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at the Academy Convenience Store RAW novel - Chapter (971)
971. IF…
실피아 에버그린 그로브는 오래간만에 본가에 귀가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고루한 엘프 마을.
전통과 격식만이 세상 모든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세상이 뒤집히고 개변한지가 언젠데, 그걸 모르고 늦어버린 자들.
허나 이 생각은 그저 마음속에 묻어두고, 결코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자신과 집안은, 엄연히 말하자면 파벌이 다르다.
어머니를 필두로 주요 인물들은 이브님의 파벌로 포섭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이넬디아님과 이오님의 파벌이 남아있는 상황.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 어떤 원한을 언제 살지 모른다.
전통 예복으로 갈아입고, 포니테일로 묶었던 머리를 풀고, 미혼 엘프 여성 전통 장식을 꾸미고, 엘프의 명문가, 에버그린 그로브의 가주를 맡고 있는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아침이 시작된다.
이후 다른 어르신들께 문안인사 후. 조식을 들고, 매일 정해진 교육을 이수한다. 오늘은 서예와 다도라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방학기간동안 귀가만 하면 매번 하던 일이지만, 졸업하고 난 이후로는 독립하고 살아서 새삼스러웠다. 그럼에도 몸에 익은 교육은 어디 가지 않아서, 첫 날 강사에게 눈짓으로 주의를 받은것을 제외하면 완벽한 자세로 다시 수료했다.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여기서 한숨 소리를 내면 그 자리에서 예의범절 교육만 세 시간은 받아야 할 것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전부 펴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문 밖을 나섰다.
그래도 오늘 일과는 다 끝났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서 어제 읽던 책이나 마저 읽으면 된다. 그리 생각하고 마음이 조금 풀어질 찰나.
“아가씨.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네. 알겠어요.”
실피아 입장에서는 웬만한 마족보다 더 까다로운 인물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리로 들렸다.
***
“실피아. 강사에게 들었습니다. 수업은 그럭저럭 잘 따라가는 것 같더군요. 녹슬지 않아 다행입니다.”
“과찬이세요. 어머니.”
“하지만 하루라도 빠지면 이틀 어치의 교양이 사라지는 법. 어디서 생활하던 우리는 그 역사와 전통의 에버그린 그로브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네.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속으로 한숨이 나온다.
애당초 자신과 똑 닮은 얼굴. 차이가 있다면 예복이 조금 옛것이며, 머리장식이 미혼이 아니라 기혼자의 것이라는 차이 뿐.
그런데도 저 권위에서 나오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한참,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잔소리와 주의사항을 듣고나서야 가주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부른 것은 따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혼처 때문에 이리 부른 것입니다.”
“혼처라니…. 저에게는 너무 이릅니다. 거기에 저에게는 일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로열가드는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실피아.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
“어떤 남자가 좋을지는 여기 명단이 있습니다. 전부 좋은 남자에, 집안도 더할나위 없어요. 저쪽에서도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자.”
그리 말하고 실피아 앞에 놓인 몇 장의 초상화.
흥미는 하나도 일지 않았지만, 대체 누가 자신에게 관심 씩이나 주는지 궁금해 그 명단을 본 결과, 강한 두통이 몰려옴을 느꼈다.
“이 분들은 전원…. 이넬디아님이나 이오님 파벌의 자제분 아닌가요.”
“어머. 그랬나요?”
“어머니. 대체…. 어머니께서는 이브님을 지지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머. 그런 정치적 논리를 제외하고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
실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다 엎어버릴까. 지금 여기서 엎어도 이브님께서는 사연을 듣고 나서 ‘뭐 어쩔 수 없네요.;’ 하고 참작해주시는 거 아닐까.
“아니면, 실피아. 혹시 마음속에 담아 둔 정인이 있나요?”
“네, 네?”
“후후. 있을리가 없죠. 당신처럼 일에 빠져사는 늦된 아이가….”
“이, 있습니다.”
“있다고요?”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
영문 모르고 그저 될대로 되라, 하며 내뱉은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네.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 둔 정인이 있습니다.”
“말 도 안돼요…. 누구죠?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실피아. 당신이요?”
평생 일에만 미쳐살던 딸이 ‘나 사실 만나는 남자 있어’ 라고 말하는걸 들은 엄마의 표정처럼, 가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나 실피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결심했다.
