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873)
873. Ready To
아침부터 눈 위가 번쩍거린다.
번개가 친다거나 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진짜 번쩍거리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바로 메세지창의 숫자가 올라가고 있다는 이야기.
원래라면 밤에는 잘 안 보내는 녀석들인데….
메시지를 슥 내려보니, 아일라와 이브를 제외한 4명이 주르륵 무언가를 보내고 있다.
‘선배님. 제가 알아본 가게가 있는데요….’ ‘앗 선배님.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레드베어의 고기가 맛있다고 합니다!’ ‘울프람. 매운 요리의 정수를 가르쳐다오. 함께 요리하는 건 어떻지?’ ‘황자님. 제가 제프린 중앙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다 그렇다 치고 레지나는 뭔 군대 후임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부산 풀코스니?
아무튼 골렘을 처리했으니 네 명과 하루씩 보낸다는 약속은 지킬거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경쟁심리인지…. 그도 아니면…. 하.
“이런 아저씨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 전생 나이대여도 너희같은 애들이랑 사귀면 잡혀들어갔다. 얘들아….
뭐 겉으로는 십 대의 몸이니까, 어쩔 수 없다곤 생각하지만 내 마지막 마음의 저항이라는 게 있고 말이다….
“아니. 다 변명인가.”
“뭐가 변명이에요?”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메세지가 아니라, 이 이른 아침에 편의점을 찾아오는 녀석이 있다고?
대충 몸을 단장하고 옷을 챙겨입고 사무실 문을 열자 테이블에 우아하게 앉아 티타임을 즐기는 녀석이 있었다.
상품을 빼서 먹은 건 아니고, 자기가 가져온 티 세트를 끓여서 마시고 있다.
본인도 불속성 마력을 가지고 있고, 땅속성도 가지고 있으니 물만 있으면 뚝딱이긴 하지.
하지만 손님.
구매하지 않은 상품은 점내에서 취식하시면 안 돼요.
“아일라 그 차는….”
“아. 지난번에 여기서 샀던 거에요. 울프람이 차를 고르는 센스는 정말 좋네요.”
그러면 드셔도 어쩔 수 없죠.
아무튼. 녀석의 옆에 가 자리에 앉고는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힘든 일이라도 있었나요?”
“갑작스럽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울프람이 그렇게 깊게 몸을 기대고 있다는 건, 지쳤다는 표현이잖아요?”
“…….”
그런 표현도 있었나.
아니, 심리적으로 지치긴 했지만 그걸 알아본 너는 대체….
“말해줄 수 없는 일인가요?”
“음….”
투명한 자색의 눈동자에 염려를 담아 나를 바라본다.
여기서 말하기엔 좀 애매한 주제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에게 다른 여자애들 연애 상담을 할 수는 없잖냐.
아니.
생각해보니 아일라만 그 네 명이 내게 고백한 걸 모르는 건가?
“뭐.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머릿속에서 잊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나서서 해결한다. 그렇다면…. 이번 문제는 어느 쪽도 아니라는 거죠?”
“날카롭구나.”
“으음. 그렇네요. 울프람이 최근에 해결할 수 없는 거라….”
이내 아일라는 아하, 하고는 나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뭘 납득했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울프람. 오늘 일정이 있나요?”
“없다. 완전히 텅 비었구나.”
파티원 네 명중 한 명을 골라서 데이트를 해도 되겠지만, 그렇게 대략적인 감정과 일정으로 만나는 것도 좀 그렇다.
“그러면 일단 나가요!”
“어딜 말이지?”
“글쎄요.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리 말하고 녀석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뭐.
방 안에서 혼자 끙끙 앓는 거보다야 한참 낫다.
“그래. 어딜 가든, 가도록 하지.”
“네!”
아일라는 그리 말하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망설일 때 나를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
정말, 좋은 녀석이다.
***
그렇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머나 놀랍게도 제프린 중앙구였습니다.
8지역의 연인들의 거리도 아니고 중앙구를 대놓고 걷자는 건 또 처음이라 살짝 당황했다.
“오늘 중앙구에서 뭔가 일이 있었나?”
“없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생각날수도 있잖아요?”
“음.”
그리 말하고 아일라는 제일 처음 제프린 학생회 본부를 향했다.
시간상 이브는 이세계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기 때문에 건물에는 일반 학생들만 있는 상태.
“어머. 아일라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내고 있나요?”
그리 말하고 접수대 학생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녀석.
이렇게 붙임성이…. 아니 원래 인싸긴 했지만, 아일라 토벌대는 학생회 중심으로 짜이니까, 이렇게 보는 건 또 신기하네.
