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Demon doing house repairs RAW novel - Chapter 173
제173화. 장채원과 고은진의 한가한 휴일 (3)
고은진은 바쁜 주말을 보내야 했다.
그동안 미루었던 요리 공부도 해야 하고, 얼마 전 새로 얻었던 던전 재료 음식 조리법도 연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낡은 조리도구도 사러 가야 한다.
“으음.”
침대에서 뒤척이던 고은진이 낮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꿀꺽.”
눈을 뜨자마자 침대의 협탁에 올려놓은 약을 습관적으로 집어삼켰다.
이유 없는 가슴 통증과 극심한 불면증.
이것이 전 세계를 떠돌며 용병 일을 하던 고은진이 얻게 된 질환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그저 병원에서 ‘심인성질환 장애’라고 떠들며 약을 주지만, 시간이 갈수록 통증과 불면증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후우.”
통증이 사라지자 고은진은 깨끗이 씻고 주방으로 갔다.
오늘은 새로운 던전 식재료, ‘풍실늑대’의 조리법을 연구하는 날이었다.
“으음.”
재료를 손질하던 고은진이 눈썹을 찌푸렸다.
풍실늑대의 고기는 누린내가 심할 뿐만 아니라 고기가 쇠심줄보다 더 질기다.
시간을 들여 여러 가지 조리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딱히 마음에 드는 방법은 없었다.
“벌써 시간이.”
벽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재빨리 주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방을 메고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번화가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거리를 채운 사람들의 활기찬 미소와 평온한 풍경을 보니 고은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역시 평화가 좋지.”
오랫동안 민간군사기업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초연이 피어오르는 살벌한 전장에서 지내왔다.
그 때문인지 때때로 도심의 고즈넉한 풍경을 볼 때면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함께 격세지감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해묵은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형 서점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꾸벅.
경직된 동작으로 고개를 숙인 고은진은 익숙한 걸음으로 ‘요리’ 쪽의 코너를 뒤적거렸다.
꽂혀 있는 책을 연신 살피던 고은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던전 재료 책은 여전히 없나.”
아쉽게도 던전 식재료에 관한 요리책은 전 세계적으로도 발매된 것이 매우 적은 편이다.
온라인에서도 잘 검색이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대형 서점에 가서 직접 찾아봐야만 했다.
“오?”
서가 한켠에 책을 꺼낸 고은진이 활짝 미소 지었다.
“웬일로 이걸 다 갖다 놨지?”
우연찮게도 외국의 저명한 스타 셰프의 던전 식재료 요리책을 발견한 것이다
아쉽게도 인도 요리사였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요리들은 아니었지만… 재료 손질에 관해서는 꽤나 도움이 될 것이다.
“어.”
그런데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편 팬시점에 서 있는 미녀가 눈에 띄었다.
화사한 옷차림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반 묶음한 여성이 만년필을 들고 있었다. 장채원이었다.
‘사장님이잖아.’
책을 집어 든 고은진이 슬쩍 서가 뒤로 숨었다.
한참 뒤에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팬시점에 서 있던 장채원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휴우.”
고은진은 다시 서가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장채원은 태도는 언제나 친절한 편이었지만, 왠지 바깥에서 보자니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 것이다.
“은근 다가가기 어렵단 말이지.”
십전십미(十全十美).
TV에 나오는 아이돌 센터 뺨치는 빼어난 용모에 인테리어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거기다 대지유신뿐만 아니라 상계신 같은 거물과도 맞닿아 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흠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냥 작은 영지의 매장 주인인 줄 알았는데.”
가뜩이나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 고은진.
아름다운 외모에 완전무결해 보이는 듯한 장채원에게 조금은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야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만.”
고개를 가로저은 그녀는 다시 서가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점 곳곳을 뒤져가며 던전 재료 관련 요리책을 구입한 고은진은 밖으로 나왔다.
또르르르.
대로변 횡단보도에 서자 신호등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던 그녀는 문득 길 건너 위치한 커피숍을 바라보았다.
“응?”
커피숍 창가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늘여놓은 여성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장채원이었다.
“언제 저기로 가셨지.”
그런데 앉아 있는 장채원의 표정이 딱히 좋아 보이지 않는다.
턱을 괸 채 휴대폰만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채원은 마치 연인에게 바람을 맞은 듯 우울해 보였다.
