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916)
916. 성왕국
겨울 방학.
이번에는 파티끼리 모험을 떠나거나, 이전에 일정을 맞춰 본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내년부터 우리는 떨어져 지낼 것이고, 슬슬 이별 연습을 해도 될 것 같다. 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여. 지금 나는 혼자 있다. 메세지 창도 조용하다.
솔직히 매일 바빴다고 생각한다. 이만한 적막은 작년 겨울 이후로 처음이군.
제프린을 혼자 돌아다니고, 그러다 이졸데의 보석상에 갔었지 아마.
아무튼 백팩 하나를 챙기고, 교복대신 사복을 입었다.
겨울이니 추운 만큼 망토를 하나 걸치고, 제프린을 나선다.
사대 정령왕에게서 태초의 보석을 회수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8문에 대비해 보석의 사용법을 익혀줘야 한다.
허리춤에는 신화포식자 한 자루.
특별히 머리색과 눈색도 감췄다. 원래라면 황손의 이 두 가지 특성은 절대로 감출 수 없지만 내가 걷는 길이 황족의 길이 된다는 인정도 받았겠다. 이 정도의 자유는 허락되는 듯 싶다.
“떠나요?”
“음. 나갈 생각이다. 너는 어떻지?”
“저는 한 동안 서류 업무가 있어서요. 며칠 후에나 나갈 거 같네요.”
제프린 포탈 검문소 앞.
이미 학생들의 대다수는 빠져 나가서 한산한 이 곳에, 이브와 둘이 앉았다.
여기서 서로 티격태격 할 생각도 없으니, 황실 혈통을 제어했다.
이제 세 시간 동안 이브와 나는, 그럭저럭 대화가 통하는 상황이다.
“날이 춥구나. 감기 조심해라.”
“누가 할 말을…. 학생회실은 냉난방이 충분하거든요.”
“그렇구나. 그래도 추우니 조심해라.”
7문을 공략한 결과, 제프린의 기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니 한동안 추울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조심해요.”
“내 힘을 얕보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체력이 부족한 건 맞잖아요. 어딜 갈 건지 모르겠지만 감기 정도는 조심해요. 힘들면 언제든지 그 방으로 넘어오고요.”
“염려 고맙구나. 알겠다. 명심하지.”
다음 타임의 포털이 열린다.
이제 제프린을 떠날 시간이다.
이제 이 곳에 돌아오는 건 8문 공략의 며칠 전일 것이다.
갈 곳은 이미 정했다.
사실 전부터 정한 건 아니고, 어제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이브에게 한 장의 물건을 부탁했고, 녀석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준비해줬다.
“자요. 그렇게 바라던 거에요. 세상에…. 학생회장에게 날조를 부탁하다니, 진짜 무슨 생각이에요?”
“미안하구나. 실례했다.”
“이름은 이게 맞죠? 어떻게 읽는 거지…? 리엥…쑤인?”
“핫…. 나중에 돌아오면 읽는 법을 가르쳐주마.”
제프린 학생회장과 황실의 인장이 함께 찍힌 학생증에는 검은 머리에 갈색 눈을 한 인상 나쁜 청년이 있었다.
이영진이라는 이름이 적힌 그 학생증을 수납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저나 갑자기 자아찾기 여행이에요? 위조 신분까지 준비하고서는 말이에요.”
“하…. 그렇게 되겠구나. 뭐, 마지막 방학이다. 이런 고찰도 있어야지.”
허나, 공략이 끝나고 졸업식이 지나고….
누군가에게 대답을 하고.
그 뒤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면 혼자 돌아다닐 일도 없으리라.
“그럼 다녀오마.”
“네. 그럼 또 봐요.”
우리는 서로 반대편을 향해 걸었다.
***
동부로 가면 글루코나 사브레 영지가 있고, 서부는 당연히 트라이스타. 남부에는 그림자 마을이 있다.
간다고 하면 북부거나 아니면 동부다.
지방 전체를 손아귀에 틀어쥔 남부나 서부에 가면, 울프람같이 생긴 사람이 검은 머리에 갈색 눈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라는 기묘한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갈만한 곳이 북부인데…. 겨울에 미쳤다고 북부를 가고 싶지는 않다. 분명 철원보다 추울거야. 지금 나는 태초의 루비도 없다고, 꽁꽁 얼어버리고 말거라고.
그러니 동부다.
그것도 동부의 끝…. 글루코나 사브레 영지를 넘어서서 있는 곳.
솔직히 상상도 못 한 곳이었지만, 세계 전도를 펼친 그 순간, 아…. 여기 꼭 가보고 싶다. 라고 마음속에서 점차 커졌던 곳이 있다.
동부 성왕국.
대륙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로 발달한 그 땅에 가볼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지.
거기가 진짜 DLC의 땅일지도 모르잖아.
처음으로,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내 머릿속 정보에도 의존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다.
부디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며, 나는 마차역으로 몸을 옮겼다.
