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859)
859. SPIRITS
정말.
정말 솔직하게 표현해서 더럽게 힘들다.
이 정도 난이도면, 6문의 보스. 그러니까 란그리스를 혼자 상대하는 급 난이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우선 가짜 울프람이 눈 앞에 나타난다. 손에 칼을 쥐고 맞붙는다. 내가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긴다.
그러면 뒤에 있던 밀푀유가 그걸 보고 얼굴을 붉힌다.
그 다음 방에서 또 울프람이 스폰된다. 슬쩍 밀푀유를 돌아보면 녀석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복제된 나와 또 싸운다.
물론 이번에는 들어가기 전에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다. 그 결과 이기는데 성공하고, 이번에야말로 다른 녀석이 나오겠지 싶었지만….
【울프람 폰 로엔그린의 복제】
“…….”
또 내가 있다.
안대를 벗은 밀푀유를 바라보니, 이제는 말로도 못 할 정도로 붉게 물들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더군다나 웃긴 점은 저 가짜…. 그러니가 밀푀유의 상상 속에 있는 내가, 조금씩 더 강해지고, 조금씩 더….
아니.
내 입으로 말하기도 좀 그렇긴 한데, 조금 더 잘생겨지고 있지 않나?
“밀푀유.”
“네.”
“저 녀석의 외모와 내 외모가 조금 차이가 있는 듯 하다만.”
녀석의 육체는 조금 더 단단하고, 머릿결이 좀 더 윤기가 넘치고, 눈에는 마치 안광이 흐르는 듯 하다.
저건 밀푀유의 정신을 완전히 투영해낸 것이고, 결국 상상 속의 나.
밀푀유의 상상 속에서, 나는 저런 모습인가?
“어, 어쩔 수 없어요….”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지.”
“서, 선배님이 제 안에서 매번 더 잘생겨지시고, 강해지시는 걸 어떻게 해요….”
“…….”
【황실 혈통이….】
순식간에 감정이 끓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이건 어떤 감정이었을까. 오글거림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수치였을까. 아니면 기쁨이었을까.
아무튼.
밀푀유는 눈을 감고 있더라도 계속해서 내게 반하고 있고, 머릿속에서 이상적인 나를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 라는 이야기인가.
내 입으로 말하니까 더럽게 부끄러운데,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돌겠네 진짜.
“일단. 저걸 정리하지.”
“자, 잘 부탁 드립니다.”
“음….”
뭘 잘 부탁한다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나는 세 번째 나와 격돌했다.
그리고, 네 번째, 다섯 번 째. 여섯 번째도 나와 만났다.
매번 너덜너덜해지지만, 결국 내가 이겼고 계속해서 더욱 강해진 내가 소환되었기에 격이 높은 상대를 처리했다는 포상으로 소모품과 체력이 회복되었다.
회복되지 못한 것은 단 하나.
“하으….”
“…….”
여섯 번이나 나를 소환한 밀푀유와, 점점 더 잘생겨지고 강해지는 나를 처리해야 하는 나.
우리 둘의 이 끔찍하게도 괴로운 침묵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
그렇게 태초의 에메랄드가 있는 마지막 방까지 도착했다.
“…….”
“아, 으….”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침묵은 이제 한계까지 차 올라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특히 마지막 싸움.
전신에 백금갑주를 입고, 두 자루의 검을 찬 후. 머리를 올려 넘기고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은, 정말 뭐라 형언하기 힘들었다.
밀푀유도 그 모습을 보더니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빤히 바라보니 결국 죽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짜 머릿속에 감춰놓은 모습이었어요….’ 라며 작게 오열할 뿐이었다.
그렇게.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갱신하는 후배와, 그런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싸워야 하는 우리들의 싸움도, 이 방에서 막을 내린다.
마지막 방.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거대한 공동의 중앙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과 바람을 겹쳐 목소리로 빚어내는 것은 마치 라이아 다이아 프로스트의 능력과 비슷하지만, 이쪽이 원류다.
라이아의 능력이 어딘가 무기질적인 목소리였다면, 이건 감정까지 똑바로 투영하는 목소리거든.
-너희들…. 뭐야?
“바람의 정령왕인가.”
