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458)
457. 어른의 계단
실피아 에버그린 그로브.
오래간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텀이지만, 그래도 약 한 달은 안 만난 기분이 들기에 대회가 끝나고 잠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지금은 밀정을 하고 있다.”
“밀정이라는 건 그렇게 대놓고 정체를 밝혀도 되는 일인가?”
“음? 하하. 울프람. 오래간만에 만나니 농담이 많이 늘었구나, 이제는 사교회에 나가도 될 정도다.”
“······.”
대체 방금 그 말 어디에 유머 코드가 있었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밀정이 자신을 밀정이라고 밝혀도 되는 건가?
“국가간의 간첩도 아니고, 그저 황위를 놓고 겨루는 한 세력의 오른팔 아닌가. 내가 뭘 하던 상대측에서는 어차피 밀정이라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걸 입에 담나 담지 않나 결과는 똑같다.”
“···이미 네가 움직이는 순간, 밀정의 움직임이라 모두 생각한다는 말인가.”
“그래. 내가 물을 마셔도, 잠을 자도, 아침에 기지개를 펴도, 밥을 먹어도 그 모든 순간이 다른 세력에서 보기에는 밀정의 움직임이다. 그러니까 역으로 대놓고 말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아니면 뭐··· 나를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럴 능력이 있다면 옛 저녁에 했을 것이고, 그럴 위험에 처했다면 너에게 도움을 요청했겠지.”
음.
맞는 말이다.
명예 파티원이라고 해도 메시지 정도는 날릴 수 있고, 그에 따라 위치 전환도 가능하다.
실피아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양 팔을 허리에 대고는 밝은 미소로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거나, 일부러 거짓 섞인 정보를 뿌리거나···. 아무리 봐도 함정인 게 뻔한 사교회에 초대하거나. ···이래저래 매일매일이 피곤했는데, 오늘은 덕분에 한 숨 돌렸다. 감사를 표하지.”
“음.”
이제 어엿한 사회인.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몫을 하고 있는 그녀는, 학생시절의 표독한 표정이 아니라, 어딘가 여유 넘치고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어른이구만 그래. 다 컸어.
질끈 한 갈래로 묶은 포니테일의 머리카락은 여전하고, 건강해 보이는 몸과 얼굴. 그리고 허리춤에 패용한 한 자루의 세검까지. 그리 변한 건 없지만. ···아니 잠깐.
“실피아.”
“응? 왜 그러지?”
“그 레이피어는 뭐지? 내가 너에게 해준 무기와는 다르지 않나.”
“아···. 아하하. 이거 말인가. 얼마 전이었더라 갑작스럽게 네가 ‘수호성’의 힘을 빌려갔던 때가 있지 않나.”
음.
그런 때가···.
있었다. 그래. 첫 번째 문에서 흑랑장과 싸웠을 때 빌릴 수 있는 모든 패를 빌렸고, 그 안에는 수호성도 있었다.
수호성.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죽거나 탈진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실피아의 체력을 대신 소모하는 것.
그런데 그때가 왜?
“사실 그 때 작은 싸움이 있어서, 졸업할 때 가지고 나갔던 네가 만들어준 검의 검면으로 막았다가···.”
실피아는 쨍그랑, 하는 효과음을 내면서 칼이 깨졌다고 했다.
“라피스라줄리는?”
“다른 적과 싸우고 있었지.”
“바람 마법은?”
“쓰고 있었다만.”
“그럼에도 검이 깨졌다면, 어려운 싸움이었을 터. 어찌 나를 부르지 않았지?”
“네가 수호성의 힘을 빌려서까지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나.”
이런 멍청한 녀석.
이 녀석. 그 때 절체절명의 위기였을 거다.
하지만 내가 수호성을 쓰는 것을 보면서 위치 변경을 요구하지도 못했고, 결과적으로 검을 해먹었다는건 가.
“다른 부상은?”
