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960)
960. 낙원
끼이이이이익!
콰아아아아아앙!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드는 편의점 납품 트럭.
붕, 하고 몸이 떠오르는 느낌. 그리고 이어지는 견디기 힘든 충격.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이영진에서 울프람 폰 로엔그린이 되었다.
또각. 또각.
울프람 폰 로엔그린에게 파멸을 고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끝이다. 학생회장.”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뭐, 뭐가 그렇게 웃기지?!”
잠시 후에 찾아올 파멸에 필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다음 대. 학생회장…. 이브 폰 로엔그린. 교칙은 전부 알고 있나?”
“교칙?”
“그래…. 제프린 학생의 최소한의 권리는….”
그리고 살아남았다.
모든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당하고, 양대 상점에서 내 물건을 매입도 안해주지만, 일단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배가 너무 고파, 바닥을 한참 기어다니고 있을 때. 조우했다.
“이런 곳에 쓰러져 계시다니…. 괜찮으세요? 정신은 드세요?”
“너….”
아름다운 소녀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폭포수같이 흘러내리는 금발, 보석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신체.
하지만
절대로 다가가서는 안되는, 독이 든 장미.
대마도상인. 레지나 시엘라.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신경쓰지 않고 볼 일 보도록….”
“어머. 그런가요. 하지만…. 황자님의 배는 배고프다고 울고 있답니다?”
꼬르르륵 소리를 내는 내 배.
안 돼. 울지마. 그만둬.
“신경 쓰지 않아도 된….”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자. 제 손을 잡으세요.”
이 손에는 가시가 있다. 절대로 잡아선 안 된다.
안 되는데….
마주 쥔 그 손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
레지나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제프린 중앙구의 레지나의 저택이었다.
글래스트해임 기숙사가 아니라, 레지나 전용으로 준비된 집.
그 곳의 접객실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레지나? 그 레지나 시엘라라고? 녀석의 집에 왔다고? 세상에 차라리 입에 한약재를 물고 탕속에 뛰어드는 오리가 더 살 확률이 높겠다.
하지만.
“많이 굶으셨으면 과한 식사는 좋지 않을 거에요. 우선은 따듯한 스프로 몸을 녹이시죠. 황자님.”
“으, 음…. 그러도록 하지.”
레지나의 접객은 정말 아름다웠다.
자상함이 느껴지나, 과하지는 않다. 풍족하게 느껴지면서 부족한 부분은 전혀 없다.
따듯한 물이 미리 준비가 되어 있고 샤워가 끝나니 따듯하게 데운 수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프의 간은 조금 진했는데, 그 정도가 염분이 빠져나간 내 몸에 딱 맞아 떨어졌다.
그 뒤에 나온 간식들 또한 긴장감을 완화해주는 허브티와 함께 나왔다.
그런 와중, 레지나의 얼굴은 자상한 빛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게 내가 아는 그 미친년 레지나가 맞나 싶었다.
어떻게 된거야 슈퍼영진. 너의 데이터베이스는 다 거짓이었던 거냐. 에잇. 내가 해온 모두모여라 D/Z SAGA 팬 카페의 영구주딱 슈퍼영진. 너는 틀렸던 거냐.
아무튼.
나는 이세계에 떨어진지 얼마 안 됐지만…. 이브의 폭력에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야지.
“황자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고맙구나.”
“황송한 말씀입니다. 거두어주십시오.”
메이드 한 명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내가 아무리 황자라도 이건 너무 극진한 대접 아닌가.
내가 그 연유를 묻자, 메이드는 그저 입을 가리고 웃을 뿐이었다.
“농담도 짓궃으십니다.”
“…….”
아니. 진짜 모르는데요.
***
다시 상황을 정리하자.
나는 이영진이었고, 트럭에 치였고, 울프람이 되었고, 쫓겨났고, 굶었고, 레지나를 만났다.
그리고 녀석의 집에 끌려와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지금은 한 밤 중이다.
