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706)
705. 최악의 실수
하르크 폰 로엔그린.
사실 작중에서 본인이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생사도 묘연하지만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에 1만 린 걸 수 있다.
우선 황후 린디가 죽었다는 역사적 사료는 충분하지만 하르크의 말년이 묘연한 것도 그렇고, 이 제프린에는 지나치게 그의 흔적이 많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 잠적했고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초월종들은 기본적으로 수백 년을 산다. 물론 린디처럼 인간으로 살다 죽고 싶다면서 초월의 격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살려고 마음먹으면 드래곤의 심장을 뜯어 먹어서라도 수천 년을 살 수 있다.
근데 손가락 하나로 쏘는 황제 데스빔으로 드래곤 하트를 꿰뚫을 수 있는 하르크가 그리 금방 죽는다? 그건 말이 안 되지.
그가 어째서 모습을 감췄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언가에 절망했을 수도 있고, 할 거 다 했으니까 꿀이나 빨렵니다. 하고 귀농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녀석은 원작 기준으로도 최대의 떡밥 덩어리였으며 그 진의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올 컴플리트 북에서도 하르크의 설명은 몇 줄 없었다. 뭐가 올 컴플리트야. 대체 왜 32,000원이나 받아놓고 컴플리트라고 적어놓은 주제에 떡밥을 완전히 풀지 않은 거지 이 쓰레기 같은···.
아무튼.
그런 하르크가 이 제프린에 남긴 유물들, 이를 유물이라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흔적들은 지나칠 정도로 흔하거나, 기묘할 정도로 신비하게 감춰져있다.
예를 들면 ‘돌 파밍’이라는게 있다. 거주구 공사장에서 돌을 줍다보면 신비한 돌이 하나 나오고, 그걸 재련해서 다섯 개를 모아 파편 조각과 속성이 맞으면 ‘하르크 폰 로엔그린이 남긴 돌조각’이라는 아이템으로 변한다.
이게 대단한 아이템은 아닌데 전형적으로 스펙은 떨어져도 티어가 높은 아이템이다. 쓰레기 x 쓰레기 x 돌조각을 합치면 돌조각의 티어가 워낙 높다보니 티어 보정을 받아 ‘괜찮은 아이템’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진짜 도박판에서 다 말아먹고 인벤이 텅텅 비었는데 다시 시작하긴 싫을 때는 돌이나 주우십쇼. 라는 공략법도 생기는 것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이번에 엘피라네가 발견한 하르크의 유산은 꽤 흥미로운 것에 속했다.
극초기, 내가 이 세계에 왔을 때 하르크 폰 로엔그린의 유산을 전부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 처럼. 필드의 변이가 유산으로 이어지는 일도 무척이나 드물다.
거기에 유산이 어떤 형태인지 들어보니, 하르크가 숨겨놓은 깜짝 던전 타입 아닌가.
이전 퀴즈 던전이나 미니 게임 등.
아니.
생각해보니 그 녀석은 대체 왜 미니 게임 던전을 이 세계에 숨겨놓은 거지···?
“그래서 울프람. 언제 찾으러 갈 건가요?”
“당장이라도 움직여야겠구나.”
“어머나. 그럼 이브랑 필티아는···.”
두 사람.
이브는 황손으로서, 차기 황제가 될 몸으로서 알아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고, 필티아는 파파라고 따르는 인물이니까 함께 해서 나쁠 건 없겠지.
하지만.
“아니 이건 혼자 간다.”
“어머나···.”
이 게임 최초로 ‘남이 알려준 하르크의 유산’이다.
어떤 식으로 퀘스트 동선이 짜여졌는지, 아니면 우연찮게 발발한 기적인지 모르겠지만 나 혼자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혼자 간다.
“이번만큼은 누구도 대동하고 싶지 않구나. 위치만 알려준다면 혼자 탐색하고 돌아오겠다.”
“그럼 위치를 알려드리죠. 어디보자.”
그렇게 엘피라네는 하르크의 유산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해줬다.
“지금부터 달려가면 아침에는 돌아오겠지.”
“어머나. 엄청난 자신감. 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러고 보니, 정작 발견한 엘피라네 너는 흥미가 없는가?”
“하르크 그 개자···. 아니 그 인간의 유산이요? 없답니다?”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야. 그 녀석이 한창때 쓰던 물건이나 생각을 남긴 유적이잖아요? 그런 거 봐도 기분 나쁠뿐이랍니다.”
과연. 그런 생각도 있는가.
그렇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쪽이 파헤치도록 하지.
***
남부, 그리고 더 남부로 내려가면 거기서부터 나오는 몬스터는 궤가 다르다.
생각해보라. 그 싸움에 미친 투귀 엘피라네가 술병 하나 들고 놀러갈 정도의 몬스터가 득시글거린다.
