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696)
695. 아이덴티티
학년 수석.
한 번이라면, 혹은 각축장이 펼쳐지는 년도라면 그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다.
하지만 2년 연속으로 한 번도 물러나지 않고 학년 수석을 차지한 이는 그 ‘씨앗’이 다르다 평가되어 모든 귀족들, 심지어 황족까지 눈독 들인다.
매년 입학하는 수만 명의 신입생 중에서, 혼자 개화하여 2년간 홀로 천하를 오시하는 재능의 덩어리.
권력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 봉오리를 손에 넣어 화려하게 개화시켜 천하에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근 2년간 학년 수석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인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를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손을 모아 한 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밀푀유 폰 사브레.
동부에서 양 치고 소 여물을 먹이던 사브레 가문에서, 제프린 입학 턱걸이도 아슬아슬했던 그녀는 황자를 만나고 개화하여 2년간 정점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실기만 1위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울프람 황자는 무구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하니 전설의 아티펙트 한 두개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허나.
밀푀유 폰 사브레는 필기마저 1위에서 내려온 적 없다.
명예를 중시하는 황실이, 감히 초대 황제가 마지막 유산으로 남긴 교육기관에서 시험 용지를 빼돌린다는 부정을 저지를 일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결국 밀푀유는 스스로의 지능이 이 제프린에서 최고로 두각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그 결과 고위 귀족들에게는 질투와 관심을, 평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오래 수석 생활을 하다 보니 궁금하지 않은 정보를 알게 되거나, 혹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러저러한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있는 법.
평범한 소녀 밀푀유 폰 사브레라면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 했겠지만, 울프람과 함께 백년을 걸어갈 각오를 마친 밀푀유라면, 웃으며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정리하고 정립하여 진실로 엮어냈을 것이다.
그 정도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 아이니까.
그리고 밀푀유가 최근 진실로 엮어낸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최근 1학년 후배님들과 자주 만나시네···.”
생각보다, 철저하고 냉정하며 진실에 가까운 분석이었다.
***
학생회 직속 원정대는 새벽부터 바쁘다.
오늘 자체 휴강을 한 녀석들이나, 강의가 아예 없는 녀석들, 혹은 괜찮은 파티가 없나 아침 운동삼아 온 녀석들까지 그럭저럭 북적이고 그럭저럭 시끄럽다.
“동부 숲 레드 크리스탈 1체 파티 앞으로 1인 남았습니다.”
“아, 제가 갈게요!”
“켈터스 군은 고정 파티가 있지 않나요?”
“오늘은 다들 바빠서요.”
“그러면 여기에 서명해주세요.”
“네!”
코튼의 지시에 따라 서명하고 출발하는 켈터스를 보고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고정 파티가 아니라 공개 파티. 즉 공팟이 운영되지 않나.
물론 켈터스를 포함한 몇 명의 숙련자들이 지원으로 가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공팟은 공팟이다.
이건 큰 발전이다. 앞으로 파티 시스템이 더더욱 커지고, 원정이 더더욱 활성화 된다는 이야기.
즉 이 곳은, 게임에서 보던 파티 매칭 시스템이 돌아가는 던전 입구나 흔히들 말하는 파티를 구하려는 술집에 가까워 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을 살짝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동부 숲 크리스탈 사냥 없음. 오후 3시까지 원정 파티 전열 한 명!”
“제가 가겠습니다!”
“잠든 산맥 초입 약초 채집. 몬스터 조우시 도주! 오후 2시! 길잡이 한 명!”
“저요 저요!”
음.
으음.
던전 입구나 술집이 아니라···. 어째 인력 사무소 느낌이 나는데···. 자세히 보니 저기 모닥불도 피웠네.
뭐지. 왜 이렇게 친숙하지.
목장갑 하나 끼고 손 비비면서 모카골드 한 잔을 해도 괜찮을 거 같다.
“아니. 이 또한 최선이겠지. 나는 옳다고 확신한다.”
“네. 선배님은 항상 옳으셨어요.”
“음?”
좋은 향기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을 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후배가 있었다. 뒷짐을 지고 살짝 상체를 앞으로 숙여 웃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렸다.
“이른 아침인데 부지런하구나 밀푀유.”
“선배님보단 게으르다고 생각해요···. 이른 아침에 편의점에서 여기까지 오시다니···.”
글쎄.
내 경우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생활하는게 습관이 되어서 말이야.
“그러고보니 요새는 항상 이렇게 활발하게 돌아가나?”
