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demon, go home RAW novel - Chapter 103
황설지가 다시 의무실에 들른 것은 사흘 후였다.
원래 매일 오려고 했으나 무관 일이 바빠 시간을 내지 못했다.
백씨 청년이 그녀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황 사범님. 오셨군요. 못 뵙고 떠나는 줄 알았습니다.”
“백 공자님. 어떻게 된 건가요?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떠나시려는 건가요?”
“공자님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기억은 없지만 제가 전직 거지였다는 것을 여러분께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 구걸하던 곳에 가서 확인까지 했었고요.”
“아, 그곳까지 갔었나요?”
“네.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말씀하신 그곳에 가봤습니다.”
“그래서요? 뭔가 소득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다만 제가 석 달가량 그곳에서 얼이 빠진 채 반지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왔습니다. 그 이전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황 사범님 덕분에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과거 기억을 되찾아야 집으로 돌아가시던가 할 텐데······ 가족분들이 얼마나 기다리시겠어요?”
“어쩔 수 없지요. 조급하게 마음먹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계기가 되면 모든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좀 더 요양하고 가세요. 혹시 수석 사범님이 와서 빨리 나가라고 하던가요?”
“······.”
백씨 청년이 대답 대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수석 사범님이 와서 좋지 못한 말을 했군요. 구 의원님. 정말인가요?”
“네. 어제 수석 사범님이 와서 이제 그만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계셨어요? 아직 기억도 못 찾은 분을 쫓아내서 어쩌려고?”
황설지가 흥분했다.
구 의원이 말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실 기억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지라.”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요. 백 공자님. 가만 계세요. 제가 수석 사범님, 아니 관주님께 말씀드려 계속 지내시게 해드릴게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당분간 사용할 이름을 정했습니다. 앞으로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백무명(白無名)으로 기억해주십시오.”
“아, 정말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신가 보군요. 이름 없음을 이름으로 삼으시다니.”
황설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백씨 청년, 즉 백무명이 담담히 말했다.
“이름은 원래 없는 것이었으니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요. 아무 쓸모도 없는 저이지만 앞으로 기회가 되면 반드시 황 사범님께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백무명이 고개를 숙인 후 의무실에서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황설지의 저지에 백무명이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이것 받으세요.”
황설지가 품속에서 가죽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인피면구예요. 화상을 입은 그 얼굴로 다니면 객잔에 가서 밥도 사 먹기 힘들 거예요.”
“아, 인피면구는 구하기도 힘들고 매우 비싼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백무명이 사양했다.
제정신이 들기 전 그렇게 반지에 집착했던 모습과 달리 자신의 얼굴이 훼손된 점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제 성의이니 받으세요. 어차피 제게 쓸모가 없거든요.”
“남장할 때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텐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백무명이 다시 한번 사양하고 의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받기 전에는 못 보내드립니다. 어릴 적 돌아가신 제 오라버니 같아서 드리는 것이니 더는 사양하지 마세요.”
“으음,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호호. 제가 씌어드릴게요.”
황설지가 웃으며 직접 백무명의 얼굴에 인피면구를 씌웠다.
그러자 화상으로 형태를 알기 힘들었던 얼굴이 평범한 삼십 대 대한의 얼굴로 바뀌었다.
“호호. 얼굴이 바뀌니 느낌도 확 달라지네요. 아, 그리고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일자리 찾을 때까지 음식값으로 사용하세요.”
황설지가 품속에서 은자 한 냥을 꺼냈다.
“아, 이런 큰돈을. 이건 정말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에요. 받으세요. 나중에 갚아주시면 되잖아요? 자리 잡으면 꼭 와서 돈도 갚아주시고 그때 다시 우리 이야기해 보도록 해요. 마음 같아서는 우리 무관에 취직시켜드리고 싶은데, 지금 무림 상황이 어지러워 그럴 형편이 안되는군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 돈은······.”
백무명이 재차 사양하려 했으나 황설지는 막무가내였다.
백무명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받았다.
사실 수중에 한 푼도 없어 막막한 상황이긴 했다.
“좋습니다. 다음에 열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
“네. 그 패기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그럼 이제 가보세요. 인연이 있으면 우리 다시 만나도록 해요.”
“네. 황 사범님도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백무명이 포권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가 황설지의 무사함을 기원한 것은 지난 사흘간 구 의원으로부터 당금 무림의 동향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관은 그 특성상 무림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구 의원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백무명은 무림 일에 관심이 높아 계속 질문을 던졌고, 그 결과 영웅무관의 상황 역시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백무명이 서둘러 떠나려는 이유기도 했다.
무림 전쟁으로 다들 힘든 시기에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놀고먹을 수는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허드렛일이라도 하면서 좀 더 지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수석 사범 위지형이 어제 와서 쐐기를 박는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무관 대문을 나선 백무명이 고개를 돌려보니 황설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 같아 마음의 부담도 되긴 했으나, 죽은 오빠 이야기를 듣게 되자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내게도 가족이 있었을까. 언제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백무명이 황설지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영웅무관을 떠났다.
