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139)
138. 서브히로인 (1)
내가 이 게임에 들어오기 전, 현실에 있었을 때 청춘의 혈기로 인해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슬픈 상처와 5700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을 남기고 끝났지만, 뭐 아무튼 그 때 깨달은 것이 바로 ‘노력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를 확고하게 정하고, 낭비 없이 노력하는 데에도 시간 제한이 있다. 노력 또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라는 사실.
그래서 D/Z SAGA를 처음 접했을 때 엄청나게 욕했다.
[왜 여기서 이브 노멀엔딩임? 분명 다 했는데?] [하 ㅅㅂ 중간에 1주 꼬여서 호감퀘 하나 놓친거 때문에?]그래.
D/Z SAGA의 시간제한은 엄청나게 빡빡했다.
애당초 이 게임은 회차별 플레이가 있어서 2회차 이후 컨텐츠도 득시글거린다.
대표적으로 필티아의 마계의 문이 그렇다.
아무튼 2회차로 가라는 시스템의 엿 먹이는 배려에 많이 괴롭긴 했다.
그렇게 시스템에 따라서 2회차를 넘어 3회차 4회차.
첫 세이브파일로 283회차 필티아 루트 최종보스 1턴킬을 깨고 나서 느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D/Z SAGA일까?’
‘이런 플레이가 내 플레이일까?’
‘아니야. 첫 풋풋함은 사라지고, 너무 쉬운 이 제프린 생활이 나의 생활일까?’
나의 이 글에 수많은 호감고닉. 분탕. 유동들이 댓글을 달아줬다.
‘영진좌 도랐음?’
‘토끼공듀도 님 앞에서는 뉴비일듯’
‘아니 필티아 루트 최종보스 1턴킬이 나는거였냐고 ㅋㅋㅋㅋ’
‘제발 사람답게 살아 쫌!!!!!’
‘그래서 머 어쩌게요. 이제와서 겜 접으실?’
‘가지마 너 가면 겜 망해!!!!!! 돌아와 영진좌!!!’
아니.
아니야. 얘들아.
그런게 아니야.
나는 접으려는게 아니라···.
‘지금부터 1회차 파일로 돌아갑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게요. 1회차 필티아 엔딩각 나왔음’
‘ㅇㅖ?’
‘머라거?’
‘ㅋㅋㅋㅋ?’
‘?????????’
수 없이 많은 카페 회원들의 찬사와 격려속에 ‘게임을 이 쯤 했으면 개발사에서 초대해서 밥 한번 사줘야 하는거 아니냐’ 라는 글이 개념글에 가고, 추천이 삼백 개쯤 박혔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보통 1회차 플레이만 지독하게 했다.
스피드런부터 시작해서 켈터스 안 쓰기, 이브 루트에서 이브 안 쓰기, 레지나 루트에서 사망 플래그 다 꽂아놓고 살아남기 ···유일하게 실패한 건 루디카 교수님에게서 살아남기 하나 뿐.
아무튼, 이 1회차런을 하기 위해서 최고 필수인건, 초반 빌드업이다.
D/Z SAGA는 시간 관리가 빡빡하기 때문에 회차마다 캐릭터의 육성에 허튼 짓을 하면 안 된다.
예를들어 마력 17 근력 17 켈터스를 키웠다고 치자.
사실은 근력 18이나 혹은 마력 18이 가능한데 두개 다 잡겠다고 이렇게 찍었다고 치자고.
여기서 겜알못들은 ‘와 근접과 마법 둘 다 가능하니까 갓캐 아닙니까?’ 소리를 하겠지만, D/Z SAGA를 조금이라도 한 유저라면 이렇게 말 할 것이다.