“무슨 일 있나.”
띠링.
때마침 신호등에서 파란불이 켜지고, 고은진은 천천히 횡단보도를 걸어갔다.
점차 커피숍 유리창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앉아 있는 장채원의 눈빛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지루한 거구나.”
그제서야 고은진은 깨달았다.
턱을 괸 채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장채원의 얼굴에 따분함이 가득하다는 걸.
고은진이 서점에 있던 대략 한 시간 반쯤, 그동안 장채원은 커피숍에서 혼자 있었던 것 같았다.
“왜 혼자 있는 거지.”
용모를 보나 분위기를 보나, 엄청난 인싸감성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실제로는 외톨이였단 말인가?
“설마.”
아마도 잡았던 약속이 펑크 났을 것이다.
뭐 아니라고 해도 고은진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너무 늦었나. 좋은 물건 다 팔릴 수도 있는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고은진은 커피숍을 뒤로 한 채, 인근의 공원으로 뛰어갔다.
* * *
“득템, 특템이지 말입니다.”
두둑해진 배낭을 탁탁 두들긴 고은진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요계 플리마켓엔 의외로 요리에 관련된 도구나 책들을 파는 판매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고은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켓을 돌아다녔고, 쓸 만한 조리도구들도 저렴하게 구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인 건 플리마켓 구석 매대에 음침하게 앉아 있는 천마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빨리 써봐야지.”
신이 나서 걸어가던 고은진은 문득 골목 너머 길게 늘어진 줄을 발견했다.
이 근처에서 가장 유명 파스타 맛집, ‘봉타봉타’에 들어가기 위한 대기 행렬이었다.
“저기가 맛있긴 하지.”
요리 공부를 위해 시내의 맛집이란 맛집은 거의 다 돌아다닌 고은진이었다.
이미 봉타봉타도 가본 터였다.
“흥, 나도 언젠간 던전 음식점을 차릴 거다.”
열의를 불태우며 그곳을 지나치려던 그때,
“어라?”
대기 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끝자락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장채원이었다.
“저기 가시려는 건가.”
괜히 길모퉁이에 숨어든 그녀는 멀리서 장채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장채원은 줄을 설 생각은 하지 않고 부러운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줄을 서려고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뒤로 물러서길 반복하고 있었다.
‘아아.’
고은진은 비로소 장채원의 심정을 모두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지루함을 참지 못해 혼자 외출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저녁이 되자 맛집도 방문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연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맛집에 길게 늘어진 줄은 혼자서 기다리기엔 너무나 쓸쓸하니까.
‘으음.’
고은진 역시 오랜 시간 아웃사이더였다.
그리고 그녀도 과거, 장채원과 같은 망설임을 겪은 적이 있었다.
만약 요리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맛집에 혼자 들어가는 걸 어려워하고 있을지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고은진은 배낭을 메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선 줄을 향해 걸어갔다.
“어?”
돌아서는 장채원과 마주친 고은진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사장님?”
“은진 씨? 어쩐 일이에요?”
“여기 밥집이 유명하다고 해서 밥 먹으로 왔지 말임다.”
고은진이 코를 훔치며 씩 웃었다. 장채원의 시선이 자신의 등 뒤를 살피는 것을 느끼며.
“혼자서요?”
“혼자 오면 안 됩니까?”
순간 고은진은 장채원의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를 발견했다.
“그럼 같이 먹을까요?”
“저랑 말임까?”
“네에. 모처럼이니 제가 대접할게요.”
고은진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삼킨 채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땡큐지 말입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침내 자리를 배정받은 테이블에 맛있는 음식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장채원은 휴대폰을 꺼내 들어 얼른 사진을 찍었다.
“와아, 정말 여기 음식 먹고 싶었는데.”
사실은 두 번이나 방문한 곳이었지만, 고은진은 장채원의 감탄에 연신 맞장구를 쳐주었다.
“저도 굉장히 먹고 싶었지 말입니다.”
“아, 맞다. 은진 씨는 요리 좋아하니까 숨겨진 맛집을 잘 아시겠어요.”
영지 매장의 주인답게 세련되고 배려 가득한 화술이다.
장채원은 줄곧 고은진이 좋아할 만한 화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평소라면 조금은 불편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런 장채원의 배려가 그리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고은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똑같잖아.’
