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644)
643.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처럼
사람 구하는 일이란 이렇게나 기분이 좋다니.
물론 멋대로 구해놓고 나머지 뒷수습은 이브에게 맡긴다. 이게 구제하고 튄다는 구제튀인가 하는 건가, 원작 기준으로 켈터스가 하도 그런 일을 많이해서 ‘이 자식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그냥 불쌍한 사람만 보면 구하고 싶은 건가’ 싶었지만 실제로 해보니 이만큼 재미있는 일도 얼마 없다.
허나, 이브가 시에스타를 통해 멋대로 구해버린 결과, 생각보다 내가 구할 수 있는 인물은 몇 남지 않았다.
더러운 이브 폰 로엔그린, 그 치덕치덕 붙은 뱃살만큼 욕심도 과하구나! 언젠가 크게 경을 치리라!
아무튼.
이브에게 살계를 여는 것은 조금 나중 일로 미뤄두고, 좀 더 근본적으로 접근하자.
나는 사람을 구하기보다는 원래 서브퀘스트를 해결하려고 했으며, 지금 열려 있는 서브 퀘스트 중 맛있고 할만한 것 들 부터 추려보자고.
그리 생각하며 로드맵을 편의점에서 적어나가는 도중.
휘잉.
북풍한설이 문 근처에서 불어왔다.
이것 참. 보통은 영역을 잘 안 떠나는 녀석인데 무슨 일이지.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
“나의 동지 울프람. 오래간만입니다.”
그리 오래간만은 아닌 것 같은데.
고작 사흘 전에 성에서 다른 요정들을 소개시켜주고 새벽까지 겨울하늘을 날았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렇군. 격조했다. 라이아. 하여 무슨 일이지?”
“상담이 있어 왔습니다.”
“상담이라. 알겠다. 나의 동지가 그것을 바란다면, 그저 전력으로 응할 뿐이다.”
“감사합니다.”
라이아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배려 차원에서 태초의 사파이어를 거치했다.
거치했다 해도 마법적 기능이 있는게 아니라 그냥 사파이어가 고정될만한 거치대를 만들어 위에 올려놨을 뿐이다.
라이아는 눈을 깜빡이며 사파이어를 바라봤다.
“가지고 싶은 것인가?”
“아뇨. 저것을 얻기에는 저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뭐, 명색이 ‘세계가 시작될 때 태어난 보석’이니까. 고작 몇백년을 살아온 라이아가 탐하기에는 부족하긴 하지.
홍염여제 그랑펠리시에라면 또 모르겠다. 그 녀석은 원체 욕심이 많아서 말이야.
아무튼.
“나의 동지. 라이아. 고민을 듣도록 하지. 얼마든지 말해보도록.”
대단한 건 아닐거다.
아마도 최근 인간들과 교류가 많아졌는데 서로간의 가치관 차이나 그런 것이겠지.
실제 얼음 정령족의 친밀도가 올라가서 그들을 해방시키면 흔히 나오는 퀘스트다 【차갑지 않은 심장】이나 【공존 그리고 미래】같은 이름의 서브 퀘스트들이었지.
“곧 그랑펠리시에를 죽여버릴 것 같습니다.”
······.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네···.”
생각보다 더럽게 하드하네.
***
라이아의 말은 이랬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너무나 많았고, 그걸 심심할 때 마다 아케아 화산에 가서 풀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금만 짜증나면 가고 화나면 가고 배고프면 가고 심심하면 갔다.
그랑펠리시에의 활동 종착점 사거리 밖에서 멋대로 얼음창을 쏴대는 삶이라니. 아 복수! 밥보다 좋다!
더군다나 그랑펠리시에의 반응이 어디 보통이겠는가 죽일거야! 용서못해! 감히 나한테! 하면서 망할 꼬맹이 포텐셜을 최대한 뽑아냈을 것이다.
허나 라이아는 그 고통 섞인 비명마저 즐기며 얼음창을 쐈다. 둘의 관계는 상극. 이는 마력과 존재 자체가 상극이라는 의미. 그랑펠리시에가 보통 고생이었겠나.
그리고 그 결과 얼마 전 그랑펠리시에가 무너졌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만둬주세요. 하지말아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쏘지 말아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믿을 수 없지만, 라이아의 말에 따르면 그랑펠리시에는 완전히 망가졌다고 한다.
“그거 알고 있나요? 우리들 정령족은 ‘자아’를 가짐으로서 처음으로 ‘존재’로서 성립합니다.”
알고 있다.
원래는 대기중의 원소에 지나지 않던 애들이 마력과 합쳐서 방향성을 가진다. 라고 했던가.
거기서 ‘자아’를 가지고 ‘소통’을 하려는 녀석들만 정령으로 성장한다.
“자아는 표현을, 표현은 언어를, 언어는 영혼을 만들어내죠. 그렇기에 자아가 붕괴한 정령은···.”