‘뉴비야 나쁜 말 안 할테니까 세이브 지우고 새로 파자’
17와 18의 차이가 극한에 달하듯, 이 게임에 만능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력 22의 퓨어 메이지인 이브를 동급 재주의 루디카가 이길 수 있고, 그 루디카를 배틀 메이지인 아일라가 잡을 확률이 생긴다. 그리고 방심한 아일라를 퓨어 근접 캐릭터인 켈터스가 운빨로 한 대 때릴 수 있다.
말 그대로 완전한 가위바위보다.
그럼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하려면, 가위나 바위. 혹은 보. 셋 중 하나를 손패로 쥐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아닌 잡캐를 만드는 분충은 용서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 객관화가 뛰어나며 눈치도 빠른 나는 나 자신이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할지 알고 있다.
바로 ‘생산계 재주’ 캐릭터다.
강한 파티원들을 잔뜩 모아서, 아이템을 덕지덕지 발라주고, 버프도 돌돌 말아주고 택틱도 대신 짜주고 일종의 서포터 캐릭터가 되겠지.
최전열에서 싸우는 재미는 없겠지만, 어중간하게 하느니 이게 맞다. 최종형으로 갔을 때도 최고의 효율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 편의점에도 도움이 된다.”
상위 스킬을 찍으면 찍을수록, 하위 스킬의 제작 코스트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편의점에 이런 저런 그런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기 위해서는 결국 생산계 재주로 육성하는게 답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편의점과 동시에 나 자신의 성장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아무튼 나의 원대한 계획.
즉 12막 45장까지 살아남아 평생 편의점 사장님 하면서 하하호호 살아간다는 이 그레이트 플랜을 현실화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의 행보가 더더욱 중요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4막부터는 ‘히로인 개별 루트’라는 점이다.
허나 나에게 개별 히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지금부터는 울프람만의 루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인물 이영진조차 본 적 없는, 전인미답의 루트!
이 여름방학. 나는 강해진다!
“동생은 다른 곳 안 가니?”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다.”
“부르는 아이도 없었어? 그건 ···슬픈 일 아닐까?”
“아니···.”
필티아의 물음은 묘하게 날카로웠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사실, 있었다.
이런 나라고 해도, 여름 방학 때 자기 고향에 오라거나, 놀러 오라는 아이들이 있었다.
네프티가 글루코 마을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고, 밀푀유가 동부에 같이 가자고 했으며, 루디카가 샤도우 일족을 소개해 준다고 했고, 아일라와 스피카가 에덴으로 놀러오라고 했으며, 끝으로 이브가 황실에 돌아가지 않을거냐고 물어봤다.
허나.
나는 그러지 않는다.
“······아니 나가지 않을거다.”
“어머. 그러니? 여름 방학은 학생들이 숨을 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울프람의 결말을 생각하면 제프린 밖으로 나가는 건 무척이나 위험하다.
원작에서 울프람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서 칼빵맞고 5분 후에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은 제프린 안에 있을 때다.
물리 무효. 아니 물리 저항 아이템이라도 갖추고 나가야지. 안 그러면 위험하단 말이지.
무엇보다. 이 여름방학에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필티아 누나와 할 일이 있다.”
“···으, 응?”
“【마계의 문】의 공략 준비. 이를 위해서는 여름 방학에 놀 틈 따위는 없다.”
“후. 후우. 그, 그렇구나. 그러면 동생은 누나를 위해 아카데미에 남은거···니?”
“그게 전부는 아니다. 다른 이유도 있지.”
“그, 그렇구나.”
“하지만 누나를 위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읏!”
마계의 문 공략 보상은, 아무래도 엔드 컨텐츠다 보니까 엄청나게 쏠쏠한 편이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공략에 필요한 재료들을 모으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음. 솔직히 말하자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도록 하겠다.”
필티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야 뭐, 바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좌절도 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마계의 문은 빡센 컨텐츠니까.
“후우. 후우···.”
필티아의 호흡이 거칠다. 그야 그렇겠지. 바로 공략할 수 있을줄 알았을테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방법은 반드시 찾아낸다.
우선.
“그럼 이제 떠나볼까.”
