞으로는 웃는 얼굴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하지. 거래하자고 해놓고 위조품과 불량품을 내놓는 것은 상거래법 위반이다.”
레지나 시엘라 따위의 가짜와 인연을 맺느니.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빛을 잃지 않을 이브 폰 로엔그린과 인연을 맺는게 훨씬 낫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레지나에게서 등을 돌려 회의실을 나갔다.
정말 쓸모없는 시간이다.
차라리 이브를 놀리면서 보내는 시간이 더 재미있고 유익하겠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