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588)
587. 만년대대 요정왕국
그렇게 실피아의 자취방을 나와 엠펠리움을 걸었다.
사실 무작정 여관을 구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는 내 외모가 정말 눈에 띈다는 것.
황실 혈통이 아무리 인간을 인간취급 안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인 것은 맞기에 이 외모는 눈에 안 띌래야 그럴 수가 없다.
이 금발과 청안은 황실의 상징이며, 오직 황실 혈통만이 이 색을 띌 수 있다.
비슷한 색은 나올 수 있어도 결코 같은 색은 나올 수 없다.
즉. 이 색을 한 놈은 지옥에서 올라온 황실 사칭범이거나, 아니면 진짜 미쳐서 호위 없이 얼굴 까놓고 10번 성벽에서 돌아다니는 또라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내 이 얼굴을···. 정확히는 머리카락과 눈 색을 보고 여관주인이 ‘황실 사칭범이 있어요!’ 하고 신고하면 그 자리에서 위병대가 올 것이고, 거기서 ‘하 나의 정체는 울프람 폰 로엔그린. 감히 나를 황실 사칭범이라 하여 잡아가려 하느냐!’ 하고 폼을 잡아서 위병대를 물리친다고 치자.
좋아. 여기까지는 아주 댓츠올라잇이야. 황손을 몰라보는 위병대장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박겠지.
그럼 그 다음은?
이제 거기서부터 골때리기 시작하는 거지.
나는 수도 모든 제국민의 시선을 끌며 바로 황성으로 로켓배송.
울프람이 글쎄 한밤중에 10번 성벽 거주구에서 같은 소문이 돌고, 마침 그 근처에 실피아를 배치해놨던 이브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그러면 이브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는 숙소를 구하지 않고 일부러 떠났다.
다른 것보다.
【주변에서 불꽃의 정령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낙오된 불의 정령종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것 참. 상상도 못했군 그래.”
나를 부르는 이 기묘한 기운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분명 이 앞에는 내가 모르는 설정과,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걸 위해서라면, 하룻밤 정도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성벽 외곽쪽으로 발을 옮겼다.
11번을 지나 13번까지.
이 엠펠리움의 어둠을 향해 걸어갔다.
***
당연하지만, 이 세계는 유통도 쓰레기고 재료도 쓰레기고 위생관념도 쓰레기고···. 아무튼 죄다 쓰레기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유통의 허브라 부를만한 제프린마저 겨우겨우 소규모 유통망으로 각지의 특산물을 ‘수입’할 뿐이다.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한데 제프린의 포털은 기본적으로 효율이 쓰레기다 마동석을 쳐먹는 괴물이라 포털을 늘리거나 교역로로 쓰기에는 문제가 있다.
뭐, 요약하자면 당연히 수도 변두리에도 슬럼은 있고, 중간계를 구했다고 하나 세상은 동화처럼 행복하게 끝맺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물론, 내 열차와 편의점 사업이 궤도에 오른다고 해도 모든 가난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차 하나로 가난이 사라질거면 비행기가 있는 현대는 모두가 풍족했어야지.
그래서 이렇게 슬럼가를 돌아다니면···.
“······.”
“그으···.”
인간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피골이 상접한 좀비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런 인간들의 시선을 느낀다.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삿된 적의를 받습니다.】
【황실 혈통은 급이 낮은 피의 적대감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오토카운터가 발동합니다.】
이것 참.
오토카운터가 켜질 정도로 내가 미운가보군.
【시선이 불쾌하구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드나.】
녀석들이 황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는 다시 제 갈길을 걸어갔다.
“······.”
알고 있다.
이 녀석들 중에는 인생 역경을 이겨내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진 녀석이 있는가 하면, 죄를 지어 떨어진 녀석도 있겠지.
불가항력인 인간도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내가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인벤토리를 털어봐야 그게 순수한 호의로 다가갈지, 아니면 나를 더 뜯어먹으려고 할지 모르는 일이다.
더더군다나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슬럼가의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동정심이 든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꿔야지라는 선의에 눈뜬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런 곳에도 참치 마요 폐기를 나눠줄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진다면, 꽤 즐겁지 않을까.
동정이나 연민, 선의나 기부가 아니라.
