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390)
§ 389. 뽑기는 나쁜 문명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그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날.
그리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것이 얼마나 덧없고 헛된 생각인지 알게 된다.
그러면 회사는? 자기 사업은? 그 모든 걸 던져놓고 떠나겠다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자기 마음 속 목소리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목소리가 점차 작아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내면의 목소리에 심취해 떠나기로 했다.
지금까지 안 가본 곳.
그리고 작은 모험이 될 수 있는 곳.
“솔직히 간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목숨이 위험해 질 수 있다만.”
그게 안 갈 이유가 되진 않는다.
하여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제1마법학부의 부속 거리이자 제프린 최고 귀족들의 명문 거리.
그 이름도 위대한 로열 스트리트.
겨울방학. 고귀한 이 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거리를 거닐며 깨달았다.
“···놀라울 정도로 연 가게가 없군.”
그래.
그랬다.
생각해보면 제프린은 지금 겨울방학.
기사학부 애들이야 집에 갈 돈이 없어서 제프린에 남는다지만, 어디 최상위 귀족가에서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한가.
당연히 손님이 없는 로열 스트리트는 을씨년스러웠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연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야 하나.”
겨울의 향취라면 향취긴 한데, 이런 걸 바라고 나온 것이 아니니까.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저 멀리에서 문을 열고, 내부의 등을 켜고 영업하는 가게가 있었다.
이 겨울에 대체 어떤 가게일까.
오히려 흥미가 동해 그 앞으로 걸어갔고, 간판을 읽을 수 있었다.
“···천금상?”
잠깐.
천금상이면 그러니까 ···거기 아니야?
안을 힐끗 보니 점원이 눈에 띄었다.
그야 눈에 띌 수밖에 없지.
전신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서 카운터를 보는 애가 어디 흔하겠나.
일단 자리를 피하자. 그리 생각한 순간.
“어머. 황자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렇군.”
그 쪽에서 먼저 나를 눈치 채고는 말을 걸어왔다.
이미 대화를 나눈 이상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오셨는지요. 혹시 파산하셨나요?”
“그럴 리가 있나. ···쯧.”
“후후. 그럼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리 말하며 싱긋 웃는다.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극단의 선택을 한 그녀.
이졸데 크루엘이었다.
***
가게 안으로 안내한 이졸데는 웃으며 차를 내왔다.
접객실까지 안내받아 자리에 앉는 동안, 나는 가게의 홀을 충분히 둘러 볼 수 있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필티아의 보석의 숲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물건들을 구비해 놓은 보석상.
가게의 분위기도 나름 고풍스럽고, 크기는 ···뭐라고 해야 할까. 한국으로 치자면 도심의 큰 안경가게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원래 천금상에 찾아와도 내부까지는 구현이 안 되어 있어서 이졸데는 외부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말이다.
“설마 이 천금상까지 찾아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들린 것이다.”
“후후. 그러십니까. 차는 입에 맞으시는지요.”
“괜찮은 민트 티구나. 향은 좋군,”
“예에. 최근에는 이 향에 달콤한 맛을 섞어 먹으면 어떨까 연구 중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황자님의 점포에서는 간식도 취급하였지요.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어디 상인이 손님을 가리는 것 보았나?”
“후후. 지당하십니다.”
이 녀석은 역시 위험하다.
아예 맛이 갔어.
다른 건 몰라도 초콜릿은 절대 주지 말아야지.
그러고 보니 천금상이라.
이졸데는 원작 기준으로도 그리 많은 설정이 밝혀진 캐릭터는 아니다.
이브가 빛의 히로인으로서 모든 게 밝혀졌다면 레지나는 그림자의 히로인으로서 추측해야 하듯.
이졸데도 기사학부의 그림자 히로인이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추론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울프람의 로열 가드 후보였다는 것도 원작에서는 전혀 언급이 안 됐었거든.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의 루트를 몇 번이나 탔음에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이졸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예. 하문하세요. 황자님.”
“어째서 천금상에서 일을 하고 있지? 너는 학자가 되길 바라는 것 아니었나?”
“어머. 맞는 말씀이세요. 저는 학자로서 살고 학자로서 죽고 싶답니다. 배움에 끝이 어디 있겠나요. 하지만 ···이 보석상은 실로 물욕 덩어리. 의문이 드실 만도 하네요. 그럼 어디보자 ···황자님께서는 크루엘 가문을 아시나요?”
“대륙 제일의 보석 명가. 크루엘은 보석에 한해서만큼은 드워프 이상이지.”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크루엘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죠. 그런 제가 보석상을 하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학문의 길을 걷는 게 더 이상하죠.”