“후후. 잘 지내고 있답니다. 전에 가져다 주신 디퓨저 정말 좋았어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서부 특제 디퓨저랍니다. 학생회 전원이 쓸 올해 분 재고는 있을 테니까 편하게 사용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신변잡기를 하고, 이내 내 손을 잡아 끌고는 학생회 지하를 향했다.
잠깐 기다려.
이 시간에는 분명….
“삐약이. 잘 있었나요?”
“울프람 선배님! 아, 아일라 선배님…?”
내 얼굴을 보고는 반색하고, 아일라를 보고는 살짝 당황하는 밀푀유.
카운터 석에서 재고 서류를 검사하던 밀푀유를 놀래킨 아일라는 인사만 하고는 시선도 주지 않고 나를 이끌었다.
“그럼 우리는 물품 좀 보고 있을게요. 삐약이. 힘내요.”
“네, 네….”
팔짱을 끼고, 편의점 2호점의 물품을 둘러보는 아일라.
1호점에 비해 고급스러운 물품이 많다.
거기에 학생회 임원진들과 이 곳을 자주 들리는 귀족 영애들의 취향도 반영되어, 편의점이라기 보다는 영리브 올 같은 뷰티샵으로 조금씩 변질되는 느낌이다.
한쪽에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초콜릿을 포함한 간식들, 다른 한 쪽에는 귀여운 팬시나 문구, 그리고 화장품이라…. 밀푀유가 직접 고안한 편의점은 이런 식으로 가는구나.
거기에 빼놓지 않고 동부산 유제품으로 가득 찬 특산물 코너가 있는 걸 보면 정말 빠짐 없이 설계했다.
이거라면 한 지방의 편의점을 맡겨도 되겠어.
“울프람. 이거 어떤가요. 발색이 이뻐요.”
“그런가. 음…. 미안하구나 나는 화장품은 잘 몰라서 말이다.”
“자. 보세요.”
샘플 여러 개를 꺼내 손등에 발라 제각기 다른 발색을 보여주는 아일라.
녀석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거기서 이어진 손등이 내 눈 바로 앞에 놓였다.
“이건 지금 제 피부색보단 조금 밝죠? 그리고 이건….”
“음. 그런가…. 미안하구나, 모르다 보니 적확한 조언을 할 수 없다.”
“적확한 조언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음?”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는 거죠. 저는 순수하게, 울프람의 감상이 듣고 싶어요.”
“…….”
내 감상이라.
“다 예쁘구나, 전부 다 어울려.”
“그, 그런가요? 하지만 취향이….”
“어줍잖게 내가 감평하는 것 보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네 손등에 놓인 모든 색이 아름답다.”
아일라는 순식간에 손을 빼서는 다른 손으로 숨겼다.
그러면 다른 쪽 손등이 보일 뿐인데 말이야.
“그, 그러니까 그건…. 제 손등 전체가…. 아무것도 안 발라도 괜찮다는 건가요?”
“나는 모든 색이 아름답다 했다.”
“그, 그렇군요. 으흠…. 그렇구나. 알았어요.”
무엇에 그리 크게 만족했는지 만면에 미소를 띄고, 화장품 전체를 들고선 계산했다.
음.
아일라의 기분은 풀렸지만, 계산을 하면서도 이쪽을 바라보는 밀푀유의 시선이 무섭다.
***
그 뒤로 향한 곳은, 제프린에서 매운 요리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난 노점이었다.
그 곳에서 매운 고기 꼬치를 두 개 사서, 아일라와 나란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음…. 역시 맵네요. 에헤.”
“그렇구나.”
나한테는 그냥 평범한 맛이다.
우동튀김컵라면을 맵다고 하는 외국인을 보는 느낌이 이럴까.
녀석은 진짜 매운지 혀를 빼꼼 내밀었고,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요거트를 하나 꺼냈다.
허공에서 요거트가 담긴 병을 내려놓자마자 흑수정의 테이블이 만들어졌고, 컵이 두 개 놓였다.
아일라는 중거리 전투형 배틀메이지. 발동속도야말로 최고의 미덕이다만, 이렇게 문양까지 새긴 다과 세트를 초 단위로 만들어내는 건 진짜 천부적인 재능이라고밖에 말 할 수 없다.
아무튼 녀석이 요거트를 먹고, 혀는 돌아갔지만 손으로 얼굴을 부치기 시작했다.
녀석 하고는.
“울프람?”
“잠깐 기다려라. 가만히 있도록.”
“네, 네….”
인벤토리에서 손수건을 꺼내 녀석의 얼굴을 콕콕 찍어서 닦아줬다.
뭐라더라, 화장했을 때 비비듯 닦지 말라던가…. 아무튼 이마에 송글 맺힌 땀을 다 닦아내자 녀석이 방긋 웃었다.
“고마워요.”
