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869)
869. 편협하고 속좁고 귀찮은
로즈마리의 10개의 지령은 전부 깬 기억이 있다.
나중에 졸업하면 부디 연락을 달라고 했었지. 그게 D/Z SAGA 2편이 나오는 떡밥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2편은 절대 나오지 않고 DLC 업데이트도 끊겨서 모든 건 거품으로 돌아갔지만 말이야.
아무튼. 이 녀석이 제프린에 남긴 임무들은 하나같이 민생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이 대륙의 식량 공급사정을 개혁하겠다는 마음뿐이다.
그래서 착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자, 잠시만요. 울프람 황자님.”
“너도 식재를 조달하는 입장에서 알겠지만, 나는 이미 소규모 자동화를 끝내놨다. 한번 선례를 남겨놓으면 그 뒤로는 비용을 조달해 시설만 늘리면 그만이다.”
“저, 저기….”
“다음 번에는 제대로 된 대화를 했으면 좋겠군. 입장과 위치를 제대로 분간한 후. 나에게 사전에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넣고, 허락을 받아. 예의를 갖추고 찾아오도록.”
일방적으로 할 말만 한 뒤. 레지나를 일으켜 세워 방을 나갔다.
레지나는 내 손에 그대로 이끌려 방에서 나왔고, 잠시 걸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멈춰 섰다.
“저 황자님…. 하인즈 가문은 그래도 장로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걸까요….”
“레지나. 장로 가문이란 300년 전 위대하신 선조님이 정한 가문과, 후대에 정해진 몇 개의 가문이 합쳐져있다. 알고 있나.”
“네? 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곡괭이는 위대하신 선조님이 지정한 가문이 아니다. 즉 후대에서 그 업무를 높이 사 승격시켜준 가문이지. 전통도, 정통도 없다.”
“…….”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이브가 황제가 되는 날, 다른 가문의 반발 따위 얼마든지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 민중은 편의점에 열광하고, 우리에게 지지를 보낼 것이다. 각 귀족들의 포섭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극단론이십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에 염려됩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혹시 제가 부족했다면….”
레지나는 조심스레 이쪽을 올려봤다.
부족.
부족이라….
“그래. 레지나. 네가 부족했구나.”
“역시…. 죄, 죄송합니다. 어디가 부족했는지 말씀해주시면….”
“아무리 임무가 최우선이라고 해도, 내 앞이 아닌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밀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네?”
상상하지도 못한 이유로 질책을 받는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건 내 본심이었다.
저 캔자스에서 튀어나온 듯 한 빨간머리 삐삐 녀석 앞에서, 레지나가 고개를 숙인다는 게 화가 났다.
내 파티원이 뭐가 부족해서, 남한테 고개를 숙이고 기싸움에서 지고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말하마, 그 누구도 우리 파티원을 핍박하거나 우습게 볼 수 없다. 설령 그게 황제라 할지라도, 내 사람들은 허리를 세우고, 당당하게 마주보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언젠가 이 대륙을 바꾸고, 세상을 잇는 대업을 이룰 녀석들이다.”
레지나는 이제 말조차 잇지 못하고 있다.
음.
그래. 솔직히 이해 못할 수 있다.
계급과 사교의 중요함을 아는 레지나라면 나를 또 망나니 취급 할지도 모른다.
뭐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 한들 내 파티원이 맞고 다니는 모습은 못 본다.
“그러면…. 황자님은 제가 하인즈에게 밀린 것 만으로 진심으로 화내주신 건가요?”
“맞다. 부정하지 않으마.”
“그, 그렇군요. 저 때문에….”
레지나는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몇 번이고 숨을 몰아 쉬었다.
“괜찮나?”
“여기는 좁으니…. 공간 전체를 억눌러서…. 몸을 묶은 후…. 강제로…. 할 수 있을까?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면….”
또 무언가를 웅얼거리는 녀석.
“레지나.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네…. 괜찮아야죠. 네!”
녀석은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봤다.
정말 괜찮은 것 맞지?
***
그 뒤.
레지나와 다른 사교회에 참석하고, 무도회에 참석했다.
녀석은 내 옆에 붙어 제대로 파트너 행세를 했다.
