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498)
497. 신화의 첫 페이지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는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는 얼음 정령족의 간부 후보이자 나의 친구인 릴리아 스노우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에는 질량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착각이 든다.
그 무게감에서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
‘역시···. 하르크의 후예답게 현명하군요. 실로 놀랍습니다.’
웃음을 참고 있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아니 대본은 니들이 짜놓고 왜 나만 돌리는데
이거 초월종들의 집단 괴롭힘 아니냐 진짜?
저기 봐 릴리아는 심지어 얼굴도 옆으로 돌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야. 대본대로 해라 진짜.
나도 죽을 거 같으니까.
【나의 뜻을 존중해주어 고맙다. 얼음 여왕.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 그렇다면 우리와 너희는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 생각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저희에게 소중한 것을 떠올리게 해준 당신의 긍지를 존중해. 저희는 당신을 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떠올리게 했다?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삼백년 전. 하르크와 함께 싸웠던 시기의 추억. 저희는 그 전장에서 대륙 전체를 지키고, 나아가 차원 전체를 지키겠다 맹세했습니다. 그렇다면 구분은 될지언정 차별은 없어야 하였는데, 어느새 그 초심조차 잊어버렸군요.’
음.
이 말은 사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다.
차원을 지킨 것 자체는 하르크가 없었으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고, 즉 인간은 그만큼 다른 종족보다 대우 받아야 한다.
물론 그것이 인간이 우월하다며 다른 종족을 핍박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월한 건 인간보다 타 종족이 더 우월하다. 그냥 하르크 개인이 잘난거지.
그럼에도 인간은 존중받아 마땅하고, 최소한 적대받아서는 안 된다.
허나 그걸 떠나서.
나는 라이아를 빤히 바라봤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은 짜여 있는 각본이라고는 하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을 차별한 것에 대한 사죄도.
거기에···. 나에 대한 감사도 다 진심이다.
방금 전까지는 웃음을 터트릴 뻔 한 녀석이 말이야.
【알겠다. 그대의 호의에 감사하지. 장담컨데 우리도 그대와 그대의 가신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래. 이 영토는 그대의 것. 오래된 관습 자체를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 말에 등 뒤의 학생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여기서는, 루디카가 메모지에 썼던 계략대로 간다.
【나는 아무래도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영토전에도 참가하고 했으니 말이다.】
【원정을 나가는 것 자체가 그 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런데 이번 원정에서 포영의 설원을 지배했다간, 라이아 여왕의 표정이 좋지는 않을 듯 하구나.】
【그러니 우선 완전하게 못 박거라 얼음 여왕의 영토는 존중해주겠다. 하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되겠지.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건 어떻겠나?】
‘하크르의 후예 울프람. 더 할 말이 있나요?’
【나는 평화를 노래하고 싶다. 그리고 공존을 이야기하고 싶다.】
‘무슨 의미죠?’
【대신 우리 중앙구와 그대들의 북부는 좋은 교류를 나눌 수 있지 않겠나. 예를 들면 여름의 더위를 풀 수 있는 얼음을 그대들이 제공해주는 대신, 우리는 마력석을 구입해 그대들에게 제공한다. 좋은 거래라 할 수 있지.】
‘그건···. 실로 즐거운 이야기네요. 조금 자그마하고 귀엽긴 하지만요.’
라이아 다이아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장차 나아가 얼음의 정령들이 제프린에서 얼음 마법을 강의하고, 인간들은 북부에 건설할 수도 있겠지. 진정으로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지 않겠나.】
‘그건···.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전혀 꿈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목표점이지.】
‘아···.’
이제 대본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흑수정의 계단이 만들어지고, 내 바로 옆에 파티원들이 정렬한다.
레지나. 밀푀유. 루디카가 뒤따르고, 내 바로 옆에는 아일라 트라이스타와 네프티가 섰다.
‘그 아이들은?’
【내가 누구보다 신뢰하는 아이들이다. 이 자리에는 이,브 가 없긴 하다,만···.】
‘그건 아쉽네요. 하나하나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 시절에도 보기 드물 정도의 인재들이군요. 후후. 그때가 떠오르네요. 하르크 옆에도 인재들만이 모였죠.’
【그런가. 그 분께 감히 비견될 정도라니···. 허나 나는 모르겠으나 내 주위 녀석들은 그런 평가를 들을 자격이 있다.】
‘어머나···. 모르고 있나 보군요. 원래 별빛이란, 가장 빛나는 이를 중심으로 모인답니다.’
