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929)
929. 음험한 여자
인간의 힘으로는 몬스터를 이길 수 없다.
전사. 마법사. 도적과 궁수.
제각기 스스로의 무력을 갈고 닦아 외적에 맞서고, 그 결과 강자의 반열에 든다.
단언컨대 인간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
인간은 종의 번식이 무척이나 빠르다는 이점을 제외하면 무척이나 약한 종족이다.
이 세계에서 도구의 이점은 인간을 위한 특권이 아니다. 오크나 고블린같은 아종은 대장장이가 존재하고, 오우거나 트롤은 나무몽둥이나, 인간의 도구를 빼앗아 쓸 수 있다.
그때 인간의 부족한 스펙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2m조차 되지 못하는 키. 부족한 근력. 좋은 것은 지구력뿐이지만 오우거나 트롤같은 괴물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인간은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가 아니라, 부족하고 모자란 그저 중상위를 겨우 차지할 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외부의 힘을 빌리면 된다.
“아마 그런 이유로…. 다른 이들을 소환했을 거다. 천족의 축복으로 배고픔을 잊으려고 했듯, 어디로 통할지 모르는 문을 열어 소원을 빈 거겠지.”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인간은…. 약하지.”
인간 중에서도 초월에 도달해, 분명 상위 10명 안에는 들어갈 나와 루디카는 유적을 뒤로 했다.
사막 중앙에서 다시 야영 준비를 마치고 있자니, 루디카가 안절부절하는 것이 보였다.
“어디 불편한가? 다친 곳이라도 있나?”
“아니…. 이 반지 때문에….”
“천천히, 신중하게 고민해본다고 하지 않았나?”
“하, 하지만…. 이런 게 손 안에 있으면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건 또 그렇다.
루디카는 손아귀에서 반지를 꾹 쥐었다, 몇 번 돌려보기도 하면서 곤란한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뭣하면, 내가 끼워줄 수 있다.”
“으, 응?!”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 것 보다 내가 해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나.”
“아, 그, 그럴까…. 그래버릴까. 그래. 그래 버려야지.”
그리 말하고 루디카는 내게 반지를 넘기고, 이내 왼손을 내밀었다.
검지면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반지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선 모션 없이 반지 바로 앞에 약지가 다가왔다.
“…….”
“우, 울프람…. 이거 참 기, 긴장되네 하하…. 빨리….”
이런 곳에서 초월의 움직임을 쓰지 마라.
결국 손목을 낚아채서 어떻게든 검지에 끼워 넣으려 했지만, 루디카도 몇 번이고 내 홀드를 패링하며 기를 쓰고는 약지를 가져다댔다.
“안 끼워주는 수가 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검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고, 툭. 하고 깔끔하게 반지가 맞아 떨어졌다. 1T 장비인 만큼 당연히 자동 사이즈 조정이 된다.
그리고.
루디카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키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으, 으햐아아아?!”
“칫. 부작용인가, 빨리 빼도록.”
“아, 아냐…. 그, 그게 아니라. 히익…. 히이이?!”
“루디카. 어서….”
내가 손을 내미려는 그 순간, 루디카가 양 팔을 저었다.
“그, 그게 아냐. 그러니까. 힉…잇?! 우햐? 아, 흐으?!”
“…….”
“바, 바람이 피부에. 햐. 햐으…. 으, 으으으으.”
아 그렇군.
십수 년만에 감각을 느낀 걸테니, 그만큼 민감해져서 그런가.
“추위는 괜찮나? 약하다고 들었다만.”
“그건 괜찮아. 원래 추울 때는 약했어. 몸이 잘 안 움직이고, 심하게 추우면 아프니까…. 그, 그런데 바람이 너무 세다아….”
사막의 밤바람은, 특히 겨울의 바람은 지독할 정도로 춥다. 루디카의 신선하고 앳된 감각으로는 견디기 힘들겠지.
“반지를 뺄 건가?”
“아니. 조, 조금 더…. 느껴 볼래. 하하…. 신기하다, 이런 거 처음이야…. 아하. 아하하. 으햐?!”
