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84)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 이영진으로 살 때.
온라인에서 ‘런’이라는 단어의 뜻에는 달리기가 아닌 ‘노가다’라는 의미가 있었다.
파밍런 쫄작런 힘작런 등등.
그리고 당연히 D/Z SAGA에도 몇 가지 런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2막에서 육성 루트랑 맞는 장갑이 나올 때 까지 모스맨을 잡는 장갑런.
재료를 먹고 옵션만 확인한 뒤 쓰레기 옵션은 버리고 인벤에 고급 옵션 재료만 가득가득 채우는 파밍런.
그 다음으로는 육성 망했을 때 다음 회차로 가기 위해 에밀리 루트 엔딩을 달리는 에밀런이 있다.
수 없이 많은 뉴비들이 1회차 망하면 어떻게 하나요? 라는 질문을 날릴 때 “요리 올리시고 에밀리 엔딩 보세요.” 라고 대답해 줬던 기억이 난다.
다른 배드엔딩과는 다르게 에밀리 엔딩은 빠르게 볼 수 있으며 정식 결말로 쳐줬으니까.
제일 빨리 진입한다면 1막에서도 플래그를 꽂을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에밀리의 친밀도 컷을 맞춰서 필드를 뚫었다.
딱히 에밀리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에밀리 하이멜로디는 이 맵을 열지 못한다면 스토리상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게 구원이냐고 물으면 ···글쎄다. 윈 윈 정도로 합시다.
우리 서로 힘을 합쳐 재료를 얻을 수 있는 맵을 얻었다는 것 정도 말이다.
“···감사해요 선배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음.”
“아, 그리고 ···아직 발상을 못 배웠어요. 더 찾아뵈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도록.”
“네, 네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평생 ···당신을 평생 잊지 못 할 거예요.”
그리 말하며 에밀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거 에밀리의 루트에 들어가면 에밀리가 단 한 번 하는 대사다.
‘켈터스. 평생 당신을 잊지 못 할 거에요.’
뭐 루트에 들어갔을 리는 없지.
온갖 플래그를 다 까부수고 특전만 얻어냈는데 루트는 무슨.
***
【천혜의 고도】.
초대 황제가 검의 길도, 마법의 길도 걷지 않는 요리인을 위해 준비해 놓온 식재의 성지.
바다는 잔잔하고, 낚시 스폿도 많고 과일에 향신료도 넘쳐난다. 거기에 먹을 수 있는 동물들도 많다.
“음.”
물론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
1막의 요정의 낙원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어떻게 보면 히든 맵.
각 막마다 하나씩 숨어 있는 히든 맵은, 사실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라 즉시 공략 보다는 성장에 맞춰서 초반부만 공략하는 게 이득일 때가 많다.
“···음. 아쉽긴 하군.”
물론 고인물인 이상 완전히 다른 공략법은 있다.
맵의 고정된 자리에 배치된 보물상자를 먹고 그대로 5티어 귀환 마법 【이스케이프 프롬 필드】를 써서 탈출하면 되는 일종의 상자런이 된다. 하지만 내가 했다간 그대로 죽겠지.
아니 그 수준이 아니다.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줍다가 고블린이라도 만나면 진짜 죽는다.
물론 파트라슈가 있긴 하지만, 나와 파트라슈의 조합마저 무시 할 정도의 강한 몬스터와 조우 할 수도 있는 법.
그러니, 여기서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공략한다!
“주인. 진짜 이런 식으로 가져가면 된다는 건가···?”
“음.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군. 알겠다.”
포탈 밖에서 파트라슈만 밀어 넣고, 염동력으로 필요한 물건만 쏙쏙 빼온다.
크아아앙! 하면서 포탈 안에서 몬스터의 어그로가 끌리면, 파트라슈를 포탈 밖으로 뺀다.
그러면 포탈 밖을 볼 수 없는 멍청한 몬스터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다가 다시 돌아간다.