“다시 원소로 되돌아가지.”
“네. 사실 저는 그랑펠리시에가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울프람은 그 때 그 불쟁이 계집을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음. 그랬지. 기억해줘서 고맙군.”
그 녀석의 멘탈이 그렇게 쉽게 박살날리가 없는데 싶지만 말이야.
그야.
‘아하하! 이 그랑펠리시에 님에게 이겼다고 생각한 거야? 안타깝게 됐네!’
‘허접. 허접. 개허접. 한 번 내가 봐준 거니까 기어오르지 말라고!’
‘이 그랑펠리시에 님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리가 없잖아?’
원작 기준으로 그랑펠리시에의 도발 후 패배 대사는 총 32종.
인 게임에서는 32종 중에서 랜덤하게 하나만 출력될 뿐. 도발 자체를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라이아와 함께 아케아 화산에 도착했고, 라이아는 빙결창을 장전했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불꽃이 너울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누가 봐도 불의 주인. 그랑펠리시에였지만 어째···.
그 기세가 약하다?
“오, 오늘도 오셨나요. 그, 그만둬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붉은 트윈테일의 작은 체구 꼬마는 한계선 끝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말 그대로 완패 선언.
음. 그렇군.
그런 건가.
“어떻게 할까요. 울프람. 여기서 끝을 장식하는 것도 하나의 멋이라 생각하는데···.”
“아니. 우선은 내가 가보도록 하지.”
“하, 하지만 죽기 직전의 정령은 어떤 폭주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위험합니다. 울프람.”
죽기 직전?
무슨 소리야.
그랑펠리시에 녀석은 아직도 쌩쌩하구만.
***
원작 기준으로 서브 퀘스트 【불꽃 정령왕의 인연(종막)】
12막에서 오픈되는 퀘스트로 그 시작점은 불꽃세력의 호감도를 최대로 올릴 것.
최종막에서 찾아오는 결전의 부담감. 제프린 전체의 위기. 히로인과의 갈등. 그 모든것을 짊어지고 힘들어하는 켈터스에게 그랑펠리시에가 찾아온다.
【허접. 허접. 뭐야. 평소에 그렇게 나보고 존댓말 하라느니 착하게 살라느니 잘난척 해놓고 조금 힘들다고 주저앉는 거야?】
【뭐야···.】
【제대로 대답하라고.】
【······】
【아 진짜.】
사실 여기까지 오면 그랑펠리시에와는 거의 악우에 가깝다. 서로 욕하지만 내버려 둘 수는 없고 장난을 주고받는 친구.
허나 그 혼란한 시기. 켈터스가 가장 힘들 때.
그랑펠리시에는 한쪽 머리끈을 풀어준다.
【자. 받아.】
【뭐라니. 내 머리끈이잖아. 보면 몰라?】
【왜 주냐고?】
【······】
【이건 너만 알고 있어. 내 머리끈은 나의 자아야. 이 양갈래머리는 내 신념이야. 두갈래는 뭔가 강하고 멋지잖아?】
【그러니까, 이걸 하나 준다는 건 그러니까】
【이 대단하고 멋진 그랑펠리시에 님이 힘을 거들어줄테니까, 죽는 얼굴 하지 말라는 거야.】
【뭐? 남자한테는 필요없어? 시끄러워! 받으라고!】
【나도 진짜 힘들고 지칠때가 아니면 안 풀거든? 특별히 너를 생각해서 주는 거야!】
평소의 거침없고 겸사겸사 싸가지도 없는 그랑펠리시에가 아니라.
딱 한 순간, 그럭저럭 귀여운 캐릭터로 변모.
【받아.】
【그리고 다시 일어서.】
【그러지 않으면, 진짜 허접 삼류 쓰레기가 된다구.】
이 장면 뒤로 수많은 범죄자들을 양산하며, 무슨 단이었더라? 아무튼 세상의 빛을 봐서는 안 되는 녀석들을 만들어내는 죄 많은 여자로 등극한다.
스토리 자체는 참 좋았는데, 그랑펠리시에를 위험하게 바라보는 녀석들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떠올리니 또 그립네. 진짜 좋은 스토리였는데. 딱 한 장면만 착해지는 녀석이라니.
아무튼.
이 녀석이 진짜 힘들 때는 양갈래를 푼다는게 공식 설정.
왜 양갈래가 얘한테는 짱갈래고, 그게 강함을 의미하는지는 설정집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지만, 높게 올려 묶은 양갈래는 이 녀석의 자존심이며, 리본은 긍지라고 한다.
아무튼.
지금 이렇게 양갈래가 짱짱하다는 건, 힘들다는 건 거짓말이라는 이야기.
그러면 이야기하기 쉽지.
“그랑펠리시에.”
“뭐야···. 인간···?”
“그렇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 흠. 무슨 일 있었나?”