“으, 음…. 저는 그래도 이시스 님께 충성하는 몸….”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이 이야기는 이쯤 하죠.”
“허어…. 그렇게 급히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좀 더 대화를….”
“아뇨. 저희가 이브님을 입에 담았는데, 그쪽에서 다른 황손분의 이름을, 그것도 울프람 황자님의 앞에서 담았다는 것은 그 절개와 지조를 나타낸 것이라 보겠습니다. 부디 충신으로서 그 뜻을 다 하시길.”
물론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많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브는 마법의 재능 외에 제대로 증명한 것이 없으니, 포섭이 쉬울 리가 없다.
허나.
“알겠습니다. 레지나 님께서 그렇게 충의를 다하는 분이라면, 믿을 수 있겠죠. 제가 가문을 잇는 날. 이브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맹세의 서약을 적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레지나의 당당해진 모습에 감화되어, 이브의 가신이 되겠다 말하는 학생들도 적게나마 있었다.
“오늘은 괜찮았는지요.”
“훌륭했다.”
“가, 감사합니다….”
레지나는 내 바로 옆에 달라붙어 호흡을 정돈했다.
이전에는 음침한 찐따면서 흉계만 세우는 녀석이었다면, 지금은 가끔 한 가문의 가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야 하나. 시엘라 가문은 더 커지겠군 그래.
오늘의 연회에서 포섭해야 할 사람에게는 전부 말을 걸었고, 시간이 조금 남았다.
레지나는 발코니에서 바람을 쐬고 있고, 나는 잠시 이세계에 들어가 이브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되었다.”
“뭐가 그렇게 되었다…. 인지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알겠어요. 레지나 시엘라가 당당해졌다. 나쁘지 않네요. 아니 이런 표현은 좀 그래요. 무척이나 좋아졌네요.”
“하지만 그만큼 다른 가문의 녀석들을 포섭하지 못했다 볼 수 있다만?”
“어차피 다른 황손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간을 보려는 녀석보단, 레지나 시엘라가 거물이 되는 게 더 커요.”
“…….”
이브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 이게 이 녀석 입에서 나온 말이 맞지?
“왜 그렇게 봐요?”
“너는 레지나를 저평가…. 무시하던 것 아니었나?”
“그랬죠. 지금까지도 그랬어요.”
맞다.
이브는 레지나 시엘라의 재능을 부정했다.
레지나는 이브의 재능에 질투하면서 발버둥치고 괴로워했다.
단 1. 그녀와 레지나를 나누는 마력의 차이.
이브를 이기는 것이 레지나 루트의 엔딩이라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이브는 언제나 그녀를 ᄁᆞᆯ보고 무시하는 태산. 그리고 철벽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평가가 올랐구나.”
“그야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비열하고 쪼잔하게 굴면 화가 안 나겠어요?”
“재능을 무시하는게 아니었나?”
“재능은 있어요. 그 발현이 속이 좁고 뒤틀려있어서 그런거죠”
그 말에는 또 반박을 못하겠네.
“그런가.”
“그렇다.”
내 말을 따라한 녀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브가 혀를 빼꼼 내밀고는 이내 히죽 웃었다. 뭐야 이건. 내가 뭐라고 하기에 앞서, 이브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 뒤로 포섭은 안 해도 괜찮아요. 레지나가 성장했다면 그 이상의 손패는 없어요.”
“알겠다. 그리 전하도록 하지. 그나저나 네가 그 레지나를 그리 높게 평가하다니…. 하.”
“똑바로 말할테니 똑똑히 들어요.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레지나는 크게 될 대마법사에요. 그 마력을 가지고 비열하고 음흉하게 구는 건 제국 전체의 손실이에요. 그러니까 무시했던 거라고요. 알았어요?”
“알았다. 아주 잘 알았다.”
“왜 그렇게 웃어요?!”
음.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그야 웃을 수 밖에 없지.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사건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지 않는걸.
“알겠다. 그러면 나가보도록 하지.”
“네. 레지나가 흔들리지 않게 잘 잡아줘요.”
“…….”
그런 부탁까지 할 줄이야.
학생회장은 학생회장인가, 이번만큼은 비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세계에서 나왔다.