“네. 있습니다.”
“그, 그래요? 그러면 시급히 집으로 한 번 데려오시죠.”
“네?”
“유서 깊은 에버그린 그로브. 그 차기 가주의 짝이 될 남자입니다. 제가 보고 직접 판단하겠습니다.”
“저기, 그게….”
“아니면…. 혹여 거짓이었나요? 그렇죠. 역시 당신에게 그런 남자가 있을리가….”
“알겠습니다. 어머님께 반드시 소개시켜드리죠. 그러면 저는 그이에게 연락을 해야 하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실피아…? 실피아?”
실피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주실을 나섰다.
허리를 펴고, 어깨를 펴고…. 실로 당당한 발걸음이었다.
***
현재 공략중인 마계의 문을 꽤 남겨두고 곧 여름방학이 다가오는 이 시점.
제프린 밖에서 날아온 편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발신인도, 전달인도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발신인은 실피아 에버그린 그로브. 이미 졸업하고 사회로 떠난 나의 벗.
그리고 이 편지를 배송해준 전달인은 이브였다.
“실피아가 절대 내용물을 읽지 않고 그저 건네달라고 했어요.”
“음. 고생이 많…다? 이렇게 말하는게 옳은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무슨 내용인지 어서 읽어봐요. 궁금하네요.”
“순순히 배송해 준 것은 같이 읽기 위해서였는가…. 그럴 수는 없다. 실피아가 나 혼자 읽기 바랐다면 나도 의리를 지켜야지.”
“째째하긴.”
“배송료 대신 사탕을 준비했다. 가져가도록.”
“포도맛…있죠?”
“딸기와 사과. 오렌지도 있다.”
“하, 어쩔 수 없네요. 이걸로 용서해드리죠.”
그리 말하며 이브는 사탕통 하나를 들고 그대로 나갔다.
장차 황제가 될 녀석이 사탕 하나로 심부름을 하다니, 이 세계는 괜찮은건가.
실피아의 편지를 뜯어서 읽었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글씨다.
【삼가 울프람 폰 로엔그린 님께.
여름의 햇살이 강해지는 나날입니다. 건강에 유의하고 계신지요.
저는 지금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에 와 있습니다.
허나 이 고향에서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겨 한 번 존안을 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으신 날짜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뭔가 어마어마하게 귀찮을 거 같다.
녀석은 명예 파티원이지만 파티 메세지는 쓰지도 못한다. 하지만 위치변환 능력은 쓸 수 있으니까…. 어디 보자.
이브한테 가서 휴가증도 받고, 잠시 위치전환도 해서 대화도 나누면 되겠지.
그렇게 이브를 찾아갔고, 사탕 두 통을 바치는 것을 대가로 여름방학과 이어진 휴가증을 받을 수 있었고, 기꺼이 이브는 위치도 전환해줬다.
그리고.
“오랜만이군 실피아.”
“으, 응…. 오랜만이야. 울프람.”
“그래서 편지에 있는 고민 말이다만…. 어떤 일이 있었지?”
“어? 어…. 그 그게 말이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와 만나서 이야기 했으면 좋겠는데….”
“알겠다. 그러면 어디서 만나는게 편하지?”
“대륙 동북부에 숲이 하나 있어. 우리 가문의 영토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음…. 음 알겠다.”
“가급적 여름방학 초입에…. 빠르게 만나고 싶은데…. 될까?”
“가능하다. 반드시 찾아가도록 하지.”
“으, 응. 그러면 그때 봐.”
실피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대로 이브와 다시 자리를 바꿨다.
“그래서. 대체 무슨 대화를 그렇게 했어요?”
“모르겠다. 나도 제대로 들은게 아니라 말이다. 일단…. 녀석의 고향에 가봐야겠구나.”
“고향에?! 갑자기요?!”
“음. 그러면 다녀오마.”
“뭐에요. 실피아는 제 가신인데 왜 울프람이랑 단 둘이서만 비밀 이야기를…. 으으….”
“그렇게 화내지 마라. 사탕 두 통을 더 주마.”
“세 통.”
“그래. 알겠다.”
녀석은 사탕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국. 이런 녀석이 황제가 되어도 괜찮을까.
***
실피아의 고향에 도착했을 때. 바로 녀석의 집에 초대받는건가…. 하고 생각 했는데, 약속 장소는 바로 앞 인간들의 마을, 그 뒷골목이었다.