“네. 다들 내일은 더 낫겠지. 무언가 더 얻는게 있겠지. 라면서 열심히 도전하고 있어요.”
“훌륭하군.”
“후후. 저도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인걸요.”
“네가 이 녀석들에게서 배울 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파티 중에서 성실하기로는 손에 꼽으니까 말이다.”
“네? 아···.”
밀푀유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의 용병이라···. 나도 한 번 지원해 보고 싶구나. 어디 시간도 남으니 말이다.”
“선배님께서 용병을 하시나요?”
“음. 1학년 중에서 도전이 두려운 녀석들이 있다면 살짝 등을 떠미는 것도 좋겠지.”
“1학년···.”
순간
밀푀유 녀석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 진 느낌이 들었다.
왜지?
“아, 안타깝게도 1학년은 지금 없네요. 최소가 3학년인가봐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뭐 오늘은 돌아가도록 할까.”
“그, 그러면 선배님!”
“음?”
“2···학년의 부탁은 안 될까요?”
“음?”
“2학년 밀푀유 폰 사브레가 원정을 떠나려고 하는데···. 혼자서는 불안해서, 울프람 폰 로엔그린 선배님의 지원을 받는다던가···. 하하. 이상한 이야기죠?”
뭐야 그거.
“재밌어 보이는군. 당장 할까.”
“네, 네!”
***
그렇게 밀푀유가 지정한 원정지는 잠든 산맥의 심지(深地)였다.
그 너머로는 나아가지 않으나, 잠든 산맥에서 가장 위험한 땅.
물론 우리에게는 산책 코스에 가깝다.
오래간만의 산행. 가을바람이 시원해 불편한 점이라고는 없다.
몰려오는 몬스터를 일격에 베어내고,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러고보니 궁금하구나, 어째서 잠든 산맥을 골랐지? 밀푀유 너라면 작열의 대지도, 파열의 사막도 별 상관이 없지 않나?”
“거기는 저도 조금은 무서운데요···.”
“내가 함께인데 어디가 왜 무섭겠나. 그보다는 그저 왜 잠든 산맥의 심지를 골랐는지 궁금한 것 뿐이다.”
“아···. 그게요. 최근 원정지에서 몇 가지 사건이 있었거든요.”
“자세히 들려주도록.”
“대단한 건 아닌데요.”
자판형 골렘 중심으로 원정을 짜는 학생회 직속 파티들 특성상, 원정지에서 몇 번이고 부딪친다고 한다. 이 아이템이 내 것이니 니 것이니 하면서 기싸움을 벌이는 일도 다수.
그렇기에 상위 파티는 이미 잠든 산맥으로 넘어갔지만, 동부 숲과는 다르게 잠든 산맥은 상태이상의 위험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확실하게 지도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특히 심지 부분. 경계선 부분은 더 그렇죠.”
“음. 이 너머라고 해봐야 검은 깃발의 본거지밖에 없다만···. 그렇구나. 경계선은 조심하는게 맞다. 잘 하고 있구나.”
“가, 감사합니다···.”
이미 그 검은깃발은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만, 잠든 산맥의 지형 변이나 강화된 몬스터를 생각하면 이 녀석이 솔선수범해서 맵핑을 하고 정보를 얻는것은 무척이나 훌륭한 일이다.
“아, 저기 강화된 몬스터가 있어요.”
“음. 언테임드 그렘린인가. 물리적으로도 강하지만 상태이상 광폭을 걸어오니 귀찮은 녀석이지.”
이쪽도 버서크, 저쪽도 버서크라 결국 힘 대 힘 싸움으로 몰고가고, 당연하지만 보통은 몬스터가 이긴다.
뭐, 밀푀유라면 딱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다. 슬쩍 눈짓하자 밀푀유는 내 기대를 배신하고 두 걸음 물러섰다.
“아, 아아 강해 보인다아···. 그, 저, 저는 못 이기겠어요. 선배님···.”
그리 말하면서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뭐지. 상태가 안 좋은가.
“그러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네, 네···. 저, 저는 저런 강한 몬스터랑 잘 못싸우겠어요···.”
마치 스피카나 할 법한 장난이다.
하지만 밀푀유의 장난이 스피카와 다른 점은 밀푀유는 뻔뻔하지 못해서 저런 말을 하고서도 얼굴을 붉힌다는 것이다.
아무튼, 저 언테임드 그렘린을 일격에 언테임드와 그렘린으로 등분해버리고, 검을 수납한 뒤 밀푀유에게 돌아왔다.