***
그리고 레지나가 혼자 있을 발코니를 향했다.
내가 그런 류의 소설이나 작품을 많이 접한 건 아니지만, 꼭 이럴 때는 발코니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더라고.
“가을바람이 춥다. 혼자 있을 곳은 아닌 듯 하다만.”
“어머…. 네. 그렇네요. 조금 쌀쌀한걸요.”
녀석은 그리 말하고 방긋 웃었다. 어쩔 수 없지.
퀵 크리에이트 인벤토리에서 녀석의 어깨를 감쌀만한 외투를 하나 제조해 건넸다.
“걸쳐라. 찬 바람에 노출되어 몸이 상해서야 쓰겠나.”
“감사합니다.”
우리는 잠시 나란히 섰다.
“이브가 말하더군, 이 촌극은 슬슬 끝내도 된다고 말이다.”
“촌극….”
“다른 귀족가 자녀들을 포섭하는 일 말이다.”
“아, 그, 그렇군요. 갑작스럽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브의 감상을 전해주자, 녀석은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휘청거렸다.
“그, 그런가요. 제가…. 편협하고 졸…졸렬…?”
“음…. 이건 어디까지나 이브가 그리 생각했다는 거다.”
“황자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건가요?”
아니 그렇게 직구로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니.
파티원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싫어 눈을 돌렸고, 이내 레지나의 눈이 죽어갔다.
“그렇…군요. 두 분 다 저를 그렇게 생각하셨다는 거군요….”
“음. 그러니까….”
안돼.
이대로 가면 장미꽃밭 칼찌레지나가 부활해버린다.
내가 말을 피하자, 녀석이 이내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 레지나가, 웃어?
“알고 있답니다. 음…. 제가 소심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사실도…. 조금…. 네. 질투 많고 귀찮고, 다른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고, 고집이 강하다는 사실도…. 결국 겁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답니다.”
레지나는 어둠을 응시하며, 내게 어깨를 기대왔다.
“그랬나.”
“하지만 이건 천성이라 쉽게 나을 것 같진 않네요. 앞으로도 계속 흔들리고 질투하고, 속이 좁은 상태로 오해하면서 살아가겠죠.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니까요.”
멋진 말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 이대로 살겠다는 말 아닌가요 이거.
“그 때마다 황자님께서 저를 질타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크게 엇나가지는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평생 네 뒷바라지를 하라는 이야기인가?”
“어머…. 그래 주시겠어요?”
레지나는 방긋 웃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대체 왜 이러지? 아무리 그래도 평소와 너무 크게 다른데.
내 의문에 답을 가져다 준 건 바람이었다.
레지나쪽에서 내쪽으로 불어온 바람에 묻어있는 희미한 알콜의 향.
“술을 마셨나.”
“네. 저는 속이 좁고 편협해서, 저를 에스코트 해주시는 분이 안 계시니 홧김에 술을 마셔버리지 않나, 그 와중에 취기에 의존해 그 분을 귀찮게 하는…. 아주 귀찮은 여자랍니다. 그리고 진심도 술에 의지해 전할 수 밖에 없는 겁쟁이죠.”
“진심?”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두어 번 큰 숨을 쉬어 호흡을 정돈하고, 입을 열었다.
“울프람 황자님. 저희가 이전 약혼 관계였던 사실, 그리고 가문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던 사실. 거기에서부터 저희의 길이 엇갈렸던 사실. 이제와서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죠. 저희는 다시 만났고, 새로이 파티를 짰고, 이렇게나 신뢰를 쌓았습니다.”
“그랬다. 나도 너를 신뢰하고 있다.”
“그러니, 이 레지나 시엘라. 장로 가문 시엘라의 가주로서, 제프린 막내 황자 울프람 폰 로엔그린 님께 요청 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뭐든 말하도록. 이 울프람 폰 로엔그린이 듣겠다.”
“시엘라 가문의 가주는 현재 미혼. 허나 장로가문의 가주가 미혼이라는 것은 제국에 불안을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주먹을 꽉 쥔 채.
식은땀을 흘리며, 흔들리는 눈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녀석이 말했다.
“염치 불구하고 과거를 잊고, 새로이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와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