***
검을 한 자루. 그리고 망토와 한쪽 어깨에 걸친 배낭을 하나.
누가 봐도 생각이 짧은 신참 모험가.
그런 이가 동부 끝으로 향한다고 하니, 가는 길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걱정을 표해줬다.
“안녕하세요. 사브레 영지 검문소입니다. 신분 증명서를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제프린 3학년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음…. 출입장에는 지난 3년간 제프린에서 안 돌아오셨네요.”
“제프린에 입학할때는 수도에서 바로 포털을 탔습니다. 그리고 3년간 수련만 하다보니 귀향할 시점을 놓쳐서 말입니다.”
“하하, 열심히 수학하시는 학생이셨군요. 환영합니다. 마침 오늘 성왕국으로 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합류하시면 될 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사람 좋은 경비병은 그렇게 나를 통과시켜줬고, 이내 성왕국으로 향하는 이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성왕국.
성스러운 왕국이 아니라 성씨 왕조가 만들었다는 왕국이다.
RPG에서 흔히 나오는 ‘신비한 동방국가’ 그 자체.
나도 게임 내에서 성왕국은 캐릭터만 써봤지, 밝혀진 설정이 없어서 이 세계의 정보를 참조했다.
제프린에서도 굳이 가는 사람은 없고, 그 모든 문화가 비밀스럽다고 하는 곳.
무엇보다, 외지인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서 발음을 제대로 못 하면 눈치주고 바가지를 씌운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로컬이군 그래.
아무튼, 머릿속에서 정보를 갈무리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귀족의 마차였고, 지금은 황손 울프람이 아니라 위조 학생증을 가진 남자니까 걸어갈 것도 각오했는데 제프린의 학생이라고 하니 마차 탑승을 허락해줬다.
그래.
그렇게 마차에 앉아 맞은편을 보니.
“…….”
“…….”
애쉬 그레이색의 어깨까지 오는 웨이브 머리. 착 달라붙는 전통적인 동양 복장. 왼쪽 눈과 입술 아래의 점.
허리춤에 있는 권갑.
그녀는 나를 알아봤는지, 입을 쩍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
“머리색을…. 바꾸셨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세상에, 당신께서 존대까지…?”
“…….”
저쪽은 확실하게 눈치챘다.
오히려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파르르 떨며 이쪽을 바라봤다.
그래. 그래. DLC 1호의 추가 캐릭터. 직업은 파이터. 즉 【무도가】
한 때 울프람의 로열가드 후보였으며…. 지금은 졸업하고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한 여인.
성천화가 그 곳에 있었다.
***
거북하다.
성왕국으로 향하는 마차는 귀족이 아니라 왕족의 것이었으며, 내 앞에는 차기 성왕국 국왕 후보인 성천화가 앉아 있다.
울프람으로 치면…. 이졸데 크루엘과 함께 ‘옛 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나한테 책임 소재를 물은 수는 없고…. 이 녀석은 누구 한 명도 제대로 사귄 적 없지만 말이야.
약혼자인 아일라마저 쓰레기 취급했던 녀석이다. 대체 누구에게 마음을 줬겠나. 찐따마냥 살았겠지.
아무튼.
그렇다 한들 우리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건 아니다. 울프람은 이 녀석과 이졸데를 이간질했으며…. 이내 누구도 로열가드로 뽑지 않고 기대를 절망으로 바꾼 후 괴로워하는 걸 지켜봤다고 하니까.
아무튼…. 아무튼!
“잘 지냈나…. 성천화.”
“예. 잘 지냈습니다. 황자님께서도…. 참, 잘 지내…. 지내신 거 맞나요?”
“잘 지냈다.”
“그 머리색을 바꾸고, 혈혈단신으로 성왕국으로 향하시는데 잘 지내시는 것 맞습니까…?”
“음….”
“거기에 검문소에서 듣기를, 이영진이라는 이름의 학생이라고 하셨는데, 황실의 날인이 찍혀있는 정식 학생증이라 하였습니다. 위조 신분증에 가명까지…. 정말 잘 지낸 거 맞으시죠…?”
“맞다.”
“호, 혹여 저희 나라에 망명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다. 그저 여행이다….”
“그러니까, 제프린에서 한창 그 주가를 올리고, 이브 폰 로엔그린 황녀님의 주머니칼이라고 불리는 당신께서…. 겨울 방학 첫 행선지가…. 저희 성왕국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혹시 저희 성왕국을 협박하러 오거나…. 그도 아니면 거점으로 삼아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그도 아니면 도피나 망명이 아니라고…. 제가 믿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네 말이 다 옳거든? 진짜 반박 못 하겠는데.
“진짜 여행이다….”
“저희 나라를 핍박하지 말아주세요…. 작고 나약한 나라에요. 춥고 가난하지만…. 그래도 다들 웃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진짜 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네…. 그렇죠. 진짜 여행입니다. 알겠습니다….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제발….”