자야 하는데… 잠들어야 하는데, 어째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말 할 것도 없다.
“레지나 시엘라….”
대마도상인.
언제나 이브의 등 뒤에 가려져, 자신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표하던 녀석.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집착이 강한 성격도 자존감 낮은 모습도.
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축복 넘치는 재능을 얻고서도 이브라는 존재 앞에서 퇴색된다는 이유만으로 어마어마하게 찌질해졌다.
가지고 태어난게 없는 내가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었고, 그래서 관심도 없었다.
없었는데….
“음….”
밖에서 마력의 운영이 느껴진다. 어마어마한 마력량이다.
대충 옷을 챙겨입고 건물의 구석, 귀족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중앙.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일으키는 녀석이 있었다.
주변 모든 공간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듯 한 저 마력. 틀림 없다. 【늪】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늪을 컨트롤한다. 이미 공간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건만, 녀석의 늪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마력을 펼치는 그 방법이다. 힘을 내부로, 더 내부로. 작용하는 범위를 줄이고, 그 대신 밀도를 올린다. 저 안에서는 공기도, 존재도, 심지어 시간도 공간도 정지하고, 그 안에서 오직 레지나만이 자유로웠다.
허나, 레지나 시엘라의 늪은 기본적으로 초 광역 공격이다. 즉 저런 마력의 운영법은 레지나의 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 한 쪽 무릎을 꿇는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마력의 운용을 멈추지 않는다. 몇 번이고 넘어졌는지 무도복에는 흙먼지가 가득하고, 그 훈련에 피를 토한 적도 있는지 세탁했음에도 가슴께에 혈흔이 조금 보인다.
내가 알던 레지나 시엘라와는 완전히 다른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름답다.
살면서 처음.
레지나 시엘라라는 캐릭터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의 루트는 궁금하지도 않아서 스킵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더욱 더 깊게 파볼 걸 그랬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후….하아. 하아아아아아….”
이내, 완전히 ‘무’에 도달한 공간을 생성해낸 레지나는 한 발 앞에서 주저앉았다.
방금. 녀석은 인간을 넘어선 초월의 경지에 홀로 도달하려 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얼마나 고된 노력을 쌓았는지 알 수 있다. 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화, 황자님?! 보고 계셨나요?”
“미안하구나, 아름다운 마력의 파동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구경했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아, 이, 이런 옷으로…. 부끄럽네요.”
“아니다. 네가 노력하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미안하다. 나는 레지나 시엘라… 너를 오해하고 있었다.”
“어머, 오해라니…. 쿡쿡. 아뇨. 어떤 오해를 하셨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모든 오해는 대화로 풀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또한 맞다. 우리는…. 그래. ‘나’와 ‘레지나 시엘라’는 대화가 부족했던 것 같구나.”
“하지만 그 또한 괜찮답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잔뜩, 자주 대화할 기회가 있을테니까요.”
“아니. 아니다. 나도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지. 그렇지 않나. 내일이면 바로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
“어머나…. 후후. 그런 말씀을 하실 때 마다. 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마음이 드는지 아시나요?”
사랑스러워?
누가.
내가? 왜?
“사랑스럽다?”
“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락에 쳐박히더라도 그 눈은 빛을 잃지 않을 것이고, 설령 모든것이 파멸한다 하더라도…. 함께 있다면 서로를, 그리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실 거라는 확신. 그 모든것이 퍼져서….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진답니다.”
가정? 무슨 가정?
그러니까 가정하다가 아니라…. 집안을 이야기 하는거지?
“하지만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가족은 언제나 함께하는거니까요. 오래간만에 봬었더니 혼자 쓰러져 계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시나요?”
“…….”
“울 뻔 했다니까요. 무너져서, 쓰러져서 그대로 오열할 뻔 했답니다.”
“…….”
“그래도 이제 다시 만났으니 다 괜찮아요. 네…. 다 괜찮아진거에요. 사랑해요.”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
머리가 어지럽다.
