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Demo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125
훈수 두는 천마님 122편
레이지는 하관이 으스러졌는데도 웃었다.
신경을 타고 오는 강렬한 고통이 있었지만, 그에겐 이 고통은 짜릿한 충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턱을 수복하며 박현수를 내려다봤다.
두 사람의 키 차이는 꽤 났는데, 머리 두 개 정도 차이였다.
“꽤 하잖나?”
레이지는 재생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주둥이를 못 놀리게 하려고 턱을 부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재생했다.
하긴 쉽게 죽어 주면 그것도 재미없다.
박현수의 입꼬리가 위로 찢어졌다.
그의 주먹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쩍-!
레이지의 거구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박현수는 옆구리를 찌른 주먹을 회수하고, 손바닥을 들어 턱을 올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지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힐 때, 무릎을 세웠다.
기공이 두껍고, 뾰족한 무릎을 감쌌다.
[승류(勝流)]흐름이 바뀌었다.
얼굴을 노리고 올라오던 무릎의 방향이 거짓말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지의 눈이 커졌다.
마치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말라는 듯, 다리는 거짓말처럼 땅을 딛고 있었다.
“레이지!”
바이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레이지는 주먹을 휘둘렀다.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주먹은 빠르고 매서웠지만, 아까처럼 단 한 방도 박현수에게 닿지 않았다.
탈력 같은 게 아니었다.
싸움의 흐름이 오로지 박현수만을 위해 흐르고 있었다.
‘이거 아주 흥미로운데?’
레이지는 금빛 안광을 내뿜으며 흉포하게 웃었다.
아무리 전성기 수준이 아니라지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건 오랜만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아주 즐겁단 말이다!”
꽝-!!
다리가 땅을 찍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크게 진동했다.
박현수는 생각보다 커다란 힘을 뿜어내는 붉은 괴물을 보았다.
“네가 쟤보단 낫구나.”
보라색 붕대를 눈에 감은 여자와 비교하면 이쪽이 훨씬 잘 싸운다.
더 강한지는 모르겠다.
아마 특화된 능력이 다른 것이겠지.
무엇이 됐든 상관없다.
“이곳에서 둘을 잡을 수 있는 건 행운이야.”
손을 뻗었다.
거구가 잽싸게 뒤로 빠졌다.
역시 쉽게 잡혀주진 않는다.
이 역시 상관없었다.
쉽지 않다 뿐, 어려운 건 아니었으니까.
천마신회류가 펼쳐졌다.
마나가 그의 육체를 옭아맸다.
붉은 기운이 폭발했다.
그 힘은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마나의 결박을 헤집었다.
“통하지 않는다!!”
가슴을 활짝 펼친 레이지가 포효했다.
그 위로 작은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가슴 한복판에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그것을 중심으로 흑강기가 거미줄처럼 균열을 일으켰다.
“혼자서는 역부족이에요.”
바이스가 몸에서 대량의 바이러스가 살포했다.
파란 연기 형태의 바이러스가 바람을 타고 박현수에게 날아갔다.
바이러스는 레이지를 피해 오로지 그만을 노렸다.
박현수는 몸을 뒤덮는 파란 연기를 보다가 손바닥을 더 깊게 박아 넣었다.
“크악!”
두꺼운 적색 피부가 움푹 들어갔다.
바이스는 손톱을 세웠다.
바이러스 파티클에도 멀쩡했다지만, 그건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면역 체계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요?’
머리가 복잡해졌다.
열 개의 손톱에 각양각색의 바이러스가 맺혔다.
하나하나가 나라 하나 정도는 역병으로 멸망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바이스가 날아올랐다.
먼지로 더럽혀진 하얀 드레스를 휘날리며 박현수에게 돌진했다.
“일단 한 놈.”
박현수는 다가오는 바이스를 무시하고 반대쪽 손날을 세웠다.
강기가 손바닥을 에워쌌다.
그대로 목을 치려고 했다.
레이지가 두 눈을 뜨기 전까지는.
“노오오오오옴!”
꽝-!!
굉음과 함께 신체 내부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박현수는 뒤로 빙그르르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눈이 찡그려졌다.
“짜증나게.”
그는 허공을 가르며 휘둘러져 오는 손톱을 고개만 꺾어 피했다.
바이스는 실패할 줄 몰랐는지 입을 살짝 벌렸다.