야심이 조금 피어올랐다.
***
그렇게 13성벽을 넘어, 슬럼가를 지나 엠펠리움 밖으로 나오자 나를 부르는 정령의 기운이 조금씩 더 거세졌다.
엠펠리움 밖은 나에게 있어 완전한 ‘미지’다.
원작 기준으로 행동 반경은 제프린 전역과 엠펠리움 제1성. 즉 황궁 안을 DLC로 조금 공개한 거지, 여기는 진짜 완전히 모르는 장소다.
그렇게 치면 동부나 서부. 남부도 똑같지만···. 거기는 그냥 필드였고 여기는 대놓고 나를 부르는 녀석들이 있다.
성벽을 나와 숲으로 넘어가자. 나무 사이사이에서 이쪽을 힐끔 보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호오. 꾀어내는 건가.”
불꽃을 담은 기운은 나를 불러내고 있었다. 좀 더 이쪽으로, 따라오도록. 하고 말이다.
그 기운의 인도가 마치···. 그래 제프린에 던져놓고 온 파트라슈를 떠오르게 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나타난 곳은 조금 큰 공터였다. 숲에 난 땜빵이라고 해야 할까. 기묘하고 이질적인 곳이다.
주변 모든 풀이 말라비틀어지고, 땅은 쩍쩍 갈라졌다. 여름밤이기는 하나 이를 뛰어넘는 열기가 볼을 스친다.
누가 봐도 여기에는 ‘불꽃 속성의 무언가가 있어요!’ 하고 소문내는 모양새다.
허나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공터 중앙에 서있는 석판에는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양손에 검을 든 전사와, 그 옆을 날아다니는 요정.
누가 봐도 하르크와 엘피라네.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전사와 요정 앞에서 포효하고 있는 붉은 늑대.
그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없다.
엘피라네의 영원한 보모. 집지키는 빨간 늑대.
파트라슈였다.
“이상하군. 선조님과 엘피라네까지는 이해하는데, 어째서 녀석의 그림이 여기에 있지?”
비석의 그림을 확인하기 위해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간 그 때.
화르륵.
불꽃이 대기를 가르고 형상을 맺어 내 주위에 포진했다.
허공에 뭉쳐 존재로 빚어진 불꽃은 여덟.
즉 비석을 중심으로 여덟이 나를 포위하듯 자리잡았다.
파트라슈와 어딘가 비슷한 붉은 늑대가 여덟 마리.
“호오. 단순한 잡견은 아닌가보구나.”
저마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내뿜으며 이쪽을 노려본다.
저쪽에서 적대하지 않으면 대화가 통할 거라 생각했지만, 공세로 나선다면 이쪽도 당해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열기를 끔찍하게 증오하는 동지가 걸어준 가호가 이 정도의 잔불은 바로 꺼주거든.
【얼음 여왕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의 유일한 벗. 맹우 울프람 폰 로엔그린을 수호합니다.】
【얼음 여왕의 친애가 담긴 가호가 발동됩니다.】
그르르르르···.
얼음여왕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의 얼음이 늑대 바로 앞까지 몰아친다. 불꽃은 냉기로 바뀌어 주변을 얼어붙였다. 열사의 대지는 극한의 동토로 바뀐다.
놈들과는 상극. 라이아가 아무리 그랑펠리시에 앞에서는 쳐맞고 다닌다고 해도, 이 정도 강아지들에게 어떻게 될 녀석은 아니다.
그리고 손에는 검은 단검을 쥐고 허공을 그었다.
나를 견제하던 기운이 공중에서 ‘통째로 지워지자’ 놈들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 이제 너희들의 이점은 전부 사라졌다. 다음번에는 어떤 재주를 보여 줄 거지?”
【자, 잠시. 대화. 대화를 나누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서로 달려들기 직전. 저쪽에서 먼저 협상을 제의했다.
“먼저 공격받지 않았다면 대화 또한 나쁘지 않았겠지.”
【아, 그, 그게 피차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을 보여주면 생기는 오해라. 그것 참 편리한 변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아닙니다. 진짜. 진짜 오해가 있습니다!】
“너희들의 가죽을 가져다 귀족가에 전시하면 나도 그 오해가 풀릴 듯하군.”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정말 적랑왕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막상 마주해보니 인간 분이라 그랬습니다!】
“······.”