완벽무결해 보였던 장채원도 의외로 평범하다는 걸.
그저 저 맛있는 걸 좋아하고 수다를 좋아하는 여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척 나서길 잘했지 말입니다.’
고은진은 망설이는 장채원에게 다가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 장채원과 조금은 거리가 좁혀질 거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늘 주말에는 마룻바닥에 누워서 꿈틀대는 게 일인걸요.”
“사장님도 말입니까?”
장채원의 이야기를 듣던 고은진이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그것은 친근함에서 나온 최초의 웃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봉타봉타에서 나온 장채원.
그녀는 왠지 이대로 고은진을 보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진 씨. 모처럼인데 한잔하고 갈까요?”
고은진 역시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지 말입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이야기를 나누며 번화가의 골목으로 향했다.
터벅터벅.
그런데 맞은편 골목에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좁은 골목을 틀어막을 것만 같은 거구에 등에는 포대를 메고 있었고, 어깨에는 둥그런 나노봇을 올려두고 있었다.
바로 천마였다.
“점주?”
천마는 맞은편에 걸어오는 장채원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쩐 일인가.”
“아아, 은진 씨랑 만나서 저녁 먹었어.”
“그랬나.”
“이제 끝난 거야?”
꾀죄죄하고 피곤한 듯한 천마의 표정을 보자 장채원은 판매 결과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도 못 팔았지?”
“어떻게 알았나.”
천마는 울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폐장 시간에 다 되어 파격적으로 절반이나 할인했지만, 아무도 사지 않더군.”
“슬픈 일이네.”
“대체 왜 한 권도 못 팔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를 모른다는 게 문제 같은데.”
“그렇군. 너무 평범한 무공비급을 적은 건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천마의 눈이 번뜩였다.
“조금 더 패도적이고 살기가 짙은 무공비급을 팔았어야 했다.”
“아니, 충분히 살벌했어.”
장채원의 말을 귓등으로 날린 천마가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다음엔 한 방울의 독으로 천 명을 암살할 수 있는 천왕지독(天王之毒)이나, 벽력천붕폭린탄(霹靂天崩爆燐彈)의 제조법이 적힌 비급을 팔아야겠다.”
“팔지 마.”
천마가 쉴 새 없이 헛소리를 늘어놓자 장채원이 이마를 매만졌다.
일단 천마와 입씨름을 시작하면 끝이 없다. 모처럼만에 나온 외출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고생했어. 잘 가.”
장채원이 몸을 돌리려는데 천마는 고은진의 얼굴을 가리켰다.
“회색 눈깔하고 가는 건가.”
“어? 으응. 그냥… 모처럼 만났으니 한잔하려고.”
“회식이군.”
천마가 눈을 번뜩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대를 지키느라고 한 끼도 먹지 못했다.
하루 정도 굶는다고 배고픔 따윈 느끼지 않았지만, 점주가 사주는 공짜 저녁을 마다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회식 아냐. 그냥 한잔하는 거지.”
“그럼 본좌도 그냥 한잔하겠다.”
“미, 미안한데 오늘은 은진 씨랑 둘이 할까 하는데.”
집요하게 따라붙는 천마의 시선을 피한 장채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냥… 모처럼 여자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리고 다시 포대를 짊어지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꼬르륵.
하루 종일 굶은 탓인지 천마의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덩치가 산만 하고 인상이 험악한 천마였으나, 꼬르륵거리는 배를 슬쩍 만지고 걷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진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갑자기 장채원에게 말했다.
“괜찮지 말입니다.”
“네?”
“근육몬, 같이 와도… 괜찮지 말입니다.”
장채원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하니, 고은진이 술자리에서 천마를 부르다니. 정말 장형욱의 훈련 효과가 나타나는 걸까?
“괜찮겠어요?”
장채원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고은진이 민망한 표정으로 코를 훔쳤다.
“배고픈 사람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말입니다.”
“배고픈 사람?”
“그런 게 있지 말입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더 친해질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장채원은 돈을 뺏는 깡패처럼 천마의 어깨를 붙잡고는 낮게 말했다.
“자, 봐. 은진 씨는 너에게 맘을 열었어. 무슨 말인지 알지?”
“모르겠다.”
“모처럼의 술자리니까 싸우지 말라고. 그냥 평화롭게 술 마시자고. 알겠지?”
천마는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