“컥!”
입이 벌어진 상태로 울컥- 피가 역류했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보았다.
대체 언제 배에 발끝을 박아 넣었단 말인가.
보지 못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구잡이로 손톱을 휘둘렀지만, 그 어느 것도 닿지 못했다.
“됐어.”
박현수가 짧게 내뱉었다.
무엇이 됐단 말인가.
바닥을 구른 바이스는 황급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가 훨씬 빨랐다.
빡-!
바이스의 작은 몸이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레이지가 그녀를 뛰어넘어 다리를 발뒤꿈치부터 내려찍었다.
팔만 들어 하박으로 아킬레스건을 받치고 뱀처럼 손목을 틀어 정강이를 붙잡았다.
그리곤 상대 힘을 역이용하며.
더는 시간 낭비야.”
그대로 레이지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의 몸 주변으로 검은 구슬 수백 개가 일시에 떠올랐다.
두 기수는 경악했다.
일련의 전조 없이 대량의 에너지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전성기 상태에서나 그들도 가능한 것들이었다.
역시 이 인간은 자신들과 동격이다.
그 말은 즉.
“여기까지 해야겠군.”
“방법은 있나요?”
“있지.”
레이지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웃으며 박현수를 보았다.
“오늘은 패배를 인정하지.”
“뭐?”
“다음에 만날 땐 지금과는 많이 다를 거다.”
박현수는 뜬금없는 적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망친다는 말이냐?”
“그렇다!”
뭘 저렇게 당당하게 외친단 말인가?
주변에 광활하게 펼쳐진 루천을 본다면 절대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뭔가 있군.’
과연 그게 뭘까?
보아하니 여자는 그 방법을 모르는 듯했다.
하긴 알았다면 신나게 얻어맞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봤자 어차피 모른다.
카본이라면 알아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카본은 아직 지구에 없었다.
“할 수 있으면.”
손가락을 까딱였다.
수많은 강기공 덩어리가 두 기수를 포위했다.
“해봐.”
그리고 쏘아졌다.
레이지는 웃으며 기운을 만개했다.
박현수의 눈이 좁혀졌다.
시야가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 * *
“미친놈.”
박현수는 눈앞을 덮은 뿌연 연기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방법이란 게 ‘자폭’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불과 1분 전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레이지의 몸에서 붉은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루천을 전부 집어삼키다 못해 무력화시켰다.
나아가 자신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한계를 넘어선 에너지를 방출했다.
억지로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과연 킹의 동료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약화된 상태라도 목숨을 건 공격은 자신을 충분히 위협할 정도였다.
뚫으려면 뚫을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자신 역시 상당한 위험을 감수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둘을 잡는다고 쳐도 약화된 자신을 군세에서 놓쳤을 리 없었다.
무리해서라도 노렸을 것이고, 킹의 동료가 하나 더 남아 있는 이상 승산은 없었다.
“아쉽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상대의 수준을 알고 있었았다.
그 정도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그들의 힘이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거기서 더 강해진다고 해서 그리 대단할 건 없을 것이다.
정 안 되면 ‘그것’을 사용하면 된다.
우주에서 보낸 40년.
처음엔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방금 싸움으로 확신이 들었다.
“다음?”
빨간 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다음. 크큭.”
몸을 타고 빛조차 빨아먹을 어둠이 흘러나왔다.
그 새까맘은 이전 같은 천마신공의 내공과는 판이했다.
귀화가 어느 때보다 짙게 일렁거렸다.
다음에 만날 때.
“지옥을 맛보여 주지.”
그가 이빨이 보일 정도로 씩- 웃었다.
* * *
“현태 씨! 이 서류 부장님한테 좀!”
“알겠습니다!”
팀장에게 서류를 건네받은 박현태는 부장실로 다급히 달려갔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한국 협회도 때아닌 난리가 벌어졌다.
아프리카에서 2년 동안 관측된 적 없는 거대한 힘의 흐름이 발생했다.
한국 협회 역시 총본부에서 공문이 내려온 터라, 아이작이 이번 사건을 전담한단 걸 알고 있었다.
한데 지금 나타난 거대한 힘들은 아이작이 벌인 것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전역을 관측하는 드론들은 힘을 견디지 못하고 다운되었다.