-맞아. 내가 아인플뤼겔이야. 그런데…. 너희들 진짜 뭐야?
“태초의 에메랄드가 필요해서 왔다. 겸사겸사 네 협력도 구하고 싶다만.”
-질문은 내가 하고 있잖아!
휘이이잉!
바람이 폭력이 되어 내 주위를 흐른다. 방향을 보니 나도 밀푀유도 공격하는 것 같진 않고, 그냥 분풀이 같다.
“뭐냐니?”
-이 성역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잘 알면서, 그, 그런 파렴치한 정신상태로 들어온 거잖아!
“파렴치하다니, 말이 과하구나.”
-과한 건 너희들 꽁냥질이고!! 이 던전은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면서, 그 전투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비정함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야! 알아? 내가 이 던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넣었는지 아냐고! 그 갈등과 극복,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중요한 거라고! 그런데, 그런데 너희느은!!
알고 있다.
아인플뤼겔. 최초의 날개라고 이름 붙은 이 녀석의 취미도 성격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너희는, 뭐지?”
-뭐냐니! 세상에. 매 번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 그래서 더 멋지게 나타나? 그래서 자기 자신을 쓰러트려? 내가 이런 거 보려고 여기 만든 줄 알아?! 난 말이야! 그런 꽁냥질을 보려고 여기 만든 게 아니야!
“나도 너에게 그런 극복을 보여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정당한 공략법으로 제대로 싸우려고 왔지.”
-아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보자고.
그리 말하고, 우리 앞에 바람의 정령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아 다이아가 여왕으로서 자신을 나타냈고, 그랑펠리시에가 망할 꼬맹이. 샤르가 신녀나 성녀에 가깝다면, 태초의 날개 아인플뤼겔은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다.
눈은 안경을 쓰고 있고, 머리는 살짝 더벅머리. 전체적으로 푸른 빛이 돌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어마어마하게 내성적으로 생겼다.
이게 바로 아인플뤼겔. 바람의 정령왕이다.
“그거 좋지. 한 번 해보도록 할까.”
-그래. 말해두지만, 나는 지금까지 네가 상대했던 적들보다 강해. 알겠어?
“그러면 좋겠구나.”
어디.
황금갑주쌍검울프람보다 센지. 내가 직접 테스트 해 주마.
***
그렇게 딱 30분 후.
“더 하겠나.”
-아뇨. 죄송합니다.
“좋은 대답이군.”
목에 칼이 들이대진 채로 바들바들 떨던 아인플뤼겔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주변을 폐허로 만들 기세였던 폭풍이 가라앉고, 멀리서 지켜보던 밀푀유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이 분이 바람의 정령왕이신가요?”
“그렇다. 우리가 만난 녀석들 중 유일하게 태초의 에메랄드를 제대로 가지고 있는 정령왕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거기까지 말하고 녀석은 합. 하고 입을 가렸다.
그래.
어떻게 자기 속성 태초석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주제에 이렇게 멍청하게 쳐발릴 수 있냐는 거겠지.
“우선 이 녀석은 태초의 에메랄드를 이 던전을 만드는데 전부 투자했다. 웬만한 힘으로 초월격 무기를 두 개를 가지고 있는 나를, 여섯 번이나 복제할 수 있을리 없지.”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이 녀석 자체가 비 전투 요원이다. 싸움과는 거리가 멀다.”
“네?”
-큭…. 누가 비 전투 요원이라는 거야. 저는 비 전투 요원입니다. 저희 부모님도 비 전투 요원입니다.
내가 검을 슬쩍 들자, 녀석이 쪼그라들었다.
쯧. 하여튼.
“아까 들어서 알다시피, 일설에 의하면…. 이 녀석은 굉장한 이야기 중독자다.”
“이야기 중독자?”
“음. 태초의 에메랄드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바람을 조종하는 법. 그 안에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지. 그리고 이 녀석이 가장 큰 감정의 격변을 겪었던 것은 300년 전이다. 영웅들이 신화를 그려나가는 시대였지.”
“아….”
“그들의 눈물, 분노. 죽음. 절망.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뜨거운 피. 승리. 환희. 그런 격정이 이 녀석에게는 거대한 감동의 파도로 들이닥쳤겠지.”