그러니까…. 분명 울프람 폰 로엔그린의 약혼녀는 레지나가 아니다.
그런 재미있는 루트는 없다. 망할 황태자의 약혼녀는…. 반역의 마녀. 그러니까….
아일라 트라이스타다.
“내가, 너의 약혼자라는 이야기…인가?”
“네? 후후. 네. 맞답니다.”
“그러면…. 아니 이상해. 아일라….”
“아일라 양이요? 아아….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가 있었죠. 엄청 어렸을 때 일인데 기억하고 계시네요?”
“어렸을 때 일…?”
“네. 저와 황자님을 파혼시키고, 파혼이 되면 황자님은 다음에 아일라 양과 약혼한다….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엄청 스쳐지나가듯 나온 이야기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잠깐 그러면….
“나와 레지나. 너는 파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럼요. 아버님께 울면서 처음 떼를 썼답니다. 황자님과 헤어지기 싫었는걸요.”
“…….”
그래.
그렇구나….
나는, 아니 울프람은…. 레지나 시엘라와 약혼한 상태다.
당연하지만 이 게임은 순애를 표방하기에 그런 격렬한, 뺏고 빼앗는 사랑 이야기는 없다.
즉 내가 알던 세계선과,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동안 서로 일이 바빠, 만나지 못했지만…. 이제야 만났어요.”
“…….”
붉은 레지나의 눈이 투명하게 빛난다.
내가 알던 레지나와…. 아니 내가 알던 세계와 너무나 크게 변했다.
허나 그럼에도 내 뇌리에 깊게 박힌 것은, 방금 전 노력하던 레지나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도전하는 그 모습. 흘리는 땀. 실패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짓던 그 웃음까지.
“한 동안…. 잘 부탁하마.”
“네! 황자님!”
***
그 뒤. 레지나의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체력 증진에 힘쓰고, 오후에는 레지나의 업무를 도왔다.
레지나 시엘라의 업무는 참으로 다양했다.
제프린 학생회의 업무도 도우면서, 상인 협회와 회의도 있다. 귀족들의 다과회도 참여했다.
나는 레지나의 파트너로서 모든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중간에 이브와 마주할 때도 있었다.
이브.
레지나와 나의 대적이자, 그녀에게 절망을 심어준 이브.
허나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이브는 나와 레지나를 바라보고는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았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회의가 끝나고, 레지나와 나. 그리고 이브만이 남아 잠시 다과회를 가졌다.
“레지나. 저런 남자는 그냥 차버리라니까요.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거에요?”
“후후. 이브? 그건 이브가 울프람님의 좋은 점을 아직 몰라서 그런거에요.”
“그런거 없다니까요. 지금까지 울프람이 얼마나 망나니였는지 알아요?”
“글쎄요. 모르겠네요. 거기에 중요한 건 지금부터 아닐까요?”
“하아…. 레지나아….”
“미안해요. 이브.”
아니. 뭔데.
왜 이브하고 레지나가 서로 말을 놓고 친하게 지내는 건데.
거기에 뭐라고 해야할까…. 이브가 레지나를 엄청나게 따르고, 레지나는 이브를 동생 보듯 보는 기분인데 이거…. 나는 친한 언니를 채가는 쓰레기 놈팽이를 보는 눈이고 말이야.
“이브. 레지나와 그렇게 친했나?”
“닥쳐요. 당신한테 해줄 대답은….”
“이브.”
“으….”
이브의 막말을 레지나가 가볍게 제지하자, 이브는 입을 닫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울프람…. 이제껏 레지나 언니…. 아니 레지나가 줄곧 도와준 걸 잊어버린거에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브는 나를 바라보고, 나도 이브를 노려봤다.
“서부의 광물 슬라임 사태를 해결한 것도, 제프린의 식사 제반을 해결한 것도…. 전부…. 레지나가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
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