“여기야. 울프람. 이 아래로 내려가서 이야기하자.”
“음…. 알겠다.”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임? 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우리는 지하로, 더 지하로 내려갔고…. 이내 마법등 하나만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갔다.
“후우. 여기까지 왔으면 추적도, 미행도 없겠지. 우선 오느라 수고했어…. 정말 고마워.”
“아니. 네가 곤란하다는데 가만히 있을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하하…. 여전하네. 그러면 우선 짧게 현 상황을 설명할게.”
그리고 실피아가 말한 사건의 전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강제적인 혼약. 그것도 결과적으로 이브를 배신하는것으로 이어진다…. 라.
“집에서 나오는 길은?”
“그것도 생각해봤지만, 그랬다가는 나는 배경도 없이, 그저 정령을 조금 잘 쓸 뿐인 낭인이야. 나는 실피아지만, 동시에 실피아 에버그린 그로브니까..”
“그것도 그렇군. 이브라면 신경 안 쓰겠지만, 네가 어떤 의미에서 그리 말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면 네 말을 따르는게 옳겠군 그래, 하지만 내 위치상 너와 연애하는게 가능한가?”
“으, 음…. 미안하지만, 너는 약혼을 파혼하고…. 나와 완전히 사귀고 있다. 현재는 사회적 입지 차이 때문에 밝히지 못하고 있어…. 라고 인식하고 행동해줄래?”
“그건 나쁘지 않지만…. 어설프군. 뭔가 선물과 함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물건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으, 으음…. 엘프는 결혼할 때. 서로 뜻을 합쳐 귀한 나무를 구해 함께 가꿔가겠다고 맹세해.”
“세계수를 구해오라는 이야기인가?”
“아, 아니. 그건 너무 나갔어. 그런데 세계수가 있어? 어딨는지 알아?”
“대충 감은 온다. 하지만 당장 구하기에는 까다롭고…. 고귀한 나무라. 고귀한 나무….”
“당장 구하기에는 어렵지….”
인벤토리에 그 정도 레벨의 목재는 없다. 있어봐야 3티어 나무 하나정도.
“신향목이 하나 있긴 하다.”
“시, 신향목…?”
“음. 좋은 향이 나는 나무로, 요리에도 쓸 수 있다.”
“그, 그게 있다고? 아니…. 하지만 지금은 그거밖에 없나. 저기 울프람….”
“이 나무를 쓸 수 있는건가? 그러면 쓰도록 하지.”
“어, 응…. 그,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네. 자, 그럼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 전에 좀 꾸밀까? 기본적으로 잘 생겼으니까, 조금만 꾸미면 될 거야.”
“호오. 나를 잘 생겼다고 생각했나? 그거 고마운 착각이구나.”
“으, 응? 아니 뭐…. 잘생긴 편 아닌가…?”
정말,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군 그래.
아무튼, 실피아의 남자친구 역할이라….
연애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것도 어떻게 보면 ‘남자친구 역할’ 정도로 끝난거니까…. 가짜라고 생각하니 또 가슴이 쓰라리네.
“자. 다 꾸몄다. 응. 잘 생긴거 맞네.”
훅.
하고 실피아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앞에 다가왔다.
살짝 놀라 얼굴을 빼기 직전, 내 시야 전체가 녀석으로 물들었고, 그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은…. 그녀와 다르다.
‘불행한 나를 사랑하는 자신이 사랑스럽다.’ 라는 미쳐버린 감성을 가진 그 여자와는 다르다.
남자친구 역할이라고 해도, 그 무게감은 전혀 다르다. 이건 내가 바라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실피아가 나에게 그런 끔찍한 말을, 행동을 저지를리 없다.
그리 확신이 들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선물은 찻잎이면 되겠지. 그 외에는 과일 절임등은 어떻지?”
“아 좋네. 음. 그리고…. 이, 이렇게…. 이건 어때?”
“음? 음…. 그렇군. 연인이라면 팔짱도 끼는 법이지. 하지만 그건 너무 딱딱하게 굳지 않았나. 좀 더 무게를 내쪽으로 실어라.”
“아, 으…. 응. 이렇게?”
“그래. 잘 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
그것도 아주 잠깐인 연인 흉내지만, 실피아와 내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