즉사빔을 쏘는 바실리스크에 그림자 사이를 숨어다니는 섀도우 스토커, 공격 적중시 광란이 걸리는 광란의 종자. 환혹의꽃가루를 뿌려 냄새를 맡으면 칠공에서 피분수를 내뿜게 만드는 종언의 꽃. 땅인척 위장하고 땅째로 집어삼키는 그라운드 히포.
여기는 우리 파티원도 쉽게 오지 못하는 곳이다. 아니 웬만하면 내가 끌고오고 싶지 않다.
뭐 그리고.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 보다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편하다.
촤악. 우검으로 경쾌하게 바실리스크의 눈을 찢어내 그대로 머리가죽째로, 아니 머리뼈째로 긁어낸다. 일검에 절명.
이 주위에서 그나마 텃세 좀 부리고, 영역에 침범한 이를 용서하지 않는 바실리스크다. 일격에 멱을 땄으니 다른 몬스터들도 겁을 집어먹을 법 한데 아무래도 이 남부의 극한에서는 통하지 않는듯 하다.
상관 없다. 내 그림자에 검을 꽂아 섀도우 스토커를 먹어치웠다. 놈의 비명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만 그림자 속에서는 소리지를 수 없다. 신화 포식자가 놈을 먹어치우고, 그대로 허공을 그었다.
끄, 끄으으아아아! 광란의 종자는 결국 나를 미치게 만들지 못했다. 고작 너 따위에 미치면 내가 뭐가 되겠니.
그 뿐만이 아니다. 종언의 꽃은 채 피우지도 못한 채 땅에 떨어졌으며, 바닥을 긁고 지나가며 그라운드 히포를 잡아 뜯었다.
한 번 휘두르면 두 개의 목숨이 바닥에 떨어지고, 한 번 발을 내딛으면 또 하나의 생이 마감된다.
내 앞에는 살아있는 이가 있어도, 내가 지나온 길에 생존자는 없다.
결국 놈들은 셋 중 하나다.
내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거나, 지금 내 손에 죽거나, 내 뒤의 시체로 남거나.
푹.
목적지 바로 앞에서, 어떻게든 내 목덜미를 짓이기려고 한 헬레이저 멘티스를 그대로 갈아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찮은 몬스터라 한들, 그 투쟁심만큼은 인정하마.”
내 앞을 가로막고 선 몬스터는 단 한마리도 도망치지 않았다.
몬스터의 파도를 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물량.
허나 관계 없다.
그 파랑이 얼마나 거대하든, 설령 헤일이라 한들 베고 지나가면 된다.
두근거림은 없었다. 시체의 산을 쌓아올렸거만 희열도 즐거움도, 쾌락도. 반대로 살육에 지친다거나 손에 묻은 피딱지가 역겹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저 수가 많을 뿐인 반복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 전투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차라리 파티원들이 성장하는걸 보는 게 더 재밌었겠구나.”
과연.
전투란 누군가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 또한 있는가.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작은 깨달음을 가슴에 품고 눈앞의 석벽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안에는 조금 더 즐거운 것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면서.
***
하르크 폰 로엔그린의 던전 중에는 익스트림 챌린지라고 불리는 던전들이 있다.
미니게임 던전이나 퀴즈 던전과는 다르다. 여기는 마계의 문과 비슷할 정도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던전이다.
몽경성역도 멸마도 그렇고 원작 게임은 생각보다 엔드 컨텐츠가 넘실거리는 곳이구나.
아무튼, 이곳도 그런 익스트림 챌린지 던전이다.
게임 최악의 보스들이 나오는것은 물론, 재밌는 것은 ‘커스텀 보스’가 나온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브의 전투 패턴을 가진 켈터스가 나오기도 하고, 이브의 모습을 가졌는데 쓰는 마법이 늪이기도 하다.
거기에 패턴이 꼭 하나만 변주를 가지는 게 아니다. 켈터스가 1페이즈에서 성광창을 쏘다가 2페이즈에서 흑수정을 갈길 수도 있다.
외형만으로 패턴을 파악할 수 없으니 더욱 신나고 재미있는 전투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나도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고, 패턴 트리거가 고정이 안 된다.
즉 시스템이 진짜 랜덤하게 뽑아낸다.
이건 뭐 거의 유저 커스텀. 모드 급의 장난 아닌가.
아.
하나 확실한 건, 죽어버린 보스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
자 그럼.
이 세상은 이 커스텀 맵을, 보스를 어떻게 구현했을까.
이 세계는 ‘아일라’도 ‘이브’도 보스가 아니다.
아니면 300년 전 하르크는 이 던전을 만들 때 아일라와 이브가 보스가 되는 장치를 구현했을까? 그러면 켈터스는?