적랑왕?
“적랑왕이라는게 누구지?”
【혹시 모르십니까? 이 석판에 그려져 있는···. 요정 여왕님을 보좌하시는 모든 불꽃의 정수를 담고 계신 분입니다.】
“······.”
알겠냐고.
【죄송합니다. 그것이 인간분의 몸에서 적랑 님의 기운이 느껴지기에, 혹여나 그분의 신체로 무구를 빚어 패용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여.】
그리 말하며 가장 몸집이 큰 늑대가 몸을 낮추자 다른 녀석들도 함께 꼬리를 말았다.
적랑왕.
적랑왕···.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그, 혹시 우리집에서 배긁고 낮잠자는 빨간 늑대놈을 말하는 건가?
에이 설마.
***
이후. 비석 앞에 대충 앉아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적랑왕이라는 것이···. 요정 여왕 엘피라네를 보좌하는 그 붉은 늑대가 맞다는 건가?”
【예. 예에. 알고 계시는군요. 호, 혹시 그분의 거취도 알고 계십니까?】
“그 전에 너희들이 누구인지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겠구나. 엘피라네나 파트라···. 적랑왕의 거취는 민감한 사안이니 말이다.”
【아, 하지만 저희의 정체를 알려드리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대장격인 놈이 머뭇거리자 다른 녀석들도 꼬리를 살짝 말았다.
이럴 때는 툭 까놓고 이야기하는 게 답이겠지.
“나는 울프람 폰 로엔그린. 저 석판에 그려져 있는 전사의 후예다. 이 정도면 믿을 수 있겠나.”
【아, 아아! 그렇군요. 그 기세. 확실히 전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용맹한 전사왕의 후예···. 그렇다면 믿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적영이라 불리는 요정입니다.】
“적영.”
역시나 들어본 적 없다.
원작에서도 아예 들어본 적 없는 설정이다.
즉 완전히 새로운 이벤트.
“그래서 적영···. 이라고 했나. 너희들은 어째서 여기에 있고, 무엇을 원하여 나를 불렀지?”
【그것이···. 말하면 길어집니다. 그것도 전사왕의 후손님께는 조금···. 아니. 알겠습니다. 이 또한 인연이겠지요.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적영은 눈을 질끈 감고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희들은 언젠가 다가올 날을 위해 이 변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특수조였습니다.】
“특수조? 무엇을 위한 특수조지.”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 있습니다만】
“짧게 하도록.”
【네. 저희의 여왕님. 즉 엘피라네 님께서는 전사왕님과의 칠주야간 혈투 끝에 그분의 대업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아.
마지막까지 하르크랑 엘피라네랑 죽을만큼 싸워서 결국 엘피라네가 쳐맞고 제프린에 갇혔다는 이야기 말인가.
“그래. 그 이야기는 알고 있다. 그래서?”
【하지만 엘피라네 님께서는 언젠가 그 대업이 끝나 풀려 나오면 우리들은 인간들과 대등해 지거나 그 이상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단명하고 나약하니 전사왕만 없으면 곧 우리들의 시대라고 말입니다.】
···.
······.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렇군. 그래서?”
【하여. 그 대업이 끝나 엘피라네 님께서 자유의 몸이 되셨을 때. 이 인간들의 왕국 바로 옆에 저희들의 터전을 지어, 저희들의 만년왕국을 건설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저희들은 그 때를 대비해 힘을 비축하고 있는 특수조로서, 인간들에게 정령의 강인함을 새겨 스스로의 자치권과 자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무력조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하지만···. 그 뒤로 수백 년간 두 분께서는 그 인공섬에서 나오지 않으시고, 저희들은 몇백 년이나 힘을 비축했습니다만, 이 긴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몰라 두려움에 몸서리 치고 있는 가운데, 그분의 휘하이자 저희를 몰래 빼내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적랑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인간분이 계셔서 이렇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리 말하고 놈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 녀석들은···. 엘피라네가 풀려나면 이 대륙을 정벌하기 위한 무력조. 그런 거 아닌가?
“······.”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쿠테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