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940)
940. 매듭 하나
이후, 이브에게 탈탈 털리면서 정령 1학부를 어떻게 설계할건지 한참 머리를 맞대고, 초기 기획안이 나왔다.
애당초 제대로 된 커리큘럼을 짜는게 아니라, 세계수도 있고 외진곳에 자연도 풍부하고 교수진도 잔뜩 있으니 정령에 재능 있는 애들을 전과시켜서 제대로 키워 봅시다! 라고 방향이 정해졌었으니, 세부 계획이 어렵지는 않았다.
“거기에 제가 황제가 되면 싫어도 교수들이 따를 수 밖에 없을 거에요.”
“파벌에 속할 우수한 인재를 빼앗긴다고 교수들이 불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군.”
“그 파벌째로 손가락 한 번 튕기면 먼지로 만들어 줄 수 있답니다.”
무서운 계급주의 사회.
“이렇게 너와 함께 제프린에서 공동 작업을 할 줄은 몰랐다.”
“원정쪽 일은 같이 많이 했잖아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색지대의 영역이지 않았나, 이건…. 장차 제프린의 미래를 바꿀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삼스럽게.”
이브는 픽 웃고는 펜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곧 제국의 미래. 그 향방을 정하는 싸움이 시작될건데, 제프린의 미래 정도로 뭐 흔들릴게 있어요?”
“그 또한 그런가.”
황실 혈통의 저주를 어느정도 해소한 이후, 나와 이브의 관계는 극도로 완만하다.
생각해보면, 그 저주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을수도 있겠구나 싶다.
“정말 시시한 이야기다만, 이브 폰 로엔그린. 우리의 상호 혐오는 혈통의 저주에서 비롯된거지.”
“뭐, 그럴수도 있겠네요. 그런게 그게 왜요.”
“그렇다면…. 만약 그게 없었다면 우리가 꽤 편하게 지냈을거라 생각하나?”
“뭐 그런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꽤 진지한 이야기다.”
“음. 갑작스럽네요….”
진지하게 말하자, 이브 녀석도 이에 응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답을 기다렸고, 약 십 분 후. 으으음. 하면서 기묘한 소리를 내다가 푸하, 하더니 웃어버렸다.
“네. 아마 그랬을 거 같아요. 어떻게든 부정하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네요. 아마 저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을 거에요.”
“나도 너를 증오하지 않았겠지.”
“네. 그러니까…. 지금보다 좀 더 원만하고 평온한 관계로 남았겠죠.”
이브는 쓰게 웃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녀석의 말이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지 않는 미래라.”
“생각보다 재미있었을수도 있고, 시시했을수도 있죠.”
“음…. 그런가?”
“네. 다른 가정의 이야기를…. 몇 번 들은적이 있는데요. 서로 그리 친하지 않더라도, 뭐 욕까지는 안한다고 하더군요. 방의 불이나 꺼달라고 하거나, 물이나 떠달라고 하거나, 서로 눈을 흘기면서도 가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다고요.”
“나와 너도 그게 가능했을 거라고?”
“으, 으음…. 그러게요. 저도 딱히 실감은 안 나네요.”
우리는 서로 머릿속에서 묘한 공상을 그렸다.
그러니까,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고 정말 더럽게 기분 나쁜 생각이지만, 이브와 사이 좋은 유년기를 보내 지금에 도달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냈을지 말이다.
일단 뭐, 【울프람】이 아니라 【울프람이 된 이영진】 입장에서 생각하자고, 일단 내가 제프린 학생회장에서 쫓겨 나긴 했어도, 이브 녀석이 나를 완전히 내치진 않았을 거 같다.
이런 등신 새끼라도 옆에 두겠다고 한숨을 쉬고, 인간 개조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거기서부터 모든게 시작됐겠지.
나는 이브의 학생회를 도왔을 것이다. 서로 딱히 증오할 이유가 없으니, 우리는 그럭저럭 합이 잘 맞았을거다.
【울프람. 이 일좀 하세요.】
【오늘부터 당신은 무급으로 학생회 일을 돕습니다. 알겠어요? 급료? 당신이 이 제프린에 끼친 돈이, 해 먹은 예산이 얼마인지 알아요?】
【하. 그래도 일머리는 있네요. 좋아요. 그러면 어디…. 다른 일도 맡겨볼까요.】
흠.
사이가 썩 좋진 않지만, 그렇게 협업을 해냈겠지.
뭐 요컨데 ‘여기선 내 명령을 따르라고요!’ ‘네가 나한테 맞춰라!’ 같은…. 그런 콤비 있지 않나. 끝내는 ‘이번만 힘을 합치는거다!’ ‘내게 명령하지 마세요!’ 같은 소리를 하다가…. 옆에서 학생회 임원이 ‘이거 꽤 위험한 조합이 태어난걸지도 모르겠군요….’ 같은. 아서라 이게 무슨 망상이냐.