성천화는 양 손을 앞으로 모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진짜 여행이라고요….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 내려 반대쪽으로 달려가야 믿으려나….
***
결국 성천화는 끝까지 의심의 시선을 지우지 않았으나, 어쨌든 성왕국에 도착했다.
바로 왕성에 초대하겠다는 그 말을 무시하고 왕궁의 외각에서 전경을 살펴봤다.
뭐라고 해야 할까….
고대 동양…. 아니 중세 동양? 내 기억 속에 딱 박혀 있는 조선…. 이라고 해봐야 민속촌은 아닌데, 그렇다고 무협 드라마에서 나올 법 한 중국도 아니다.
묘하게 짬뽕된 듯 한 복식부터 시작해서 2층 이상 올라간 건물이 없다. 대부분이 목재다.
뭐, 내 산통을 깨는 건 없었다. ‘점소이! 여기 고르곤졸라 한 판 구워주게!’ ‘역시 미식을 아십니다! 중앙에서 들여온 최고급 치즈가 있습니다!’ 같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는 거다.
로컬 문화 대단하네.
아무튼…. 살아 움직이는 민속촌을 보는 느낌이라 꽤 유쾌하다. 흥미가 동해 제일 먼저 시장을 향했다. 원래 서민들 사는 모습이나, 풍습을 확인하려면 시장이 최고다.
“이 열매는 식용인가?”
“음…? 그렇다네. 이름은 소천과라고 하는데, 하나에 팔백 량일세.”
“량? 린도 받나?”
“그야 받지. 린으로 치면 천 린일세.”
하.
린으로 바꿨는데 더 비싸다 이건가.
점주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분명 흑발인데 얼굴선은 여전히 서양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여기도 유교파워가 살아있어서 어린놈이 대뜸 반말하니까 꼬왔던건지…. 그도 아니면 린을 쓰는거 보니 중앙에서 온 호구로 보인 건지.
“이 소천과는 사지 않겠다. 번창하게.”
“으…음. 제대로 발음할 줄 아는군. 이거 미안하게 됐어. 팔백 린만 주게.”
그리 말하며 남자는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뭐야.
진짜 발음 문제였어?
소천과를 제대로 발음하니까 사기를 안 친다고?
무섭다.
무시무시한 로컬 룰…!
팔백 린을 내고 소천과 하나를 씹었다.
중앙에서는 느끼지 못 했던, 사과와 석류를 반씩 합쳐놓은 듯 한 그 맛을 느끼며 거리를 걷는다.
“어차피 관광하러 온 것인데…. 어디. 숙소부터 잡아볼까.”
이런 동양풍 거리라면 분명 온천 딸린 여관도 하나쯤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걷고 있자니,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하게 나를 지정하고, 멈추지 않는 뜀박질.
“성천화…?”
“화, 황자…님. 아니 이영진 님. 숙소를 잡으셨습니까?”
“아니. 안 잡았다.”
“그, 그러면 저희 왕성….”
“왕성은 안 간다. 거기에 가면 감시의 시선이 따가울 것 같구나. 거기에 나는 지금 이영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렇군요. 왕성의 시선이 싫다…. 즉. 감시받기 싫은 일을….”
성천화는 혼자 긴장해 손을 덜덜 떨었다.
아 진짜.
“그렇게 의심할 필요 없다.”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묻지. 성왕국의 왕성에 숙식한다고 치면,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왕성에 잠입해서 어떤 일을 할 줄 알고?”
“앗.”
앗. 은 무슨.
감시하에 놔도 의심스럽고, 감시를 피해도 의심한다고? 장난하냐 진짜.
녀석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침묵을 지켰다.
“아무튼, 호의는 감사하지만, 나는 내 돈으로 숙소에 머물도록 하겠다. 근처에 온천이 있는 숙소가 있다면 추천해줬으면 좋겠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쭉 가면 괜찮은 숙소가 있습니다. 태성천이라고 부르는 온천 여관입니다.”
“그렇군. 고맙다.”
“그런데 량은 가지고 계십니까? 환전은 충분히 하셨는지요.”
아.
그러고 보니 여기는 독자적인 화폐를 쓰지 참.
“아니. 교환한 적 없다. 조금은 교환해두도록 할까. 환율이 어떻게 되지?”
“1린에 2량이 정가일겁니다.”
“…….”
그러니까.
음…. 그러니까.
팔백 린은, 천육백 량이라 이 말이지?
“…….”
“왜 그러십니까 황자님?”
“아니. 숙소 위치는 잘 들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물도록 할 테니, 내가 의심스럽거든 언제든…. 은 안 되고 가끔은 찾아 오도록.”
“아, 안내는 필요 없으십니까?”
“음. 잠시 갈 곳이 있다.”
로컬 룰은 좋다 이거야. 지방의 문화유산 중요하지.
하지만.
관광객을 등쳐먹은 노점상은 용서하지 못해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