“부상은 없다. 정말 검 한 자루만 날아간 거다. 그 때문에 이런 ···보급형 세검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지.”
어쩌다 이런 일이.
이건 파티 리더로서의 수치다.
아니, 절대로 수호성을 쓰지 않겠다 맹세했던 것을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이기도 하다.
“안 되겠군. 따라와라. 며칠간 시간적 여유가 있나? 없다면 만들어라.”
“으, 응? 갑자기 말인가?”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들켰다는 것을 멋쩍게 생각하는 그 모습에 제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이건 실피아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수호성을 쓴 나에게 화가 났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세팅해주마.”
내 말에 실피아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를 보다가, 이내 몇 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건···. 음. 그러니까.’ 하고 중얼거리더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으, 음···. 그럼 나를 전부 네 색으로 물들이겠다. 라는 건가?”
이렇게 물었다.
그야 고인물이 세팅 값을 처음부터 정해주는데 당연하지.
“그렇다.”
“후후. 좋다. 가슴 두근거리는구나. 따르도록 하지.”
실피아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내 뒤를 바로 따랐다.
“승자는 저인데, 어째서···?”
“으음. 이것 참.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끼어들 수도 없는 상황이네요. 밀푀유 후배님. 저랑 같이 티타임이나 가지시겠어요?”
“레지나 선배님···?”
“오늘 이 자리에서 조역의 자리에 조차 서지 못한 여자끼리 다과회나 열도록 하죠. 당신의 그 지성과 재치를 보니 한 번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레지나외 밀푀유도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고, 다른 심사위원은 전원 귀가했다.
좋아. 그럼 진짜로.
“오늘은 실피아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겠군.”
“여, 여전히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그야 부끄럽지.
파티원에게 그런 수치를 안겨줬는데, 이 부끄러움을 풀지 않으면 진짜 죽어버릴지도 몰라.
***
우선 제일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소모품의 상태는 어떻지? 물약을 항상 들고 다닐 수 있는 벨트는 가지고 있나?”
“그런건 없다만, 애당초 물약은 벨트에 보관하는 것인가?”
“쯧.”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방어구도 제대로 갖춰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안’에 있는 파티원이 아니라 ‘밖’에 있는 파티원도 책임져야 한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살아가기로 각오 했다면··· 졸업 한 이후에는 당연히 모두 밖에서 만나게 될 텐데, 너무 제프린 내부만 신경 쓴 것이 아닌가.
“우선 허리 사이즈를 말 해 봐라. 네 허리 굵기를 알아야 벨트를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울프람. 그건 나에 대한 승부 신청인가? 좋다. 받아들이마. 지금 당장 검을 뽑아라.”
“허튼 소리 할 시간 없다. 한 시가 아까우니 어서 말하도록. 벨트는 마법을 부여해도 허리에 맞춰서 자동적으로 늘어나진 않는단 말이다.”
“···윽. 아, 알았다. 그렇게 보채지 말도록!”
그리 말하며 스윽. 실피아는 허리 사이즈를 종이에 적어 내게 넘겨줬다.
그런가. 이 정도 사이즈인가.
“그래도 이브보다는 얇지 않은가.”
“못 들은 걸로 하마.”
뭐. 아무튼.
벨트는 엄연히 액세서리 제작 기능에 들어가고, 여기저기서 얻어놓은 희귀 몬스터 가죽 등으로 만든 다음 마법 부여를 하면 그만이다.
지금의 나는 준 종결까지는 만들 수 없어도, 최대 성공률을 감안하면 【3T】 악세서리나 드레스까지는 만들 수 있을 터.
아. 그러고 보니.
“드레스형 경갑주도 만들도록 하지. 원하는 디자인이 있나?”
“후후. 네 색으로 물들여 주는 것 아니었나?”
“알겠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하도록 하지.”
오래간만에 ‘크리에이터’의 피가 끓어오르는구나.
이 세계의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전방형 재주특화 제작계 캐릭터’
즉.