“들어가라 파트라슈.”
“···으, 음. 알겠다.”
이게 바로 입구 짤파밍.
능력이 없으면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이게 맞나. 주인? 긍지를 걸고?”
“음.”
“에밀리라는 은발의 아가씨도, 혼자서 입구 근처의 싸움을 각오했는데, 주인은 대체···?”
뭐.
그건 에밀리 이야기고.
어쩔건데.
내가 다치면 누가 보상해주냐 응?
***
수 없이 많은 식재를 가게 안으로 들고 왔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상황.
파트라슈는 못 해먹겠네 진짜. 라는 말을 하고서는 주위를 어슬렁 거리겠다며 떠났다. 거 요정 참 매정하네.
“···음. 슬슬 한 번 정리할 때가 되었군.”
스킬작이나 스탯작이 아니라, 슬슬 에피소드 정리를 한 번 해야겠다.
이후 노트를 펼치고, 타임라인을 적어나갔다.
“2막의 보스가 누군지는 알지만 말이다.”
2막의 컨셉은 썸썸 아카데미다. 그냥 히로인이랑 오지게 썸만 타는 거야 이게.
켈터스는 2-1부터 2-4까지 이브를 비롯한 레지나, 이졸데 같은 히로인들과 함께 모험을 떠난다.
그 사이에 각 히로인들의 매력이 소개되고, 파티를 짜게 되고, 파티 스킬을 얻고, 이브의 원정에서는 파티 스킬인 하트 링크까지 손에 넣는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D/Z SAGA에는 각 막의 최종장마다 보스가 존재하고, 2막 보스의 공략법도 분명 존재한다.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그리 어려운 보스는 아니다. 좀 기분 나쁠 뿐이지.
허나, 이 보스는 울프람 입장에서는 조금 까다롭다.
“보스전 타이밍을 잡기 어렵군. 누구한테 나타나는 거지?”
보스가 등장하는 트리거가 철저하게 켈터스의 행동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 문제다.
켈터스가 가장 많은 호감도를 올린 히로인 앞에 보스가 등장하고, 그녀를 지키는 한 명의 기사로서 자신을 자각한다.
만약 여기서 구원에 실패하거나, 타이밍에 늦으면?
당장은 별 일 없다.
하지만, 히로인 내면에 데미지가 쌓인다.
이브는 총기를 잃고, 레지나는 생의 의욕이 사라지며, 이졸데는 미쳐버린다.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해피 엔딩으로는 갈 수 없는 절망.
물론 이 보스 한 마리 때문에 그 꼴이 나는건 아니지만, 얘를 기점으로 총 4마리의 보스가, 히로인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그게 바로 플래그 브레이커. 엔딩 분쇄자 D/Z SAGA의 어둠.”
그 시작을 2막부터 던지는 또라이같은 게임이 바로 D/Z SAGA라는 것이다.
이게 완전히 돌아버리는 거란 말이지.
“보스도 악질인데, 누구 앞에 보스가 나타날지 모른다는게 문제군.”
뚝, 하고 펜이 멈췄다.
“신경쓰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만이긴 하다만···.”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원작의 히로인이 아니다.
네프티는 공략불가였고, 루디카는 최강의 암살자님에, 아일라는 보스였고, 밀푀유는 원작에서 퇴학당하는 열등생.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이들 중 단 한 명.
원작 기준으로, 이 악질적인 함정에 걸리는 이가 있다.
“···쯧.”
혈통 메이트.
울프람 폰 로엔그린의 호적 아랫줄에 있는 이.
똑똑하지만 멍청하고, 말을 섞기도 짜증나며, 존중이라고는 모르는 학생회장.
울프람 폰 로엔그린이 되었을 때.
나는 살아남기가 최우선이었고,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지금이야 아일라와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했고, 네프티나 루디카. 병아리들같은 애들도 종종 찾아온다.
이루지 못한 편의점 점장.