“······.”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 녀석. 누구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야. 이 녀석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타입이 아니다. 나를 까먹었어도 별 수 없지.
아무튼 내가 이렇게 다가온 것은 지금의 그랑펠리시에는 거짓으로 지쳐있다고는 하나, 그건 양갈래를 풀지 않았다 뿐 어느 정도 약점을 내보인 게 사실이라는 거다.
즉.
잘만 하면 이 녀석의 종장 이벤트 이후의 맵을 해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녀석이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뭐, 떠올리게 하는건 쉽지.
“이걸 보고도 기억하지 못하겠나?”
태초의 루비를 슬쩍 보여주자, 녀석의 눈이 빛난다.
“아, 아아. 떠올랐어. 너, 너어. 맞아 그 허접한 인간!”
“이제야 기억하는군.”
“용서 못해. 네가, 네가 저 망할 얼음계집을 불렀지? 지금 당장 태워줄게. 자! 자아!”
그리 말하며 불꽃을 일으키는 녀석.
과연. 홍염여제라 자칭할 정도는 되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의 불꽃은 지금 충분히 대처가 되거든.
등 뒤에서 라이아가 움직이려는 것을 손으로 제지하고, 검지와 중지 사이. 중지와 약지 사이에 하나씩 보석을 끼웠다.
“아···?”
【태초의 사파이어】로 퍼져나가는 불길의 주변을 막아 길을 유도하고, 【태초의 루비】로 그랑펠리시에의 불을 이끌었다.
순식간에 태초의 사파이어 속 불길이 충전되고 그럼에도 남아나는 불길을 천천히, 신화 포식자가 먹어 치운다.
“뭐, 뭐야. 인간. 그 칼. 뭐야? 어떻게 내 불을 먹는 거야? 자, 잠깐. 잠깐···.”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모습.
이 녀석은 불 원툴이라, 결국 ‘저항’ ‘무효’ ‘흡수’의 3대 속성 엿먹이기를 당하면 숨도 못 쉰다.
하지만 우리도 옛 정이 있지.
내가 가장 힘들 때 옆에서 격려해 준 그 머리끈을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죽이지는 않겠다.”
“힉.”
뭐지. 왜 겁먹지.
오래간만에 그 시절 스토리를 떠올려서 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데 말이야.
“물론 너는 나를 속이려 들었다. 두려운 척 나를 속이려 들었으며, 증오를 내게 내뱉었지.”
“아, 아아···.”
신화포식자는 천천히 그랑펠리시에의 불꽃을 잠식해 나아간다.
불꽃을 방사(放射)하고 싶어도 태초의 사파이어가 강하게 잡고 있는 모양새라 저항도 쉽지 않다.
불꽃의 격을 높이고 싶어도 태초의 루비에 전부 빨려 들어간다.
역시 지쳐있긴 하네.
평소라면 어떤 식으로든 저항했겠지만 말이야.
“너는 지금 약해져있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아, 아냐. 뭐, 뭘 착각하고 있는 거야? 허접한 인간 주제에. 건방져. 허접한···. 히익.”
신화 포식자의 기세가 더더욱 강인해지자 그랑펠리시에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두려워 말도록. 죽일 생각은 없다. 아니 다치게 할 생각도 없다.”
내가 방긋 웃자 녀석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뭘 바라는 거야?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어떻게라.
음. 이래저래 복잡해지니 내가 바라는 것만 얻고 빠질까.
“네 영지에 있는 태초의 성소에 가보고 싶군.”
“아···?”
그랑펠리시에 스토리 종막 이후에 열리는 성소.
그 안에는 정말 쓸모 있는 물건들이 많거든.
뭐. 이건 강제가 아니다.
나는 정규 루트를 거쳐온 게 아니니까, 그냥 부탁일 뿐.
“그래. 그냥 부탁일 뿐이다. 네가 거절해도 상관없다.”
“아, 알겠어.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 칼. 그 칼을 거둬줘. 거둬주세요. 안내할게요.”
오.
뭐야. 이렇게 쉽게 허락해준다고?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라는 마인드였는데 말이야.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 주저앉은 그랑펠리시에를 내버려두고, 등 뒤에서 이쪽을 빤히 보는 라이아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이야기는 전부 들었습니다. 역시나 울프람.”
“음. 그렇지. 진심이 통했다.”
“진심···. 그렇군요. 머뭇거리던 저와 다르게 울프람은 진심으로 저 불쟁이를 끝장 낼 생각이었군요. 역시 그렇게 칼 들고 협박하면 된다는 사실을 하나 배웠습니다.”
무슨 소리지?
나와 그랑펠리시에는 뭐냐, 상호간의 대화와 이해로 풀어갔는데?
“음?”
“후후. 역시. 악랄하고 무자비하지만 저 불쟁이 계집에게는 그 정도의 가르침이 필수겠지요. 역시 나의 동료. 나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