* * *
“어서 오십시오. 손님. 뭘 드시겠습니까?”
“소면 한 그릇 주시오.”
“네.”
점소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백무명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중에 은자 한 냥뿐이기 때문에 비싼 음식을 사 먹을 수 없었다.
‘만두라도 시킬 걸 그랬나. 아니다. 일단 최대한 돈을 아끼면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 객잔에 방을 하나 잡고 내 몸속 기운을 좀 더 살펴보고 싶은데, 이 돈으로 방까지 잡으면 며칠 못 버틸 것 같고. 진퇴양난이군.’
백무명이 안색을 굳혔다.
사실 그가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은 기억도 기억이지만 바로 몸속의 신비한 기운이었다.
‘혹시 이게 무림인이 말하는 내공일까. 만약 내공이라면 나는 이전에 무림인이었던 말인가. 아, 뭔가 생각 날듯하면서도 생각나지 않는군. 내공심법에 관한 기초 원리라도 알게 되면 뭔가 실마리가 풀릴 듯한데······ 식사를 마치고 서점에 가서 운기토납법에 관한 책이라도 있는지 찾아볼까.’
단전 부위에 느껴지는 기운은 마치 공과 같이 매우 단단했다.
문제는 그 기운을 움직일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분명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아무래도 그 방법 역시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 서두를수록 늦어지는 법이다.’
백무명이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자 금세 안색을 회복하는 그였다.
이는 다른 사람과 다른 그만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 답답함을 이겨내기 힘든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깨어나 보니 성씨 외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무엇보다 얼굴은 불에 타 엉망이니 누가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아니 당혹을 넘어 절망스럽다고 해야 맞을 것이었다.
하지만 백무명은 이른 시간에 그러한 집착을 어느 정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원래 무(無)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차차 개선해나간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일단 무슨 일이든 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백무명이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점소이가 소면 한 그릇을 가져와 탁자에 놓고 갔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음식값에 따라 친절도가 달라지는 전형적인 점소이의 속성이 보였다.
백무명은 개의치 않고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험악하게 생긴 흑의인 두 명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감산도를 등에 멘 그들은 빈자리가 보이지 않자 인상을 찡그렸다.
점소이가 급히 달려가 말했다.
“저기 합석 자리가 있으니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헤헤. 곧 있을 무림맹주 선출대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서 따라오십시오.”
점소이가 대한들을 데려간 곳은 바로 백무명이 앉은 곳이었다.
마침 탁자 하나를 그 혼자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합석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한들이 자리에 앉자 백무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에 열중했다.
하지만 대한들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신경 쓰이니까 어서 처먹고 나가라. 소면 한 그릇 먹으면서 되게 천천히 먹네.”
“예?”
백무명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기억이 안 돌아와서 순수해진 것일까.
이전 그의 성격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의외인 것 같았다.
“귀가 먹었나?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우리는 원래 합석을 하지 않는다. 셋을 살리겠다. 그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네놈 뺨을 때려주겠다. 하나! 둘!”
느닷없는 봉변을 당하기 직전인 백무명은 갈등했다.
무림맹 총단이 있는 낙양성이라 해서 치안이 잘되어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최근 무림맹이 사면초가 위기에 처하면서 낙양 성내 치안은 말이 아니었다.
병력이 모자란 무림맹 총단에서 치안 유지에 투입된 인원을 모두 거두어들였기 때문이었다.
관군이 있긴 했지만 그 수가 적어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되자 움츠려 있던 흑도들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만간 모두의 예상대로 무림맹 총단마저 칠마종에게 넘어가면 흑도들의 세상이 다시 올 것은 확실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흑도들이 칠마종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 휘하 세력이 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남성과 사천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백무명이 갈등을 계속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소면을 반도 못 먹었기 때문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운 듯 흑의 대한들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버러지 같은 자식. 일어난다고 일어나? 사내자식이 그렇게 나약해서야. 네놈 부모가 이 꼴을 봤으면 좋아하겠다. 아니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 했으니, 네놈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 같군. 어서 꺼져라.”
“너무 심한 게 아닌가요?”
옆 탁자에 앉은 한 소녀의 말이었다.
“네년은 또 뭐냐? 감히 우리 대왕방(大王幇) 나리들에게 훈계하는 것이냐?”
“저는 영웅무관 관원이에요. 합석했으면 조용히 먹어야지 양해를 해주신 분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고 쫓아내려 하다니. 아무리 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기로 상식을 벗어난 일이 아닌가요?”
“이런 미친년을 봤나? 영웅무관? 고작 무관 제자 주제에 겁도 없이 나서는 것이냐? 안 되겠군. 네년의 옷을 모두 벗겨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겠다.”
“이런 색마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백의소녀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대한들 역시 감산도를 뽑아 살기를 뿜어냈다.
순간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급히 자리를 옮겼다.
자칫 잘못하면 싸움의 와중에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백무명이었다.
그 역시 자리를 비키든지 할 거로 예상되었으나 그러질 않았다.
백무명이 백의소녀에게 말했다.
“소저. 제 일이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물러나십시오. 괜히 저 때문에 다치실까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