무지의 상황에 각국의 협회가 당장 각자도생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협회 전체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바쁘게 놀리던 다리를 멈추고 천장을 바라봤다.
툭툭- 마이크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하유락은 그리 말하고 방송을 끝냈다.
박현태는 가만히 서서 손에 들린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럴 때는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지, 부장에게 서류를 전달하러 가야 하는지 헷갈렸다.
* * *
하유락은 책상에 팔을 걸고 한숨을 쉬었다.
아프리카에서 갑자기 발생한 거대한 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졌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드론들이 재가동되며 주변을 살펴본 결과 엄청난 파괴 흔적이 발견되었다.
주변을 더 수색했지만 특별한 건 발견되지 않았다.
2년 전, 박현수를 제외한 S급 헌터들의 공격에 꿈쩍도 하지 않던 괴물이 떠올랐다.
‘그 힘들은 그때의 괴물이 떠오를 정도였어.’
지구 반대편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2년 동안 죽어라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보다 현수는?’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설마-!
하유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힘 중 하나가 설마.”
박현수라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렇다면 다른 힘들이 사라진 원인도.
하유락은 핸드폰을 들어 박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범한 신호음이 울렸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손톱을 물었다.
신호음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왜 안 받아?!”
그녀는 더 기다려봤지만, 아무래도 신호가 연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끊으려는 찰나.
-누나?
“박현수!”
-소리는 왜 질러요?
“너 지금 어디야?”
-흐음. 어디려나.
“야!”
“왜 소리쳐요.”
“너 아프리……!”
하유락은 마저 소리를 지르려다 말을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통신이 끊겼다.
그런데 어째서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설마 설마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이.”
“……너?”
“반가워서 말이 안 나와요?”
“너 지금까지 아프리카에 있었지!”
“네.”
“왜 말도 안 하고 혼자서 그런 위험한 곳을.”
“걱정해 주는 거예요?”
불쑥 박현수의 얼굴이 코앞에 튀어나왔다.
어느새 움직였는지, 하유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봤다.
빛 한 점 들어가지 못할 만큼 그의 눈은 검은색이었다.
박현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날 걱정해 줬구나.”
“거, 걱정은 무슨.”
하유락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머리카락 색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박현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고맙다구요. 걱정해 줘서.”
“흠흠. 그래서 거기서 일은 자, 잘 끝났어?”
“아쉽게도 놓쳤어요.”
박현수는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놓치다니?”
“뭐- 그렇게 됐어요.”
그는 책상에 걸터앉아 대답했다.
“정확한 설명을…….”
“일단.”
설명을 요구하려던 하유락의 입술에 박현수의 검지가 닿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입을 막은 손가락을 보았다.
“밥이나 같이 먹죠. 배고파요.”
하유락은 오늘따라 적극적인 박현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괜찮아요?”
“크흐흐흐.”
레이지는 바이스의 부축을 받으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모든 힘을 억지로 끌어올려 폭발시켰다.
덕분에 전신이 엉망이 되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한 대가였다.
장기가 거의 남지 않았다.
재생이 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힘이 소멸한 탓에 재생 속도가 더뎠다.
이마저도 ‘핵’이 멀쩡한 덕분이었다.
핵이 없었다면 자폭 같은 무식한 방법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고, 결국 박현수의 손에 둘 다 죽었을 것이다.
“무리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둘 다 죽었겠지.”
“그렇겠죠.”
바이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박현수에게 처절하게 당한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전성기의 힘을 회복한다고 해도 이기는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주 재밌어.”
웃을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닐 텐데도 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아무리 지금 상태로 자폭한 거라지만, 놈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놈이 존재할 수 있지?”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그 정도로 강한 존재는 거의 본 적 없었다.
그것이 레이지를 즐겁게 만들었다.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바이스 님!”
그녀의 직속 호위 기사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기사는 주인 앞에 부복하곤 벌해 달라며 사정했다.
“소신의 불충을 용서치 마십시오! 주군께서 위험에 처했음에도 감히 가지 못했습니다!”
“일어나세요.”
“아닙니다. 소신, 이 목을…….”
“꺼져라!”
레이지가 발로 기사를 밀어 찼다.
기사가 바닥을 몇 차례 구르곤 벌떡 일어났다.
몸이 엉망일 텐데도 기사 정도는 어렵지 않게 날려 버릴 힘이 남아 있었다.
