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196)
194. 나보다 약한 사람의 명령 따위
이오 폰 로엔그린은 자신이 봤던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말을 놓겠습니다.】
【얼음 여왕.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입니다.】
차갑기 그지 없는 맹수같은 눈.
스스로를 기사라 칭하는 그녀다.
당연히 잠든 산맥이나 동부 숲 정도의 원정은 다녀 봤고, 몬스터와 싸워도 봤다.
하지만 울프람의 그 눈은 고작 그 정도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게 그 모자란 내 남동생이 맞나?
허나 그 눈매가, 자신의 절망을 형상화 한 라이아를 앞에 두고 교섭을 진행하던 그 목소리가 잊혀지질 않았다.
아직도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를 생각하면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 땅. 그 지옥 같은 포영의 설원. 하늘이 보라빛으로 물들고, 얼음창이 떨어져 내리고, 눈이 땅에서 치솟고, 바닥은 갈라지고,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하늘이 땅과 맞물려 뒤집히고, 수 천 만의 몬스터들이 자신을 포위했던 그 절망 속에서 들려온, 얼음과 바람이 맞부딫치는 소리. 차가운 여인의 목소리.
“…….”
그저 한 순간의 여흥으로, 그 자리에 있던 천 명과 자신의 삶과 죽음이 갈렸다. 그녀는 자신들을 죽일수도 있었고, 살릴 수도 있었다. 딱히 살려 둘 이유는 없었다. 그와 똑같이 죽일 이유도 없었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 그녀와, 울프람 폰 로엔그린은 서로 뜻이 맞는 동료라며, 대등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울프람이 아니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의 남동생에게 누가 나쁜 장난을 쳤거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을 때. 그녀는 이 제프린에서 아직까지 알고 있는,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이를 만났다.
“이오 님.”
“실피아.”
정령 기사. 실피아 에버그린 그로브.
자신이 몇 번이나 회유했지만, 결국 이브의 편에 선 긍지 높은 엘프 기사.
이 제프린에 돌아 왔을 때. 그녀가 건재함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러고보면 마침 딱 맞는 인재 아닌가.
“실피아. 이건 현 학생회에 대한 월권인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요.”
“제 권한을 넘는 일이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대답하겠습니다.”
역시.
여전히 충직한 기사다.
그녀라면 믿고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울프람. 제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에요.”
“울프람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그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대답해 줄 수 있나요?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이라 그만….”
“이오 님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재학때와 완전히 다른 위엄이…. 날카로운 눈매도 그렇고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냐. 정말 싫어 그 녀석….”
“실피아?”
“네? 뭔가 말씀하셨나요?”
“아뇨. 갑자기 혼잣 말을 하기에.”
“그런 적 없습니다. 잘못 들으신거겠지요.”
“…그런가요? 아무튼 울프람이 조금 변한거 같긴 한데. 혹시 여전히 난폭한가요?”
“예. 본디 성정이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속내는 후배들을 아끼는 것이, 조금 봐 줄 만하다고 할지…. 그래도 썩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할지…. 이 갑옷도 착용감이…. 따듯하고 포근해서….”
“실피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뭔가 말씀하셨나요?”
“……피곤한 듯 하니 오래 묻지는 않겠어요. 단지. 제가 알던 울프람과 다르기에…. 혹여 울프람을 옆에서 꼬드기거나, 그가 변하게끔 만든 주동자가 있나요? 황실의 중대사에요.”
“제가 조사한 결과로는 절대 없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네.”
이오가 접한 소문에 의하면, 실피아는 틀림없이 강경파. 즉 울프람을 이 제프린에서 내쫓기 위해 움직였던 인물.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이 기사가 그리 말한다면
울프람은 정말 스스로 원해서 변한 것이다.
그도 아니면….
“지금까지, 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비루한 개가 아니라 늑대였으며.
강아지가 아니라 성체였고.
이제야 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어금니를 꺼내 들었다면?
“이는 황실의 흉인가, 복인가…. 이제 와서 하필 울프람이라.”
어느쪽이든 옥좌의 정당한 후계자 중 한명이 그 모습을 드러냈음은 틀림 없었다.
“이건 …이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군.”
횡설수설하는 실피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이오는 그리 결단을 내리고, 학생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오의 원정은 사실 원작에서도 몇 번 나오는 떡밥이긴 하다.
얼마 전 이브가 금역 입장권을 발부하면서 ‘왜 하필 북쪽에 들어가느냐, 거기 실종자가 몇인지 아느냐’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게 다 이오의 원정이 실패해서, 내가 원정을 성공하면 내가 이 제프린의 새로운 레코드 홀더가 되는거 아닌가? 같은 젊은 혈기가 대가리를 쳐박고 그대로 얼음산에서 실종되서 그렇다.