만드는 것만을 자신의 긍지 삼아 살아가야 하는 입장.
“조금만 기다려라. 이 세상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일품으로 무장시켜주마.”
“···후후. 이것 참. 밖으로 나갈 때 미련은 다 놓고 나갔다고 생각 했는데 말이야···.”
“뭐라 했나?”
“아니. 지금이라도 ···네 색으로 전부 물드는 것을 기대하고 있겠다. 라고 했다.”
얼핏 들은 거랑 완전히 다른 내용인데?
그렇다 한들 저렇게 부드럽게 웃는 실피아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그것보다, 하나라도 더 좋은 장비를 만드는 것에 집중할 시간이다.
***
아무리 지쳐 죽을 거 같아도, 쉴 수는 없다.
재빠르게 벨트를 만들었다. 당연히 【3T】의 벨트가 나왔다.
자동으로 포션을 20개까지 수납할 수 있으며, 착용자가 최대 체력의 10% 이상의 데미지를 입었을 때 자동으로 포션병이 깨지면서 사용 할 수 있는 【이머전시】 기능이 부가되었다.
그 외에도 검을 두 자루 수납할 수 있는데 【인비지블리티 세트】의 기능이 붙어 있어, 한 자루는 벨트가 생성한 【보관함】에 보관하여 겉으로는 한 자루만 보이게 하면서 언제든 스왑이 가능한 일품이다.
그 외에도 착용자의 체력 마력을 회복시켜주는 자잘한 기능도 붙어 있다.
“울프람. 그 정도만 붙어 있어도 세간에서는 명품중의 명품이라 칭송 받는다. 그걸 자잘한 기능이라니···.”
“내 파티원이라면, 그 정도는 자잘한 기능이라 생각하도록.”
“음···. 그것도 그런가···.”
그 다음은 드레스.
그녀의 은발에 어울리는 순백의 드레스 아머.
“으음 이 철판 부분만 떼면 그대로 무도회에 나가도 될 정도의 드레스다만 ···전장에서 입기에는 너무 팔랑거리지 않는가?”
“그건 이렇게 조정하면 ···전투 상태로 하여 드레스가 살짝 짧아지게 된다. 거기에 ···금속 판형 부분은 탄력이 있는 금속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신하지.”
“그렇게 다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갑주를 어떻게 입고 다니라는 말이지? 거기에, 부드러운 금속이라니···. 대체 정체가 뭐지?”
“드래곤의 비늘이다.”
“푸흡!?”
“정확히는 드래곤의 비늘을 가공할 수 있는 실력을 얻었기에, 다른 금속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꽤 얻은 덕분에 이렇게 가루를 내어 혼합하는 것만으로도, 금속은 압도적인 내구성과 탄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 길이 쪽도··· 최근에 네프티의 갑주에서 발상을 얻어서, 얼마든지 길이를 조절할 수 있으니, 네가 입어보고 적당히 맞춰 보도록.”
“아, 알겠다. 으음 정말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결국 실피아는 내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그 길이를 조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백의 드레스라기보다는 백색의 미니스커트에 가깝고, 대신 검은 스타킹의 느낌을 주는 변형 금속제 양말과 그리브 부츠라는 ···게임에서 나올 법 한 캐릭터의 모습 그 자체.
아.
이 세계는 사실 게임이었지.
“고맙다 울프람. 이게 네 취향이구나. 그렇군. 순백의 스커트. 그리고 스커트와 스타킹 사이의 맨 살 부분. 그리브 부츠 ···남성의 취향이란 참으로 심오하구나···.”
실피아가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빙 돌기도 하면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는 내 손을 잡았다.
무슨 소리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무기를 맞추러 가야지.”
“어디로 가는 거지?”
그야 어디겠어.
칼 맞추러 가야지.
***
실피아를 끌고 간 것은 대장장이 바닐라가 운영하는 공방이 아니라 첫 번째 마계의 문 옆 환금의 성역.
“여기는···?”