이윽고 펼쳐진 풍경은, 모두의 눈을 사로잡아 마음을 빼앗기에 차고 넘쳤다.
“하늘이···.”
“아······.”
방금 전까지 푸르던 포영의 설원이 보랏빛 밤하늘로 물들어, 하늘 위에는 일곱의 별이 떠올랐다.
그 숫자는 실로 신묘하여 마치 나. 아일라. 네프티. 루디카. 밀푀유. 레지나. 이브를 뜻하였고, 그 별에서부터 내려온 칠색의 오로라는 마치 비단결처럼 라이아의 몸을 감쌌다.
이내 비단은 빛으로 변해, 그녀의 육신은 점점 작아졌고, 지상에 내려온 나와 마주할 정도의 크기까지 줄었다.
“그것이 네 본 모습인가?”
“예에. 울프람 폰 로엔그린.”
얼음과 눈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긴 장발이. 살짝 감은 눈이. 순백의 드레스가. 그리고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마지막으로, 거짓이 아니라 진실된 목소리가.
“지금부터 우리는 파트너라고 해도 되겠지?”
“이 곳에 기거하는 종으로서는 파트너가 되겠죠. 그러나 저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군요.”
얼음 여왕 라이아는 내게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고 웃었다.
“아무렴. 그렇게 될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다.”
***
그 뒤. 우리는 얼음여왕의 성채에 초대받아 간단한 연회를 즐겼다.
그녀의 종족은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추가 식량의 준비는 필요 없었다.
그리고 우리. 정확히 말하면 우리 파티와 라이아. 그리고 릴리아는 상호 공존에 관한 회의를 하겠다며 여왕의 홀에 모였고.
그리고.
“푸흐···. 하. 아하. 아하하하핫!”
“아일라 트라이스타. 품위 없게 뭐 하는 건가요.”
“하지마안···. 레지나 시엘라. 이게 안 웃겨요? 이게?”
“후흣···. 아, 으흠. 저는 웃지 않았답니다?”
“아하하, 아하하하핫!”
의자에 앉아 배를 잡고 웃는 아일라와, 고상하게 들어 올린 티 컵을 덜덜 떨며 웃음을 참는 레지나.
그 외에도 가볍게 웃어버린 네프티를 포함해 파티원 전원. 그리고 심지어 라이아와 릴리아까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기나?”
“그럼요. 안 웃기겠어요? 평화와 공존을 노래합시다···. 라뇨. 아하, 아하하핫!”
그래. 계속 웃으려무나.
“하지만 뭐. 마냥 쓸모없는 일은 아니죠. 울프람? 우리 일족과 인간은 정말로 공존하는 편이 좋을 거 같긴 해요.”
“나도 동의한다.”
“연극이 아니라, 진짜 공존이라고요?”
배를 잡고 웃던 아일라는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지난 번 마계의 문 공략으로 인해 라이아도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거주구 정도는 돌아다닐 수 있지 않겠나.”
“예에.”
“하지만, 포영의 설원이 아니면 몸이 녹아버리시는 것 아닌가요?”
“어머. 누가 그러던가요?”
“아, 아뇨. 그런 적은 없는데···.”
밀푀유의 물음에 라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면 릴리아도 맨몸으로 편의점을 향했는데, 제가 고작 그 정도로 녹아버릴리가 없지 않겠어요?”
“아, 죄. 죄송합니다.”
밀푀유는 꾸벅 고개를 숙였고, 라이아는 자상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정말로 공존하는쪽이 편하긴 하지. 역시. 대업 때문인가?”
“예에. 제가 인간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반대로 그 망할 불쟁이 계집을 적대하지 않겠어요? 언젠가 있을 최종전에서 끝장을 보려면 인간의 도움도 필요하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중간한 동맹으로 인간의 인식이 그리 바뀔지는 또 모르겠군.”
“어머. 울프람.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있답니다.”
라이아는 슥, 오른 손을 내밀어 내 왼쪽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읏. 하고 주변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려온다.
걱정하지 마라. 설마 얘가 나를 죽이기야 하겠니.
“뭐지. 그 방법이?”
“제가 당신의 정령이 되면 되는 일이죠. 그렇다면 세간에 공표하기도 쉽지 않겠어요?”
“정령이 된다는 것은···. 내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만?”