그런데 이게 재밌는게, 원작 게임 시절에도 저 북쪽 산맥에 대가리 꼴아박고 폐사한 뉴비들이 꽤 있었다.
【왜 포영의 설원 열렸는데 가면 안 되나요?】
【슈퍼 영진님 공략 영상 보고 따라하면 깰만 한 거 아닌가요?】
【헐 님들 여기 깰만한데요?】
【? 머임 이 몹들】
【모임 안나가짐;】
【전멸했는데 왜 거주구 못감? 머임 버그임? 귀환 왜 안타짐?】
【?????】
【접음 ㅅㄱ】
뭐. 뉴비 쓰액기들이 하지 말라면 좀 하지좀 말지 왜 쳐박아서 그렇게 나가 떨어지는지 참. 고인물의 플레이는 하나하나에 의도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고 꼴아박아야지.
애당초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는 포영의 설원 오픈 시점에서 깨라고 만든 보스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게임 엔딩까지 잡으라고 만든 보스도 아니다.
세력작 보스랑 맞다이 치는 게임이 어딨겠나. 세력작 보스는 가서 퀘스트 주면 아 감사합니다. 하고 템받고 퀘스트 수주하라고 만든거다. 세력 보스가 우습냐.
라이아를 그렇게 잡고 싶다면 그랑 펠리시에랑 편짜서 라이아를 용암속에 쳐박던가 해야지 안 그러면 답이 없어요.
심지어 자기 나와바리. 즉 포영의 설원에 있는 라이아? 장담하는데 엘피라네보다 두 단계 세다. 만렙 이브랑 켈터스에 레지나 섞고 탱도 네프티로는 택도 없고 엘프 자매인 샤이나, 다르크랑 같이 꼴아박아야 승산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오 폰 로엔그린의 원정은 솔직히 말해서 빡대가리의 천태만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게임이라도 마법저항세트를 풀로 땡겨도 상태이상 걸려 죽기 십상인데, 그걸 기사학부 애들 천명 밀어넣는다고 공략이 되겠냐? 라이아가 그냥 살려준거다, 보통 정령은 감정에 솔직해서 적이라고 생각하면 일단 죽이고 나서 생각하는데, 얼마나 멍청해보였으면 적이라고 생각도 안 했을까.
게임이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서, 고인물인 나도 조심조심 한발한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라. 이 게임의 난이도는 불지옥이다. 내가 그 불지옥에서 등을 지지면서 어으 따숩다 할 정도로 고여서 그렇지.
아무튼 이걸로 웬만하면 이오는 나를 귀찮게 안 할텐데.
안 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는데 말이지.
“울프람. 할 이야기가 있단다. 누나한테 시간 좀 내 줄 수 있겠니?”
“……돌아가라.”
진짜 귀찮으니까.
돌아가주세요.
내 안의 슈퍼 영진이 깨어나기 전에.
***
이오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내 안의 슈퍼 영진을 깨워서 그 피로 목을 축여야겠다.
미안해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기로 했는데.
“우선 자영업자라고 한 네 뜻을 존중하여, 사업 방해금으로 오 백만 린 정도를 준비했다.”
“앉아라. 차를 내오도록 하지.”
아. 누님 진짜 섭섭합니다. 우리 사이에 하루 정도 민폐도 끼칠 수 있고 하는거지,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구십니까.
“좋은 차구나,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맛이지만 …마음이 차분해지네.”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에게서 얻은 빙정초로 끓인 차다. 냉기의 마력을 담았기 때문에 심신을 안정시키고 마력의 흐름을 정순하게 해주지.”
“…그, 그래? 그렇구나.”
참고로 어제 퀘스트 보상이었다.
웃기지 마라. 빨리 강화물약 내놔 이 망할…!
하지만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는 그냥 웃기만 했다. 볼따구를 잡아 늘려버릴까보다.
아무튼 그냥 찻잎이고 양도 꽤 되기 때문에, 이래저래 생색내면서 풀기로 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 온 이유가 뭐지.”
“혹시 황위에 관심이 있니?”
“…….”
와 갑자기 노빠꾸로 찌르고 들어오시네, 인생 한 번 살아도 브레이크 밟고 사셔야죠. 진짜.
“만약 관심이 있다면 누나의 적이 되는건가?”
“없다. 멋대로 넘겨짚지 마라.”
“넘겨짚기.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예 관심이 없다. 라는 말은 믿을게. 그렇다면 …누구를 지지할 생각이니?”