“···어디를?”
“내가 알기로 가장 이질적인 곳이지.”
“···누나는 제프린 밖으로는 못 나가는거 알고 있잖니.”
“무얼. 제프린 안에 있는 곳이다. 그건 그렇고 필티아 누나.”
“응?”
“혹시 좋은 술 가지고 있는 거 있나?”
나는 사이드 히로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
그렇게 파트라슈. 나. 필티아의 3인조는 동부 숲의 초입. 그 안에 있는 포탈을 열고 ···초대 황제의 기물이 묻혀 있는 곳을 알 법한 첫 사람을 만났다.
엘 피라네.
서브 히로인이자 요정 여왕.
그리고 술꾼.
그녀는 실로 기묘하게도 제대로 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또 술퍼먹고 ‘흐에엥 몬해먹게써 해방시켜조 엘피라네는 응애야 응애’ 같은 소리나 내뱉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깜짝 놀랐어요. 오랜 벗의 후예가 다시 찾아 올 줄이야.”
“요정 여왕 엘 피라네.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예에. 뭐.”
구라치지 마라.입김에서 술냄새 난다.
대충 등 뒤의 커튼 아래에 굴러다니는 술병들.
그럼 지금 저 정상적인 모습은 흉내라는 건데···. 그런 흉내를 낼 필요가 어디에 있지?
“그래서, 함께 오신 손님은 꽤나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 듯 한데···. 요정 여왕된 입장에서 삿된 방문객이라면 침입자로 간주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아, 그거군.
필티아는 어리긴 해도 드래곤이니까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견제하기 위해 강제로 술에서 깨셨다.
“그래서, 마력 패턴을 보자니 용종이신듯 한데, 성함이···. 어머?”
“역시나···.”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마주고보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네가 거기서 왜 나와?’ 라고 시선으로 말했다.
“티아? 진짜 티아인가요?”
“오래간만이에요. 엘 피라네 이모님.”
“어머, 어머나. ···후후. 그렇군요. 당신도 이 섬에 있었군요?”
“둘은 아는 사이인가?”
내 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님은 파파의 곁에서 함께 마족과 싸웠던 동료셨단다.”
“후후. 그립네요. 하르크에게 도전해서 완패하고, 강제로 중간계 연합에 속해서 마족과 싸웠었죠.”
“그렇다면 전우라고 볼 수도 있겠군.”
“전우? 아니 나는 일방적으로 지켜진 거지. 이모님 덕분에 몇 마리의 드래곤이 살아남았는지 모릅니다.”
“젊은 날의 혈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군. 정말 놀라운 이야기다. 이런 인연이 다 있다니.”
“···후후 정말로, 동생 덕분에 이모님과 다시 뵙게 되네? 고맙단다 동생.”
“그러게요. 설마 이렇게 ···티아를 다시 만날 줄이야.”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군.”
“그러게요. 이모님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 뒤로 하르크에게 다시 도전했지만, 보는 대로 대패해서 여기에 갇혔답니다.”
“그것 참 슬픈 이야기로군.”
“후후. 하지만 그렇기에 저희가 재회할 수 있었잖아요?”
“그러게요.”
“운명이란 신비한 것이다.”
······.
아 진짜.
모르는 척 추임새만 넣는거 더럽게 힘들다.
사실 나는 얘네가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다.
삼 백 년 전 중간계의 운명을 건 싸움. 엘 피라네는 하르크 옆에서 싸웠고, 필티아와는 이모와 조카처럼 서로 친밀하게 지냈다.
그 뒤에 엘 피라네가 ‘인간만을 위한 세상? 인정할 수 없어!’ 를 외치면서 요정대군을 이끌고 하르크에게 다시 싸움을 신청했고, 결과적으로 다시 한 번 깨져서 이 제프린에 갇힌 것이다.
하지만, 그걸 다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잖아.