“그럴 일이 있을리가 없지.”
“네. 그럴리가 없죠.”
이브도 스스로의 망상을 접고 픽 웃어버렸다.
“거기에, 음.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끝까지 말해보세요.”
“음…. 뭐. 지금 이런 상황도, 관계도 썩 나쁜것만은 아니지 않나.”
“아하하.”
“그러니까, 말하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게요. 진짜 부끄러운 소리를 뻔ᄈᅠᆫ하게 하네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썩 나쁘지 않다. 지낼만 하다. 라고 말이죠.”
이브는 살짝 붉어진 볼을 긁적였고, 나도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일을 너무 많이했더니 둘 다 머리가 피곤한가보군, 차라도 내오지. 뭘 마시고 싶지?”
“달지 않은 차요.”
“알겠다. 간식은 단 것으로 준비해달라는 이야기지?”
이브는 입술을 쭉 내밀고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다, 이내 작게 끄덕였다.
하여간.
알기 쉬운 녀석이야.
***
마지막 원정을 5일 남긴 지금.
편의점에 앉아서 장비들을 계산하고 있었다.
“선배님. 확인하실 물품이 있나요?”
“음. 내가 가진 손패를 확인하고 있다.”
오늘 합류한 밀푀유는 그런 내 재고 정리를 돕고 있었다.
“손패. 전투 수단을 말씀하시는 거죠?”
“음. 우선 부활이 두 번…. 아니 세 번인가. 그리고 파티원들 중 누구 한 명이 죽었을 때 즉시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하나 있구나.”
“아….”
“왜 그러지?”
“죽을수도 있는 곳에 간다고…. 이제야 현실감이 느껴져서요.”
“그렇구나…. 내 예상이지만,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곳일 거다.”
“네?”
지난번에 연전을 도전하지 않았기에, 8문 내부 구조가 바뀌었을 확률이 높다. 아니 반드시 바뀌었을 거다.
“즉 그러니까….”
“초전부터 린디를 쓰러트리고, 그 다음 하르크를 때려눕힌다. 그렇게 편한 전개로 이어질거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네, 네?!”
“음? 아…. 말 실수가 있었군. 초대 황후님과 위대하신 선조님을 때려 죽이고 끝나지 않을거라는 거다.”
“아, 아으….”
아.
진짜.
황실혈통을 멋대로 제어할 수 있다보니 피휘보단 진심이 입에 착착 붙는다.
“진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나. 솔직히 말해 권력자의 혈통으로 태어난것도 좋고, 능력 있게 태어난 것도 좋지만…. 지금 당장은 수양딸을 300년간 이 인공섬에 쳐박아둔데 더불어, 영문은 모르겠지만 마계에서 살고 있는 둘이다. 존경심과 경외심에 적의를 흐트러트리면 안 된다.”
“아, 아아…. 그렇네요. 맞는 말씀이세요.”
“내가 허락할테니, 밀푀유. 너도 린디와 하르크의 이름을 입에 담아보겠나?”
“네, 네에에?!”
녀석이 황당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나는 마주보고 웃었다.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다시 손패의 확인을 이어나갔다.
틀림없이, 문 내부는 변했을거다.
어떻게 변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성격 더러운 린디가 맵을 그대로 내버려뒀을리가 없다.
그리고 마계 8문은 언제 들어가든 고정적으로 바뀌는 부분이 있다.
“그게 뭔가요?”
“내부와 외부의 시간선이 완전히 단절된다. 들어가는 순간 내부에서는 1년이, 밖에서는 하루가 된다.”
뭐. 이게 현실에서도 적용될지는 잘 모르겠다.
엘피라네처럼 ‘초월’에 의한게 아니라 게임 시스템에 의한 거니까.
그 어떤 게임도 최종보스전 돌입부터 시간이 흘러서 배드엔딩을 보게 만드는 경우는 없다.
캐릭터 육성이 부족해서 보스에게 박살나는 경우는 있어도, 시간제한으로 죽으면 욕 개쳐먹고 그날 버그픽스 들어가야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적으로 허용된 이야기.
그럼에도 나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8문 내부의 공략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외부와 단절된 시간선을 가질 거라고.
우리가 린디, 그리고 하르크에게 패배하지 않고, 쓰러트린다면…. 무조건 졸업식과 시간이 맞아 떨어질거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기대하고 있다고, 하르크 폰 로엔그린.
너도 시간 제한 때문에 우리가 물러나는걸 보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냐.
“선배님…. 눈이 조금 무서워요.”