눈 앞에 나타난 녀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과연. 이런 식인가.”
황금빛 머리와 푸른 눈동자. 경쾌해보이는 미소와 영웅이 떠오르는 백색 갑주. 등 뒤의 붉은 망토와 허리춤에 찬 두 개의 장검. 한 손에는 단창.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
콰콰콰콰콱!
공간이 열리며 녀석의 주위에 꽂히는 열 다섯 개의 무구. 하나하나가 신검. 마검에 가깝다.
물론 저 녀석을 전부 구현한 건 아니겠지만, 위세만큼은 이 몸이 떨릴 정도다.
【하르크 폰 로엔그린의 환영과 조우했습니다】
【아주 조금의 힘만 남은 잔상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초월에 준합니다】
【격이 다른 상대입니다. 당장 도망치는 것을 추천합니다】
도망? 누가. 내가?
고작 마계 4문의 페이크가 아니라, 진짜 본인이 만든 환영인데 말이야.
만찬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미식가가 세상에 어딨겠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하르크 폰 로엔그린과의 전투에 돌입합니다!】
***
솔직히 말해서 실수했다.
이 녀석과 싸울 때는 좀 더 크게 준비를 했어야 했다.
“큭. 내가 이런 실수를···.”
날아오는 검격은 셋. 허공에 뜬 신검과 내 발 아래에서 낮게 깔리는 마검. 그리고 녀석의 손에 쥐어진 빛의 검 까지.
분명 하나하나가 초월격에 가깝다. 또한 검세를 보라 얼마나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실전지향적인가.
신검은 찌르듯 내 목젖을 노리고, 그 틈을 타 마검이 내 아킬레스건을 자르러 온다. 빛의 검은 정확하게 내 심장께에 날아든다.
거기에 마법은 어떤가. 삼검의 위력이 충분하니 얼음과 물리로 내 움직임만 속박하려 든다. 조금이라도 잘못 판단하면 그대로 죽는다.
남의 검술을 보고 ‘좀 치네’라고 생각한 건 하르크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이게 삼백 년 전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영웅의 풍모인가.
아니. 분명 이것도 녀석의 진짜 실력이 아닐 거다. 확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안타깝고 아쉽다.
휙.
빛의 검을 튕겨내어 그대로 허공의 신검과 충돌시킨다. 눕듯 몸을 뒤로 던져 허공을 날며 마법을 피하고 그대로 신화 포식자로 땅을 긁으며 마검을 지웠다.
그래.
나는 준비가 부족했다.
신화 포식자에 빛의 검이 잡아먹히고, 신검은 궤도가 틀어졌다. 마법은 흔들렸으며 마검은 지워졌다.
【초월에 준합니다】 라는 시스템의 말은 결코 초월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의미 그 검격도 단정할 뿐, 세계를 뒤집을 정도의 힘은 아니다.
반대로, 내 신화포식자는 어떻지.
이 검은 이미 신화의 영역에서도 완성된, 초월격의 검이다.
즉. 결국 눈앞의 하르크와 내 손아귀 안의 신화포식자는 격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이쪽의 일검이 전부 하르크에게 치명타로 들어가는 반면 하르크의 공격은 내게 닿지 못한다.
조금.
아주 조금 더 허접한 검을 준비했더라면.
신화가 아니라 전설급으로, 조금 더 허접한 걸 준비했더라면···. 이 싸움을 정말 잘 즐겼을텐데.
‘내가 너무 강해서 보스전이 재미가 없는 최악의 사태!’
“이런 실수를···. 이런 허접한 실수를···. 이 내가, 즐길거리 한가득인 이 보스전에서···!”
패턴이 재밌는 보스 상대로 너무나 강한 무기를 들고와서 한 방에 죽여버리면, 무슨 재미냐고!
인벤토리에서 다른 검을 꺼내자니, 첫 일격에 녀석의 신창을 지워버렸다.
이미 녀석은 전력을 다 할 수 없는 상태. 흥이 식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구나.”
끝끝내 녀석의 쌍검까지 베어버리고, 심장께에 칼을 꽂았다.
그제야 녀석은 흐릿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후우.”
뭐,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맵의 대전제는 【죽어버린 보스가 복제가 불가능하다.】 라는 것.
“하르크 폰 로엔그린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 라는 결론이 나오는구나.”
그럼 그 때.
진짜 거하게 한 판 뜨면 되겠지.
“그 때를 기대하마.”
추측컨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사라져버린 신기루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는 녀석의 안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노잼은 노잼이고, 재회는 재회고, 싸움은 싸움이고.
“도굴은 또 도굴 아니겠나.”
감사하신 선조님의 선물 잘 쓰겠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