루디카가 몸을 움찔 떠는 것을 반쯤 뜬 눈으로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감각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봉인한 거라 했지.”
“응. 마법이 아니라 주술. 그래서 디스펠계열 마법으로는 안 풀리는데…. 이 반지는 해주까지 한다고 하니까…. 으햐햐햣?!”
“즐거운 듯 하구나.”
“산들바람이면 웃으면서 맞았을텐데, 사막의 겨울 밤 바람은 진짜, 이히, 후하하하!”
루디카는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기쁘게 웃었다.
“그렇군. 그대로 버틸 수 있겠나?”
“응? 그러니까…. 아하. 조금 힘들 거 같은데?”
“그런가? 그러면 반지를 빼면….”
“하지만 빼긴 싫어. 울프람이 되찾아준 감각인 걸. 그걸 빼앗을 건 아니지?”
“그러면 어떻게 할 거지?”
“으음…. 이건 울프람이 가져다 준 거니까 울프람이 책임을 져 줘야겠는걸.”
그리 말하고 녀석은 팔을 쫙 펼쳤다.
마치.
어린 아이가 끌어안아 달라고 하는 얼굴. 그리고 그 자세.
“진심인가?”
“나는 울프람을 좋아한다고 했고, 언제나 진심이야. 그리고 세상에 이런 걸 부탁할 사람이 울프람밖에 더 있겠어?”
“어쩔 수 없구나.”
나는 녀석을 끌어 안았다.
십 몇 년 만에 굴레에서 벗어나 감각을 되찾은 녀석을 내칠 수는 없지 않나.
“울프람. 팔 근육이 딱딱해….”
“그런가.”
“그리고 따듯하고…. 좋다…. 바람이 안 춥네.”
“그거 잘 됐구나.”
“응….”
***
짧은 사막 여행을 마치고, 나는 제프린 중앙으로 넘어왔다.
황제를 알현할 이유도, 한창 황성에서 기싸움을 하고 있을 이브를 만날 이유도 없다.
실피아의 집에 들릴까 했지만, 다 큰 처녀의 집에 그냥 심심해서 놀러가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 황성 2구역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어머나…. 황자님. 이런 곳에서 뵙다니 실로 우연이네요.”
“입 출국 내역을 조사하고, 마력을 널리 퍼뜨려서 내 마력을 감지하자마자 마차를 타고 다가오는 우연은 참으로 신기하구나.”
“다 들켰나요?”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고 행동한 건 아니잖나.”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켰군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우아하게 웃는 여성.
금발과 적안이 매력적이며, 우아하다는 의미에서는 우리 파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귀족가의 영애.
레지나 시엘라.
“건강해보이는구나.”
“황자님께서 이 방학에 저를 안 찾으면 어떨까 고민하여 매일 수척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제 아일라만 남았군 그래.”
“어머…. 그렇다는 것은, 제가 아일라 트라이스타보다 먼저 만났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되겠군.”
“후후. 방금 그 말씀으로 가슴 속 아주 작은 응어리도 전부 녹아내렸습니다.”
아직도 아일라랑 서로 으르렁거리는건가. 그래도 적대보단 호승심에 가까운 것 같다.
“이번 방학에 무언가 소득은 있으셨습니까?”
“마음의 정리도, 여러 궁금증도 풀었다. 좋은 방학이구나.”
“그거 다행입니다. 자 오르시지요.”
레지나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라 녀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보니. 마차에 오르긴 했는데.
기사님. 이 마차 어디가는 거에요?
***
도착한 곳은 레지나의 저택…은 아니었고, 2구역 안쪽의 상점가였다.
상점가라고 말하니 저렴해보이지만, 정말 이 대륙에서도 손꼽을 고급품들만 취급하는 번화가.
그 안에서도 특출나게 거대한 6층짜리 건물 앞에 내려서 레지나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현대 한국의 백화점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고급진 시설. 내부를 둘러보니 뭐야 저거, 황금 항아리에…. 벽에도 보석이랑 금을 쳐발랐네.
“레지나 이 건물은….”
“어머. 벌써 눈치채셨나요. 역시나 황자님이십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사치품을 살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나같은 서민 출신 황자에게는 부가세만 봐도 덜덜 떨 거 같은 곳인데.