“이거 놀라게 했구나, 겁 먹었나.”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음. 으음. 아닌게, 아니에요. 저 겁 먹었어요. 엄청 무서웠어요.”
“이거 곤란하군.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지?”
“일단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괜찮다고 다독여 주시면, 꽤 괜찮아 질 거 같은데….”
그리 말하고 힐끔 이쪽을 보는 녀석.
하여간.
지난번 고백 이후로, 가장 당차게 다가오는 녀석 답다.
바라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정시켜주자 녀석은 헤헤 하고 웃었다.
***
최근 사, 나흘간의 일정은 전부 제프린의 남은 일들을 매듭짓는데 썼다.
학부 정리, 편의점 정리. 손패 확인. 그 외에 많은 것들이 그랬다.
“밀푀유가 졸업하는 대로 2,3,4호점 전부 합쳐서 샤스타. 네게 맡기마.”
“미쳤구나. 내가 야행종인걸 알고서 맡기는 건가?”
“주간에는 아르바이트라도 고용해라. 대신 점장 월급이 모자라면 내가 채워 넣어 주마.”
“으, 음…. 그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구나. 거기에 수혈팩의 고정적 공급도 가능한가?”
그건 쉽지 않지만…. 어렵지도 않다.
“인간의 피가 아니어도 되나?”
“흡혈종이 인간의 피만 마신다는 건 편견이다.”
“알고 있다. 그러면 몬스터의 피는 어떻지?”
“너무 짐승냄새 나는건 좀 싫다. 인간들도 돼지 잡내같은건 싫어하지 않나. 같은 의미로 언데드도 싫다. 인간이나 엘프의 피를 선호하는 건 비위 측면이 강하거든.”
“그러면 늑대 피는 어떻지?”
“구리다.”
“알겠다. 나중에 몬스터 리스트를 가지고 올테니, 그 부분은 따로 협의하도록 하지.”
“음. 항상 감사한다. 울프람.”
그리 말하고 샤스타는 씩 웃었다.
“왜 웃지?”
“아니. 네가 가는 길에 항상 어둠의 안락함이 깃들길 바라마. 너는 좋은 고용주였다.”
그리 말하고 주먹을 내미는 녀석과 가볍게 부딪쳤다.
하나 또 정리가 끝났다.
그 다음.
꼭 이야기를 나누고, 작별하기 전에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 할 녀석이 있다.
자. 그럼 녀석을 찾으러 가 볼까.
제프린 중앙구 원정조 사무실에서 녀석의 행방을 묻고, 북부 망자의 평원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그대로 북쪽을 향했다.
망자의 평원은 이제 일반 학생들의 경험치 공급처가 되었다. 이 게임에 레벨 개념은 없지만 말이야.
그렇게 북부에서도 좀 더 올라가, 강한 언데드들이 즐비한 고원 중앙부에 도착했을 때.
“이야아아아아아압! 필! 살! 유즈나엘 스매셔어어어어!”
양 손으로 거대 방망이를 들고 호쾌하게 스켈톤의 머리로 홈런을 치는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와! 유즈나엘 대단해! 나보다 강한 거 아냐?”
“응. 이제는 탱커가 아니라 순수한 전사의 영역….”
바닐라와 요거트는 유즈나엘의 그런 호쾌한 싸움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에헤헤…. 이게 내 힘이야!”
그걸 또 좋다고 듣는 녀석.
하여간, 저 미소를 보면 미워할수가 없다.
“유즈나엘. 그리고 바닐라, 요거트. 재미있게 싸우고 있나 보구나.”
“착한 울프람! 오래간만이에요!”
“아, 선배님.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후배 세 명은 쫄래쫄래 내 옆으로 다가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잘 지냈다. 한 명씩 말 걸어도 된다. 어디 도망가는 거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곧 졸업하시잖아요. 이 제프린에서 만날 일도 없어지니까요.”
“네….”
“하지만 바닐라, 요거트. 너희들은 앞으로도 무기 의뢰. 그리고 엘프족 업무 관련으로 자주 만나지 않겠나.”
내 말에 멀뚱멀뚱 눈을 뜨던 두 녀석은 이내 한숨으로 답했다.
“그런 의미가 아닌데….”
“뭐. 울프람 선배님이니까요.”
그럼 무슨 의미지.
“저, 저는 울프람이 졸업해버리면 만날수가 없어요.”
“…….”
“울프람….”
촉촉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유즈나엘.
나는 녀석에게 해야 할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지난 싸움의 경과를 녀석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는 지금. 녀석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놔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털어놓지?
내가 너희 아버지를 죽여서 망자의 평원의 해골처럼 만들었단다…?
호쾌하게 쳐 날렸는데 마치 방금 전 네가 날린 해골마냥 날아가더구나…?
으, 으음….
이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