“그러고보니 왜 갑자기 매운걸 먹으려고 한 거지, 식성과 안 맞지 않나?”
“아…. 그건요. 글쎄요. 왜일까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르죠?”
무슨 소리야. 그건.
아일라가 던진 스무고개를 풀려고 하는 그 때.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울프람…. 아일라?”
“어머. 루디카. 오래간만이에요.”
“그렇구나…. 여기는 무슨 일로?”
품 안 가득 매운꼬치가 담긴 봉투를 들고, 이쪽과 마주친 루디카가 그 곳에 있었다.
“울프람이 매운걸 좋아하니까요. 함께 와 봤답니다.”
“그렇군…. 여기도 좋은 가게긴 하지.”
“루디카도 아침 식사를 하러 왔나요?”
“응? 응…. 그렇다.”
“그래요. 좋은 식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자. 울프람. 가요.”
이쪽을 멍하니 보고 있는 루디카를 뒤로 하고, 아일라는 내 손을 붙잡고는 중앙구를 다시 걸었다.
***
그 다음은 원정조 지휘실이었다.
네프티는 없었고, 아일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중앙구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마법 1학부 학생들이 즐긴다는 조금 고급진 거리.
거기에서도 쥬얼리 샵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보석에도 흥미가 있었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네요. 저는 서부 출신이라고요? 광석이나 보석은 제가 전문이죠.”
“말을 잘못 골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세공된 보석에 흥미가 있었나?”
“물론 광산에서 채굴해서 그 자리에서 정련해서 내놓은 야생적인 보석들을 더 좋아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아름답게 갈고 닦아서 귀하게 전시된 애들도 좋아한답니다?”
“그거 몰랐군. 미안하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아일라는 에헴. 용서하겠습니다. 하고는 잰체했다.
“대신 제게 어울리는 보석을 골라주면 용서해줄게요.”
“음….”
“아 맞다. 방금 전처럼 다 어울린다. 이건 금지에요. 알았죠?”
이런.
이러면 진짜 골라야 하지 않나.
하지만 화장품과 다르게, 보석은 나도 조금 조예가 있다.
29세 편의점 알바 이영진이 아니라,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너무나 많은 보석을 봤으니 말이다.
그리고.
“모두 꽝이다. 이 안에서 네게 어울리는 건 없다.”
“그, 그런가요?”
“보석에도 품질과 격이 있다. 이 안에 있는 보석들은 겉면만 아름다울 뿐 그 내실을 다 채우지 못했다. 네게는 안 어울린다.”
“그렇…군요.”
직원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그렇다.
거기에 직원의 눈이 날카로워지는걸 보니, 여기서 더 험담하면 완전 진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건 어떻지?”
인벤토리에 있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다이아몬드 계열 보석은 기본적으로 ‘방어’를 상징하기 때문에 경장비 마법계를 걷는 아일라에게 잘 맞기도 하고 말이야.
내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목걸이를 점원이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인정이지. 제가 인정합니다. 이번만입니다.’ 라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 목걸이를 채워 주시겠어요?”
“음…. 여기서 말인가?”
“네.”
어쩔 수 없지.
녀석이 반 바퀴 돌았고, 내가 뒤에서 끌어안듯 목걸이를 끼워주려던 그 때.
“점내에서 그런 파렴치한 짓은 금지랍니다. 두 분.”
“어머. 레지나 시엘라.”
“여기는 제프린의 중앙구에요. 그런 건…. 여기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디서 하면 되나요? 후후.”
“그, 그건….”
아일라가 방긋 웃고는 한 발, 레지나에게 다가갔다.
등 뒤로도 느껴지는 거대한 압박감. 이건 마력이 아니라 기세다.
“레지나 시엘라? 울프람과 저는 단 둘이서, 어디서 이런 예물을 주고 받으면 되는 거죠?”
“윽…. 으윽. 그러니까….”
레지나가 반 걸음 물러서고, 시선을 피하려는 그 순간, 아일라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농담이에요. 너무 짓궃었죠?”
“아일라, 트라이스타….”
아일라는 슥, 레지나의 옆으로 지나갔고, 그 사이 입술이 들썩였다.
마력으로 전달해 내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그 입모양으로 추측해보자면….
‘저를 …놓고 레이스… 하…건 용…못해요.’
인가? 무슨 의미지?
내 추리를 방해하듯 아일라는 내 손을 잡고 쥬얼리 샵을 나왔다.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레지나를 뒤로 하고, 다시 중앙구로 나왔다.
그 날.
영문 모르게 파티원 전원과 만난 하루의 마지막.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쑥 아일라가 중얼거렸다.
“자. 그러면 이제 진짜 시작인가요.”
“아일라?”
“아니에요. 자. 가요. 울프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