“누구도 지지할 생각은 없다.”
“그건 좋지 않은 판단이란다. 울프람. 이건 누나가 순수하게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예 숨죽여 야인으로 산다면 모를까 황손인 이상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
차라리 누군가에게 배팅하는게 오히려 속이 편할 것이다.
이기면 이기는대로 한 자리 해먹을 수 있고, 지면 지는대로 바람막이가 되어 줄 테니 말이다.
논리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그렇다 해도. 이오 폰 로엔그린의 편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애당초 너는 너무나 약하다.”
내 말에 이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무례하지 않니?”
“고작 포영의 설원에 애먹는 자의 편에 설 이유가 없지 않나.”
“…고작. 고작이라고?”
“물론이다. 단기(單旗)로 포영의 설원 공략을 해낸 나에게 천의 원정대를 끌고 입구에서 쓰러져 실려온 네 아래에 들어가라는 이야기인가?”
내 말에 이오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기 전에 한 마디 더 듣고 가셔야지.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누나가 강해지면 누나의 세력에 들어 올 거니?”
“그럴 일도 없다.”
“…그건 또 왜?”
“너는 나를 팻말로 쓸 생각밖에 없으니 차라리 내 세력을 굳건하게 만들거나, 다른 황손과 협업해야 한다면….”
“한다면 누구? 오라버니? 언니? 아니면?”
“…….”
잠깐 떠오른 얼굴.
이내 머릿속에서 그 띠꺼운 얼굴을 지우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 황제가 누가 되던 큰 관심은 없다. 트라이스타와 협업해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말하니 더욱 더 가지고 싶은걸?”
그리 말하며 이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도 참 끈질기다.
“그럼 나중에 또 올게.”
“그 전에. 시험의 보수는 어떻게 할 거지? 시험은 내가 이겼다만.”
“……누나는 약자라면서 꼭 받아야겠니?”
그야.
당연히.
“받아야지.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나중에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황실로 연락하렴. 약한 누나한테서 너무 뜯어먹지는 말고.”
“고려해보도록 하지.”
그래.
고려만 해볼게.
***
폭풍과도 같은 이오가 돌아간 그 날 저녁.
편의점을 찾아 온 것은 이브였다.
이브는 의자에 앉아 해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봤다.
“언니가 돌아갔네요. 후우…. 정말 폭풍같은 사람이에요.”
“그렇군. 실로 민폐가 되는 이였다.”
“울프람도 뭐…. 나름 음. 고생…. 아니지 고생은 내가 다 했고, 그 뭐냐. 수고…. 아니 수고도 내가 다 했고.”
“시비 걸러 왔나.”
“쯧. 사람이 좋은 말 좀 해주려면 조용히 들으면 안 되나요?”
어디가 좋은말이 었는지 설명해라.
눈을 가늘게 뜨고 이브를 노려보자 이브도 맞 받아쳤다.
평소처럼 중지를 교환하고 잠시 으르렁거린 뒤 다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니가 뭐라고 했나요?”
“별거 아니었다. 자신의 세력권에 들어오라더군. 흔한 헤드헌팅이다.”
“혹시, 제안에 응했나요?”
“궁금한가?”
“아뇨! 전혀요!”
내 비웃음에 이브가 발작했다.
“들어갈리가 없지 않은가. 나보다 약한 이의 휘하에 굳이?”
“그렇군요. 예상은 했지만 …후우.”
내 이야기에 이브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선택을 해 봐야 팻말로 쓰일 뿐이다. 놈들은 써먹기 좋은 인형이 필요한 것 뿐이지.”
“그야 그렇겠죠. 사실 저한테도 언니나 오라버니의 제안이 엄청 와요.”
“이런 말 하기는 참 아니꼽지만, 서로 고생이군.”
“저도 그 말에 위안을 얻는게 참 기분 나쁘지만, 그러게나 말이에요.”
작은 한숨이 겹쳤다.
잠시 서로 사색에 빠진 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브였다.
“저는 가 볼게요.”
“사탕이나 한 봉지 가져가도록.”
“드디어 학생회장에 대한 경외심을 갖기 시작한 건가요? 진상품으로 받도록 하죠.”
“돈은 내도록.”
“나가 죽어요.”
그리 말하면서도 이브는 만 린 지폐 한장을 툭 하고 올려놓고는 사탕을 들고 편의점을 떠났다.
그렇게 혼자 남은 편의점에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울프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이상.
황손으로서도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날이 반드시 온다.
“차기 황제라.”
뭐.
황제가 되어도 내 자유를 보장해주면 협업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솔직히 그런 사람이 어딨겠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