“하지만 너는 보석보다는 학문에 더 관심있지 않나.”
내 말에 이졸데는 눈을 크게 떴다가 뭐가 그리 웃긴지 키득키득 웃었다.
“네. 맞습니다. 저는 학문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했죠. 황자님께 버려진 그 날 부터. 아. 탓을 하는 건 아닙니다. 결국 눈이 뜨인 거니까요. 크루엘 가문의 지위를 이용해 황자님의 곁에 서서, 대륙 전체의 보석의 흐름을 조정하는 조정자. 그게 제가 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물욕 가득하고 천박한 삶인지. 버려주신 황자님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
엄청 쿡쿡 찔린다.
“중요한 것은 그런 물욕이 아니라 정신의 충족이었죠. 배우고 동시에 스스로를 갈고 닦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고뇌를 지혜와 지식으로 헤쳐 나가는 삶. 그런 삶이야말로 평생 행복한 인생 아닐까요.”
“······.”
내가 버린 결과 묘하게 득도한 건가.
“그래서 저는 지금 무척이나 정상이랍니다.”
“······.”
사람의 모가지를 360도 돌리면 앞을 보니까 정상인이에요. 같은 소리다.
허나 그 원흉이 나였기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녀석의 인생 철학은 참견하지 않기로 하고,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그래서 이 천금상은 왜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왜 지금 영업하고 있는 거지?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전혀 되지 않았다만.”
“그건 겨울이기 때문이랍니다.”
“잘 이해가 안 된다만.”
“겨울은 보석의 매물이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입니다. 다들 힘들거든요. 식량 수급도 원활하지 않고, 영민들의 납세액도 적어지고, 파산까지 각오한 영지들이 제일먼저 뭘 판다고 생각하세요?”
“···보석이겠지.”
“네. 그 와중에 제프린에서 귀향하지 못 한 상위 귀족들은 더더욱 끔찍한 상황이죠. 상위 귀족이 귀가를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수치거든요.”
“그래서 금붙이를 판다는 건가.”
“네. 그래서 최대한 양심적인 가격에 사드리고 있답니다.”
이졸데는 그리 말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 녀석은.
아니 이 게임의 메인 히로인 4인방이 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착하고, 좋은 녀석이다.
다만 스스로가 믿는 정의와 가치관에 심각하게 몰두해,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일 뿐.
“그런가. 좋은 일을 하는군,”
“예에. 매입가의 1할은 제 돈이니까요. 그걸로 학비를 대고, 대학원 생활도 그걸로 버텨야 하기에.”
“······.”
아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게 있었다.
“켈터스가 얼마 전에 말을 걸어오더군. 대학원이라는 곳은 과연 옳은가. 멀리 진리만을 탐구해 눈 앞의 고통을 넘어가도 되는가. 하고 말이다.”
“······켈터스 군이 말인가요?”
“그래서 나는 우선 돈이라고 했다. 돈이 있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을 구하고, 동시에 멀리까지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어머, 현명하신 조언이세요.”
“너는 도와주지 않는가?”
“그 또한 그 아이가 헤쳐 나가야 하는 길. 저는 그저 등만 밀어준 것뿐이랍니다.”
“파트너는 아니다?”
“같은 지평을 볼 수 없다면, 파트너라 할 수 없죠.”
“······.”
켈터스가 이졸데 루트를 탈 경우.
제일 처음 그를 지칭하는 칭호가 바로 파트너다. 거기서 한 단계 올라가면 동반자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군.
“그런가. 차는 잘 마셨다.”
“네. 저도 오래간만에 황자님을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곧 졸업하지만 한동안은 천금상을 운영할 예정이니 언제든 들러주세요.”
그런가.
그러고보면 졸업해도 얘는 제프린에 남겠구나.
“······아. 그렇지. 이건 선물이다.”
“어머.”
퀵 크리에이트로 간식을 조합. 만들어 낸 것은 민트맛 캔디였다.
이졸데는 사탕을 입에 넣고는 잠시 침묵한 뒤. 후후. 하고 웃었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
“······황자님.”
“뭐지?”
“저희, 처음부터 다시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보다 저를 로열 가드로 고용하시면···.”
“그럴 일은 없다. 너는 네 길을 가라. 나는 내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내 로열 가드는 이미 정해져있다. 번복은 없다.”
“어머. 아쉽네요. 사실 저도 말만 해본 것이니 용서해주시길.”
정말.
이 녀석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르겠다.
***
겨울은 좋다.
남자를 고독하게 만드는 이 겨울의 바람이 좋다.
언제든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흐린 하늘이 좋다.
오늘은 고독을 곱씹을 생각이다.