편의점은 그 구색만 겨우 갖춰졌을 뿐. 앞으로 한참 멀었다.
그러니까 울프람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면 된다.
“저 멍청한 여동생만 신경 쓰면 되는가.”
하지만, 뻔히 구할 수 있는 녀석을 못 본 채 내버려 두는 건, 아무래도 꿈자리가 사나울 듯하다.
“이 몸뚱아리는 밤잠을 못 이루면, 체력이 낮아서 아침이 괴롭단 말이다.”
그래. 그런 거다.
***
다음 날.
흑왕호에 올라타서 학생회 본부동을 향했다.
어제 싼 도시락이 잘 포장된 통을 챙겨 들고 말이다.
······.
아 진짜 여기까지 해야 하나.
얘가 뭐 어떻게 되던 나랑 진짜 관계 있나.
“우, 울프람 님 안녕하세요.”
나를 보자마자 다른 학생들이 수군거린다.
주위를 슬쩍 보니 정확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손에 든 도시락통을 보고 있다.
내 손에 든 도시락통. 검은색 3단 반합.
그 안에 들어있는 소중한 도시락은 동생을 위해 오빠가 싼···.
아 그만두자. 진짜 미칠 거 같으니까.
“저거 도시락통이지?”
“···저게 그, 크루에서만 먹는다는 그 셀럽의 증명···”
“나도 소문은 들었어.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지?”
“하이멜로디 왕녀가 울프람 님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왕녀님을 한 번에 빠지게 만든 도시락···.”
아 진짜. 좀!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긴 하지만, 거 참 남 말 하기 좋아하는 학생들일세!
“이브 있나?”
“네, 네···. 학생회장실에 계실 겁니다.”
“알겠다. 들어가 보도록 하지.”
“넵!”
그리 말하며, 학생회실 앞을 슥 하고 지나갔다.
지나가는 길에 실피아와 눈을 마주쳤지만, 별 말은 없었다.
얘도 나름 순해진 건가?
“이브. 있나?”
“무슨 일이죠?”
집무실에서는 눈이 퀭해져서 서류를 끄적이는 이브가 있었다.
옆에 최상급 마력포션이 몇개나 버려져 있다.
이브는 마력을 체력으로 전환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효율이 지나치게 안 좋다.
만약 좋으면 그 체력으로 잠시 회복하면서 마력을 채우고, 또 그걸 체력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무한동력의 증명자가 되었을 것이다.
즉 D/Z SAGA 최악의 개사기 캐릭터 이브 나름의 패널티다.
이걸 패널티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브는 작중에서 한 번씩 과로로 인해 기절한 뒤 보건실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 모습을 짠하게 여긴 켈터스가 학생회에 들어가, 이브와 함께 분전하고 이브의 고독을 깨닫고 옆에서 서포트하면서 둘의 인연이 깊어진다.
켈터스는 이브의 구원자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다.
“식사는 했나? 같이 들지. 할 이야기가 있다.”
“···약속은, 안 잡았을 텐데요?”
“무얼, 준비 해 온 정성을 좋게 봐 주도록. 내 식사를 맛있게 드시던 이브 폰 로엔그린님의 입맛에 맞을 거라 확신한다만.”
“···으, 으윽. 누가···.”
“싫은가?”
“싫다고는, 안 했어요.”
그리 말하며 분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꽉 쥐는 이브.
만약 얘한테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켈터스처럼 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울프람과 이브 답게.
***
“또 샌드위치?”
“불평하지 말도록.”
“불평 한 적 없어요. ···잘 먹겠습니다.”
이브의 말마따나 식사는 또 샌드위치였다.
하지만 움직여도 잘 뭉개지지 않고 여러 맛을 즐길 수 있으며 영양소 밸런스도 좋은데다가, 천혜의 고도에서 얻은 재료까지 살리려면 샌드위치가 최고인걸.
“···응. 역시. 괜찮은 맛이야.”