솔직히 요새 초대 황제 운운하면서 여기저기 사기치고 다니는 거 나도 감당 안 되는데, 얘네한테 사기 잘못치면 진짜 황천길이다.
특히 엘 피라네는 마력 패턴으로 진위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이 간파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추임새나 넣자. 그게 답이다.
그렇게 두 인외종의 대화는 한없이 이어졌다. 나는 그 사이에 사람의 뇌란 이렇게나 많은 추임새를 넣을 수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후···. 하지만, 그렇군요. 당신도 이 모형 정원에 갇혀 있는거군요.”
“···여기서는, 파파의 결계가 있어서 마계의 문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니까요. 파파가 지켜주고 있는거죠.”
“위대한 선조님의 결계인가.”
“하지만 그 때문에 삼 백 년 간 여기서 나가지 못 한 거죠?”
“······네.”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군.”
슬슬 추임새 패턴이 없나?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사이, 엘 피라네가 필티아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이 모형 정원에서 나갈 수 없다고 해서 희망을 버리진 말아요.”
“···네. 이모님. 이 곳에서 만 년을 산다 해도, 저는 버틸 수 있어요. 이렇게 이모님도 계시니까요.”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갈 수 있다.”
“······벗의 후예님?”
“······동생?”
아차.하지만, D/Z SAGA에서 내가 할 수 없는게 있다고 들으면 나도 모르게 꼴받아서 입이 튀어나가 버리는 걸.
“엘 피라네에게 묶인 맹약은 【누군가가 일 대 일로 자신을 꺾을 것】 필티아 누나는 【모든 마계의 문의 완전한 봉인】 둘 다 할 수 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다 이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뭐야. 못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후후. 위로라도 고맙네요. 후예님.”
“헛소리로 위로 하느니 절망적일지라도 현실에 도전하는게 내 취향이다. 엘 피라네. 너의 자유는 내가 만들어주겠다.”
“···읏.”
“동생? 누나는 괜찮아. 마계의 문을 공략 못 해도 이모님이 계시니까.”
“필티아 누나도 똑같다. 오늘 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지? 내가 기적적인 재회를 이루어주는 파랑새로 보였나? 아니다. 현실적으로 누나를 제프린에서 내보내기 위해 여기에 왔다.”
“···읏.”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밖으로 데려가 주지.”
두 사람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티아. 같은 걸 생각했나요?”
“···아마도요. 이모님.”
“팔백 살 정도 나이차이는 ···괜찮지 않을까요? 뭣하면 요정으로 만들어서···.”
“수명이 짧은게 걱정인데 ···드래곤 하트의 반을 주면 반인반룡이 되니까···.”
두 사람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제프린의 여름 방학은 짧다. 자. 준비를 시작하자.”
***
같은 시각.
황실 도서관.
정숙과 정적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 도서관은 일반인이라면 출입증을 발급받는 것 부터 불가능하지만 황족이라면 누구나 제한 없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총 장서 수 약 팔천 삼백 만 권.
여름방학 귀가 직후 황제에게 인사 짧게 하고 도서관에 쳐박힌 금발의 황녀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황실 중앙 서고에 있다고 했잖아요!”
“화, 황녀님!”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오잖아! 대체 그 지식은 어디서 습득 한 거냐고요!”
“화, 황녀님! 고정하세요!”이브 폰 로엔그린.
마력치 22의 ‘자연재해’의 분노를, 일개 시종들이 막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이 황실 서고는 로엔그린 300년의 역사 그 자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사명에 시종들은 이브 앞에 섰다.
“그 쓸데없이 방대하고 정확한 지식은! 이 황실 서고에서! 얻었다면서! 요! 하나도, 하나도 안보이잖아아아!”
“황녀님! 제발 고정하세요!”
“고정시켜놓고 때려버리고 싶네에!! 어디서 얻은 정보냐고요!! 울프라아아암!”
이브와 팔천 삼백만권의 전쟁은 지금 막 시작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