한껏 이 분위기에 취해 로열 스트리트를 걸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황자님 아니십니까.”
“······.”
고독을 곱씹으려는 찰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근원지를 바라보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가늘게 뜬 눈. 조금 긴 회색 머리. 살짝 높은 톤의 목소리.
틀림없는 제프린 교복을 입고 있으나 위에 덮어 쓴 큰 회색 후드가 끔찍하게도 수상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 녀석을 안다.
“요제프.”
“···흐하. 제 이름까지 기억해 주실 줄이야. 이것 참 감격스럽습니다. 황자 전하. 그렇게나 쓰레기처럼 보시던 분께서 어떤 심경의 변화신지. 흐하···.”
“······.”
나는 이 녀석을 안다.
요제프
상인 가문 출신이었으나 제프린 재학 중 가문이 망해버린 아주 특수한 케이스.
결국 성을 바꾸고, 제프린이라는 양지와 블랙마켓이라는 음지를 동시에 돌아다니며 거래하는 ‘회색 상인’
뭐 다른 말로 하자면 꽤 고급품의 장물을 구할 수 있는 암상인이다.
스토리 내에서는 5막 이후에, 가격을 꽤 후려쳐 팔지만 옵션 자체는 괜찮은 녀석들이 많다.
울프람 녀석.
요제프와도 연관이 있던 건가.
아니면 ···그 요제프 덕분에 비리를 저지를 수 있었나?
어느 쪽이지?
“이것 참. 최근에는 황자님 정도의 큰 손이 없어서 물건이 안 팔려 큰일입니다. 흐하···.”
“나는 이미 그쪽에서 손을 씻었다. 장물을 들고 오지 마라.”
“그러지 마시고, 현 학생회장의 강경한 정의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있으시겠지만, 다행히 지금 여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
“눈 호강 하신다고 생각하고 보고만 가셔도 상관없습니다. 구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그런가?
“허나.”
“좋은 물건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자신 있는 일품들입니다. 오래간만에 구경만이라도 하시지요.”
그건 ···그렇지.
그냥 사지 않고 아이템을 보는 것만으로도 된다고 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최근에 어? 얼마나 많이 시달렸어. 어딜 가느니 마느니 세계가 멸망하느니 마족이랑 싸우느니 열차를 짓느니 황제가 되겠다는 애 뱃살을 빼주느니 마느니.
그러니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안내하도록.”
“예에.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요제프는 자신의 가게에 안내했고, 그 안에서 장물을 볼 수 있었다.
“훔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망해버린 가문에서 싼 값에 공수해 자금을 수혈해주고, 먹고 살 정도로만 불려서 팔 뿐입니다.”
“······.”
그래 뭐.
그런 설정이었지.
아무튼 물건은 잔뜩 있었다.
악세서리는 기본이요. 마법이 부여된 무기들이나 방어구들도 있다.
희귀한 약초나 물약들도 충분히 있는 상황.
이 ‘현실’에서 고급 물건을 구하는 것은 게임보다 힘든 법.
전체적으로 티어는 두 단계 정도 낮아도 지금까지 본 물건들 중 충분히 양품에 속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의 물건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건.”
“그거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에 들어온 물건입니다. 멋드러지긴 한데 마력 감정에서 아무것도 안 나와서 말입니다. 그런 물건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셨습니까?”
【히로인 전용 장비 뽑기권(중급)】
【5T】
【메인 히로인과 서브 히로인 전원의 전용 장비 중 하나를 뽑을 수 있는 뽑기권입니다.
중급으로서 6T 장비부터 4T 장비까지 포함됩니다.
어떤 히로인의 장비가 나올지는 완전히 랜덤입니다.
고정 캐릭터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는 착용할 수 없습니다.】
······.
아무리 봐도 그거다.
모바일 게임의 아련한 잔향이다.
“사도록 하지.”
“황자님께서는 그 물건의 용도를 아시는지요?”
“모른다. 허나 회색 상인인 네가 모르는 것에는 흥미가 있군. 탐구해 볼 생각이다.”
“흐하···. 뭔가 알아내게 되시면 꼭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여, 다른 물건은 필요 없으십니까?”
“없다. 그럼 가도록 하지.”
“살펴 가시길.”
······.
나는 품 안에 있는 물건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몇 번을 다시 보고 파인드 아이템을 돌려도 틀림없다.
좋은 물건이고, 대단한 물건이다.
전용 장비는 통상 장비보다 보통 1티어 더 높게 쳐주니까, 잘 뽑으면 3티어 장비까지 뽑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레지나가 나오면 어쩌지.”
드높은 희망보다는 처절한 불안감이, 뇌리를 스치는 건 어째서일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