“위대하신 선조님이 남겨놓은 숙제. 마계팔문의 첫 번째 문을 깨고 나온 보상이다.”
“잠깐. 아무렇지 않게 말 하는데 지금 무슨 말을 입에 담았는지 알고 있나?!”
그럼 모르겠니.
“중요한 것은 큰 스케일에 하나하나 놀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를 얻었으며, 이를 활용할 방안이 있고, 그렇다면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 하나다. 그리 놀랄 시간이 있으면 정신을 진정시키고 따라 들어와라.”
“으, 으으···. 알겠다.”
실피아는 내 옷깃을 따라잡고 성역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투기장 무대를 지나쳐 환금창을 향했다.
【어서 오세요. 울프람 폰 로엔그린님. 오늘도 한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생각은 없다. 그보다 상점을 열고 싶다. 가능한가?”
【이미 한계를 (1)회 클리어 하셨기에 (1)회 가능하십니다. 어떤 상점을 여시겠습니까?】
“무기 상점. 그것도 세검류를 보고 싶다.”
【주의. 상점 오픈 횟수가 (1)회 남았습니다. 사용 시 다음 상점 해방은 또 한계에 도전하셔야 가능하십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
거기까지 말하자. 시스템은 촤악! 하고 수 백 자루의 세검을 허공에 띄웠다.
“힉!?”
“그리 놀라지 말고, 잘 살펴봐라. 여기서 두 자루. 네 검이 될 물건을 고르도록.”
“하, 하하···. 그렇구나. 그래. 내 무기가 될 검 말이지. 응. 놀라지 말고, 이용하라고 했으니 알겠다. 고르도록 하지. ···아 울프람. 이 세검은 뭐지?”
실피아는 손을 살짝 내밀어 한 자루의 세검을 가리켰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 검의 이름은 【극빙의 자검 – 브랑시에】”
“엄청난 이름이구나. 신화에서 나올 법 한 이름이다.”
“실제 신화의 군대에서 쓰였던 검이다. 당대 ‘마이스터 가문’의 장녀가 썼던 세검이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진 못 했지만 말이다. 그 덕분에 좀 싸다. 그걸로 하겠나?”
“아무리, 어떻게 들어도, 보통 칼이 아닌데!?”
실피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봤다.
“단언하지. 여기에 보통 칼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아···?”
“이건 의지를 가져 검로를 수정해주는 【에고 소드 – 샤르티에】. 저쪽은 칠십 이 마검 중 하나 내지름과 회수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연환 세검 【우로보로스】 위대하신 선조님께서 쓰셨던 【절영검 – 인빈시블 망고슈】도 있지.”
고작 1문의 상점이지만, 해방되는 물건들 중 그럭저럭 쓸모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안에서 브랑시에는 명검 중 하나다.
“아무튼, 두 자루 해서 1억 린 내에서 맞춘다고 생각하면 브랑시에는 좋은 선택 ···왜그러지?”
실피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드레스를 보고, 벨트를 보고, 그리고 검을 보고, 자상하게 웃으며 입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며 팔찌를 내밀었다.
“선금은 이걸로 내겠습니다.”
“······.”
“십 년 할부로 부탁드릴게요. 이자는 저렴하게 부탁드릴게요···.”
아니 잠깐.
돈을 받을 생각도 없지만, 그것보다 궁금한 게.
“로열 가드의 초봉은 높은 편 아닌가?”
“주인이 검소하게 지내는데 내가 낭비를 어떻게 하겠나. 월 300만 린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걸로 생활이 되나?”
“······그래서 할부를 요청하지 않았나. 나도 매 달 할부를 갚는 데에···.”
실피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그렇게 할부를 요청하는 방식이 깔끔했구나.
친구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느끼며,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른이 되는걸 보고 싶진 않았다만.”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다! 밖으로 나가니까 숨 쉬는 것 빼곤 다 돈이 든단 말이다!”
실피아의 진심을 담은 오열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