“아파 죽겠는데 왜 앞을 막고 지랄이야?”
바이스는 그의 터프함을 알고 있었지만, 새삼 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기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레이지를 보다가 제 주인을 돌아보았다.
바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머쓱한 얼굴로 주인 뒤에 섰다.
잠시 후, 안내인 하나와 병사 다섯이 나타났다.
“회복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안내인이 레이지를 회복실로 안내했다.
그는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멀어져갔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기사가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입었던 상처는 모두 나았다.
그러나 데미지는 아직 남은 상태였다.
그것까지 기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기사는 다행이라며 그녀를 침실로 안내했다.
“실망스럽도다.”
그때, 벽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기사가 힐긋 뒤를 돌아봤다.
온통 검은색으로 된 천을 두르고 있는 장신의 사내였다.
특이한 점은 큰 키와는 별개로 이쑤시개처럼 보일 정도로 말랐다.
바이스가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더 블랙.”
“킹의 말을 듣지 않고 너희가 아래로 내려간 덕분에 군세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바이스 님께선 그 어떤 것도 잃지 않으셨…….”
“네놈에게 말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느니라.”
기사의 목소리가 지워졌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울리는 성대와 별개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바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곧 나올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의 말에 기사는 붕어처럼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블랙이 말을 이었다.
“우리 기수는 모든 힘을 되찾기 전까지 힘이 노출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너희 덕분에 그 인간은 우리의 힘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지.”
적을 알고 모르고는 전장에서 아주 크게 작용한다.
아무리 풀 파워 상태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 싸움으로 박현수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차라리 두 명의 정보만 알게 되었다면 약간의 손해로 끝날 수 있겠지만.
“본인과 킹의 전력 역시 노출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할 말이 없군요.”
“우린 조급할 필요가 없느니라.”
더 블랙의 말이 맞았다.
굳이 조급하게 뭔가를 할 이유가 없었다.
군세의 제약이 사라지고, 기수들의 힘이 모두 돌아왔을 때가 된다면.
“하지만 손해만 본 건 아니니라.”
천이 펄럭이며 더 블랙의 거무죽죽한 안광이 드러났다.
“우리 역시 그 인간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두 번은 당하지 않아요.”
바이스가 보라색 붕대를 풀었다.
“이 눈이 돌아온다면.”
그녀의 은색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다.”
더 블랙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후우. 엄청나게 오랜만이군.”
하얀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사내가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은 듯한 녹색 스태프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는 새까만 배경을 뒤로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엔 아름다운 푸른 별이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사내가 후드를 벗자, 청색과 남색이 앞뒤로 반반씩 되어 있는 신비한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털곤 눈을 떴다.
자신감에 가득 찬 적황의 오드아이가 푸른 별 지구를 바라보았다.
40년의 여정 끝에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
카본은 활짝 웃으며 만세를 외쳤다.
“만세!!”
얼마나 고된 세월이었는가!
마르카나에 떨어졌을 때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고생길이었다.
카본은 그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궁상 그만 떨어!”
“으악!”
그때, 얇은 다리가 카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카본은 펄쩍 뛰며 엉덩이를 붙잡았다.
그리곤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찬 인물을 노려보았다.
“이 미친 토끼가! 무슨 짓거리야!”
“카본, 궁상! 궁상 그만 떨어!”
길쭉한 토끼 귀를 바짝 세운 금발의 소녀가 펄쩍펄쩍 뛰며 소리쳤다.
엉덩이에 귀엽게 솟은 솜뭉치가 파르르 떨렸다.
카본은 눈살을 찌푸리며 엉덩이를 문질렀다.
“궁상 그만! 궁상 그만!”
“젠장……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는 울상을 지으며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셀리를 보았다.
이제 막 17년밖에 안 산 녀석이 어째서 저렇게 강하단 말인가?
‘빌어먹을 초월종들.’
부조리하다.
부당하다!
40년 동안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이 있다면 허무함이었다.
박현수의 재능에, 초월종의 재능에.
‘나 같은 노력파는 어쩌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카본 역시 엄청난 마법사였지만, 당사자에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카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우주선 창밖으로 보이는 지구를 바라보았다.
“빨리 도착해서 현수한테 저 미친 토깽이를 넘겨야지.”
카본은 그리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