“와, 저, 정말 선배님은 대단하세요···. 후, 후배인 저는 한참 배워야 겠어요.”
“밀푀유.”
“네, 네···.”
“그런 말을 할 거라면 뻔뻔하게 하거나, 감정을 담아서 하는게 어떤가.”
“누, 눈치 채셨어요?”
밀푀유가 살짝 나를 올려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 채면 그게 이상한거지.
“음···.”
“아···.”
우리 둘은 잠시 침묵했다.
묘한 침묵 사이에, 잠든 산맥의 바람소리만 울렸다.
***
결국 잠든 산맥의 오후를 즐기기로 했다.
주변 몬스터를 싹 다 정리하고, 불을 피우고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왜 그런 연기를 했지?”
밀푀유는 양 손을 깍지끼고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리를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말했다.
“하, 학년 수석이 되면 여, 여러 정보가 들어오거든요. 특히 다들 친절하게 다른 파티원분들의 동향을 말씀해주세요.”
“좋은 일이지. 고급 정보가 손을 쓰지 않고도 모인다는 것은, 네 위치가 높아졌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네, 네. 그런데 사실 선배님의 정보다 들어오는데요. 선배님께서 최근 1학년들과 자주 어울리신다는 정보가···.”
음.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최근이라면 샤이나 다르크. 유즈나엘. 앨리스에 스피카···. 생각보다 자주 만나네.
“그렇군. 그리 틀리지 않은 정보다. 그래서?”
“저, 저기···. 그러니까. 저, 저도···.”
“저도?”
밀푀유는 한참을 생각하다, 이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겨우 뜨고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말로 빚어내 말했다.
“저도 후배니까요···.”
“음.”
그야 그렇지. 밀푀유도 후배다.
그런데 1학년 후배들이랑 노는게 왜 이런 연극을···.
아. 설마.
그런 건가.
녀석 하고는.
“지켜지고 싶었던 건가?”
“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밀푀유는 나를 선배로서 믿고 따랐고, 나는 녀석을 후배로서 잘 대해줬다.
그런데 이제 혼자서 알아서 잘 하니까 1학년들을 신경쓸게, 라고 하면 녀석도 상실감이 크겠지.
“그게 질투가 났다 이건가.”
“죄, 죄송합니다. 질투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질투한 것을 사과할 정도로 착한 녀석이 얼마나 상심했으면.
“아니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구나. 그럼 우리 후배에게 뭘 해줘야 할지. 무엇을 바라지?”
“네, 네? 아니 그게···.”
“나는 너의 선배니 말이다. 선배에게 바라는게 있다면 뭐든 말 하도록. 앞장서서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뒤돌아 괜찮은지 물어보거나 하면 되는 건가?”
내 말에 밀푀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동안 고심하다 이내 당황한 채로 대답했다.
“그, 글쎄요···?”
“바라는게 없나?”
“아, 아뇨. 딱히 떠오르는게 없어서.”
“그런 재미있는 연기까지 하고서 말인가?”
“재미···. 아, 아뇨. 그게요. 그렇게 선배님께 일방적으로 받고 싶은게 있냐고 말씀하시면···.”
“그야 없지 않겠느냐.”
“네?”
밀푀유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두어번 쓰다듬었다.
“너는 후배지만 내 파티원이다. 너의 위치는 보조 근접 전투. 그리고 내가 지휘를 내릴 수 없을때. 누구보다 우선해서 ‘전투 지휘를 대신 해야 하는 위치’다.”
아일라보다 밀푀유의 작전 지휘를 우선 할 정도로 나는 이 녀석을 믿고 있다.
아일라는 음···. 지휘가 아니라 냅다 달려들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네, 네···.”
“그리고 나는 너의 파티 리더.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지켜주는 위치에 있다. 즉 우리들의 관계는 한 쪽이 지키고, 한 쪽이 의지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내 말에 밀푀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아요.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죠!”
“음. 그러니 1학년을 질투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알겠나.”
“네!”
녀석의 환한 미소에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이후 상쾌한 가을 바람을 즐기며 담화를 나누는 동안, 저 멀리서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밀푀유.”
“네. 선배님.”
“저 멀리서 몬스터들이 오고 있구나. 느껴지나?”
“네. 약 스무 마리 정도···.”
“내가 열 다섯을 맡겠다. 남은 다섯은 처리할 수 있겠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배틀 건틀릿을 착용했다.
“맡겨주세요. 남은 열 다섯은 믿고 부탁드릴게요.”
“좋은 대답이다.”
정말이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후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