그리고 그 감동의 파도는 하르크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을 거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것은 격정의 파도가 아니라 권력 분배 문제부터 시작한 더러운 정치 암투.
결국 하르크는 이 세계에서 모습을 감췄고, 황후는 죽었다. 그 외 많은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초월종들은 제프린에 갇혔겠지.
“설령 제프린 안에 갇혀있다 한들, 태초의 에메랄드가 가져다 주는 이야기는 세계를 아우른다. 허나, 끝없이 절망만 했겠지. 그래서 이 던전을 만들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베고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말이다.”
-인간이 울타리 안에 갇혀서, 도전하지 않는 세계는 재미 없다고….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뭐.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지만…. 바꿔 말하면 이 녀석은 그만큼 ‘이야기 중독’ 이라는 거겠지.
현실과 가상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말이야.
그 점에서는 나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인도어 취미의 도청범죄자가 바람의 정령왕 되시겠다.
당연히 전투 능력은 별로 의미가 없고, 감지 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범죄자잖아?
“그래서. 이렇게 간단하게 이길 수 있는 거다.”
-윽…. 으윽. 그래. 너 강하다. 아주 강하네!
“그럼. 강하고 말고, 무려 【그 위대하신 선조님의 후예 아닌가.】”
-네 선조가 누구…. 아.
그제야 아인플뤼겔이 나와 눈을 마주친다.
빛나는 금발, 푸른 눈. 그리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기세,
“알겠나?”
-하르크…. 의 후예?
“그렇다. 그 분의 피를 이어받은 게 바로 나 울프람 폰 로엔그린이지.
-그… 그래. 뭐. 하르크의 후예라면 강할만도 하네. 흐음. 그렇구나. 하르크의 후예라…. 그래서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지?
옛 친구의 후예라고 하니 마음이 좀 놓였는지, 아인플뤼겔은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안경 속 땡글한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고다닐 정도의 장발을 빙글빙글 꼬기 시작했다. 거 참 편한 자세로세.
”곧 어마어마하게 큰 싸움이 열린다.“
-그래? 인간들이 또 서로 싸우나 보네.
”아니. 쳐들어오는 것은 몬스터. 그리고…. 마족이다. 이 제프린은 인류 최후의 방어선으로 그 소임을 다 해야 한다.“
-뭐?
”그래서 네 힘이 필요하다.
-자세히 설명해봐.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아인플뤼겔에게 대충 설명했다. 이 제프린에 있는 8군데 마계로 통하는 문과, 그걸 닫는 계획. 그로 인한 몬스터 웨이브와 기상이변 등.
“다른 정령왕들은 다들 모였다.”
-그래. 그 인격파탄자 셋이 말이지…. 그래서?
“너도 필요하다. 이 전투를 지원해다오.”
-흐, 흠…. 그래. 큰 전투긴 한데…. 내가 도움이 될까? 나는 그냥 여기서 이야기만….
“언제까지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지?”
-뭐…?
“네가 바라는 것은 그 전투의 실감. 허나…. 가장 큰 실감은 네가 직접 체험하는 것 아닌가? 전투의 열기에 몸을 맡겨서, 그 끝에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진정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법 아니겠나. 영웅이 되어라. 아인플뤼겔”
-아, 그. 그렇지만…. 나는 약하고…. 너도 봤잖아. 고작 삼 십 분 만에…. 거기에 마족이라니…. 어렵다구. 나 같은 게 영웅이 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고개를 숙여. 오른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녀석은 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본다.
보다 강한 신념을 담아, 입을 열었다.
“맞다. 적은 많다. 아인 플뤼겔.
-응….
”하지만 별거 아니다. 그 날은 너와 나. 둘이 영웅이니까.“
-…….
그렇게.
아인플뤼겔과 태초의 에메랄드를 손에 넣었다.
나중에 합류하겠다고 약속한 아인플뤼겔을 뒤로 하고 동굴에서 나오면서 기지개를 쭉 폈다.
”이걸로 전부 준비가 끝났군…. 근데 왜 그러지?“
”아뇨. 선배님이 그런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 말하며 내 뒤를 걷던 밀푀유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뭐지.
왜 그러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