“어머. 나의 동지 울프람. 거역해야만 할 명령을 내릴 건가요?”
“그럴 일은 없다. 다만···. 네 자존심은 그런 일을 허락하나?”
“후후. 글쎄요?”
라이아는 싱긋 웃고는 손을 거둬들였다.
주변 녀석들의 안색이 창백한 것이, 아무래도 진짜 나에게 위협을 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보다.
“일단 그 안은 보류하도록 하지.”“예에. 지금은 그저 서면 수준의 교류로 충분하겠죠. 지금은 말이죠.”
“다른 녀석들이 기다릴지도 모르겠군. 슬슬 협의는 이 정도로 하고 돌아가도록 할까.”
“네! 가죠!”
“예! 선배님. 바로 움직여요!”
“음? 그렇게나 돌아가고 싶었던 건가.”
다른 녀석들이 활기차게 귀가를 권유하기 시작했고,
“후훗. 네 슬슬 돌아가죠. 지금 쯤이면 작업도 전부 끝났겠네요.”
“작업?”
라이아는 영문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학생들은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닐까.
‘그렇구나. 인간에게는 그런 문화가 있군요?’
“네, 네에···.”
외형만큼은 어떤 아이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얼음의 정수로 만든 요정들이 물을 따라주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인간형만 있는것이 아니다. 저기서는 눈토끼와 사슴이 말을 걸어오고, 회답해주는 학생들도 있다.
역사서에만 등장하는 얼음 여왕의 성채에서 요정들과 같이 담화를 나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신이 마치 신화 속 한 장면의 주역이 된 듯한 착각.
허나 그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피로 피를 씻고,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이 원정에서, 위대한 결단을 내린 두 수장 덕분에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이런 원정도 있을 수 있구나.”
바로 옆에 있던 학생이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평화와 공존을 노래하는 원정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처음 보여 준 것이다.
울프람 폰 로엔그린.
한 때 이 제프린을 손아귀에 넣고 쥐고 흔들려 했던 악당.
최근에는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를 총대장으로 임명해 원정을 나서겠다는 공문이 내려 온 순간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허나 이 결과를 보라.
그 남자 홀로 쌓아 올린 이 결과를 보라.
“그렇다면···. 혹시 그 분께서 악당처럼 굴었던 것도 이유가 있어서 아닐까?”
“응?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아니. 생각해 봐. 그 얼음여왕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 님께서 가장 빛나는 별이라고 하셨잖아.”
“그야···. 그렇지.”
“그 자리에 모인 분들 봤어? 흑수정. 마도상인. 심연의단검. 신념의기사. 패황···. 그 안에서도 울프람 님께서 가장 빛났다고 말씀하신거라고, 혹시 얼음여왕님의 안목을 못 믿는거야? 그 분께서는 삼백년 전 하르크 님과 함께 싸우신 분이잖아?”
“그러니까···. 울프람 님께서 일부러 악역을 자처하셨다고? 어째서?”
“내 예상인데···. 이브 님께 찬탈당한 게 아니라 일부러 선위하신 거 아닐까?”
“아, 그렇다면···.”
“두 분께서 처음부터 합심하시고, 이 제프린을 바꿔나가려고 하신거지. 결과적으로 기사학부와 마법학부의 힘을 빼놓고 학생회 중심으로 재편됐잖아?”
“그, 그렇구나···.”
달변가인 학생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가슴께에 붙어 있는 배지는, 학생회 임원. 그것도 꽤 상급 임원의 것.
역시. 저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논리적으로 세상을 볼 줄 알게 되는건가.
그리고 울프람에 대한 칭찬을 끝없이 늘어놓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이야기에 집중하는 학생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이 홀을 둘러봤을 때, 그런 식의 소문을 흘리는 학생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도.
그 근원이 전원 학생회 임원 뱃지를 차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갑작스레 대화가 끊겼음에도, 얼음의 정령들은 그저 웃으며 이 작업을 바라만 보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작업’의 끝.
저 여왕의 홀에서 영웅이 돌아왔다.
“그대들의 지원과 신뢰가 있어, 나 또한 스스로의 의견을 피력함에 두려움이 없었다. 자부해도 좋다.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은 새로운 신화의 첫 장에 이름을 적어 넣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웅들이다.”
자신의 공이 가장 위대함에도, 공을 모두에게 돌리는 그 겸허함.
실로 영웅적 그 풍모에 천이백 명의 원정대는 그저 깊게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