“어서오십시오. 오너.”
갑작스럽게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남성을 보고, 레지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오너. 라니….
이 백화점이 통째로, 네 건물이었건 거냐….
이후 3층까지 마법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에스컬레이터까지 완비되니 놀랍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3층 구석. 백화점 중앙과는 달리 인기척 없는 곳을 향하니, 한 명의 여성이 조용히 따라붙었고….
그녀의 얼굴을 보자 흠칫 손을 떨었다.
긴 흑발을 내리고, 메이드복을 입은 여성.
눈은 보라색이고, 살짝 내려온 눈썹이 얌전하고 정숙해 보였으나….
누가 봐도 아일라가 떠오르는 모습이다.
당연하지만 본인은 아니다. 아일라가 이런 짓을 하느니 그 날 초월을 꺼내들고 레지나와 일기토를 벌일 것이다.
아일라의 초월이 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말이야.
“오셨습니까. 오너.”
“안으로 들어갈 거야. 사람 물려.”
“네. 알겠습니다.”
아일라를 닮은 그녀가 물러나고, 레지나의 뒤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본론을 꺼냈다.
“방금 그 메이드는 뭐지?”
“네? 아하…. 후후. 역시 황자님도 닮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보는 눈이 있군요.”
“보는 눈이 있다니…. 그렇다면 정말, 아일라랑 닮았기 때문에?”
“네. 그 아일라 트라이스타가 메이드복을 입고,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즐기기 위한 대리만족이지요.”
우와….
진짜로…?
“그…렇군. 사람의 취미는 저마다 제각각이라고 하지. 나,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
있을까…?
“으, 으흠. 하지만 메이드복을 입히고 오너를 향한 예의만 가르쳤을 뿐, 괴롭히진 않았습니다! 거, 거기에 저 아이는 제가 없었으면 죽었을 아이니까….”
“그렇구나….”
“정식으로 직원으로 고용해서, 지금은 이곳의 점장 대리를 맡고 있는 아이입니다. 괴롭히지도 않고, 능력도 높게 사서 승진도 시켜줬습니다….”
레지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래도…. 처음에는 아일라랑 닮았으니까 ‘직원’으로 고용한 거잖아…?
뭐. 사연을 들어보니 레지나를 뭐라 욕하기도 애매했다.
버려진 서민 아이를 레지나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거뒀고, 그 능력을 높게 사서 가정교사를 붙였다고 한다.
저 아이는 그저 아일라와 닮았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빌미로 학대한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지…. 인간으로서….
“사실, 저 아이는 평생 황자님 앞에서 숨겨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그렇게 했어도 됐을텐데 말이지.
“하지만 그러니까…. 제가 황자님을 좋아한다고 고백 했는데…. 이런 걸 숨기고 있으면, 나중에 더 큰 경멸로 돌아 올 거 같아서….”
횡설수설하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알겠어. 네가 음험한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 음험…. 아니 그렇긴 한데….”
“괜찮다. 그런 음험함도 네 개성이니 말이다.”
내가 웃어버리자 녀석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분명 이건 모르는 설정이고, 음험하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켰다.
지켰…. 지킨 거라고 치자 아무튼.
“그 외에 더 숨기는 건 없겠지?”
“아, 그게…. 그림을 전시한게 있긴 한데….”
그림?
“위험한 그림인가?”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건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보여드릴게요…. 기다려 주세요.”
“음….”
잘 모르겠지만, 뭐 위험한 건 아니겠지.
레지나는 나를 좋아한다 했고, 나와 처음부터 다시 하고싶다 했다.
그리고 이 녀석은 한 번 꽂힌 것은 일직선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이다.
조금 서투르긴 해도 말이지.
즉.
벽 전체에 내 그림이라도 도배된건가.
에이 설마. 그럴리가 있겠어.
“알겠다. 네 전시회를 구경할 날을 기다리마.”
“네, 네! 꼭 기다려 주세요!”
아무리 레지나가 음험하다고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
그렇게 우리는 웃으며 다과를 들었다.
레지나의 눈은 붉게 끈적이며 빛났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