이브는 마치 다람쥐마냥 샌드위치를 양 손으로 집고 우물우물 먹는다.
그 와중에 한 번 먹은 맛은 안 먹고, 다른 맛을 먹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식사를 즐기고 있다.
그 모습이 가증···. 아니 나름 재미있어서 그냥 픽 웃고 말았다.
“뭘 웃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스프도 있다.”
“···고마워요.”
그리 말하며 이브는 내가 만든 스프를 마시고는 그제야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역시 소문이 날 만하네요.”
“과찬이다.”
정말 과찬이다. 소문이 났으면 편의점에 손님들이 미어 터졌겠지.
“음. 솔직히 진짜 인정하기 싫은데, ···괜찮은 맛이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몸도 좀 가벼워 진 것 같고요.”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 가벼워졌을거다.”
“네?”
“체력 회복과 스테미너 상승. 그리고 몇 종의 버프를 겹친 요리다. 세 종류의 샌드위치를 다 먹었으니 충분히 효과를 볼 거다.”
“···이것도 마법 음식이에요? 하여간 계속해서 이상한 거나 만들고.”
“그리고.”
“?”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브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네 앞에 아주 구역질나는 보스가 나타나니, 한동안 내 식사로 정신 저항을 올려라?
아니면 푹 자고 일어나서 정신건강이 든든하게끔, 앞으로 2주정도는 버텨라?
자 좋아. 그럼 그걸 어떻게 설명하지?
2막 보스는 검은 깃발의 간부인데, 블랙 마켓의 최심부에 있는 놈의 꼬붕이야! 라고 말해줄까?
그럼 이브가 막 수색대를 조직해서 블랙 마켓을 털러 갈까? 그럴 확률도 높다.
하지만 그 전에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며 나를 탈탈 털겠지?
그리고 탈탈 털다보면 나한테 블랙 마켓 출입증이랑 검은 깃발 간부 뱃지가 있는 것도 들키겠지?
그러면 울프람의 모가지도 탈탈 털리겠지?
와 정말 행복한 엔딩이에요!
“제대로 말해요. 갑자기 왜 입을 다물어요?”
“······아니 잠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전말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좀 더 직접적으로 전하는 수 밖에 없다.
“이브 폰 로엔그린.”
“네? 뭐에요?”
2막 보스는, 강력한 저주를 발동한다.
이후 빈틈이 생긴 히로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원작 기준 작중 2막의 이브 폰 로엔그린의 트라우마는 바로 ‘죽어버린 울프람.’
“나는 여기에 있다. 울프람 폰 로엔그린은 여기에 있다.”
“알고 있어요.”
“그래.”
“징그럽게 거기에 있다는 것도, 계속 어디선가 쓸모없는 짓을 할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맞다.”
“그래요. 그러니까 사람이 얼마나···. 진짜 속도 모르···.”
뭐라 계속 투덜거리던 이브의 말이 어느새 끊기고, 그 소리를 잠든 숨소리가 대신했다.
“이브 폰 로엔그린 회장님···. 앗.”
“음. 회장은 지금 잠시 잠들어있다. 쉬게 내버려두지 않겠나.”
직후 학생회 임원 한 명이 찾아와 이브를 찾았고, 나는 그를 제지했다.
“아, 그것이···. 저.”
안절부절 못하는 임원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일인가?”
“···점심시간 이후 마에스트로 분들과 담화가 있습니다. 다들 이브님께서 참석하신다고 한 달 전 부터 예약을···. 어찌 해야 할지.”
이 녀석, 그런 것도 하고 있는 건가.
“음. 그렇다면 내가 참석하도록 하지. 이유를 이야기하고 같은 황손이라면 그들도 체면이 살겠지?”
“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임원을 따라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 사이에 묘한 불평이 섞인 것을 들었다.
“···바보, 울프라암···. 진짜아···.”
“···나 참.”
거 참.
손 많이가는 혈통메이트로세.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