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Demo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158
훈수 두는 천마님 155편
기적이 일어났다.
최후의 몬스터가 토벌된 순간.
모든 게이트에 막대한 빛이 쏟아졌고,
여태껏 죽어간 모든 이가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절망에서 허우적대던 사람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기쁨을 표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칭란은 갑작스러운 이변에 얼떨떨했다.
분명 엄청나게 좋은 일인 건 맞지만,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부활한 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건 현수의 짓이겠지?”
“아마도.”
안데르센은 몸 주변을 배회하는 은색 구슬을 보며 대충 대답했다.
5차 웨이브에서 재각성한 그는, 아리스의 기술력뿐만 아니라 전자기력까지 손에 넣었다.
그 힘은 비록 초월에 이른 수준은 아니었지만, 전장을 휘젓기엔 차고 넘쳤다.
“너무 힘에 취한 거 아냐?”
“그런가?”
“그건 아닌 것 같네.”
칭란은 안데르센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안데르센의 고도의 집중력은 그저 능력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지 계산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박현수를 만나 봐야겠어.”
“안 그래도 얘기해 놨어.”
그때, 문을 열고 아르망이 등장했다.
한껏 초췌해진 그는 마른 얼굴을 문지르며 안데르센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장이 고생이 많아.”
“부의장은 이곳에서 놀고 있는데 말이지.”
“놀긴.”
“장난이야.”
아르망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푹 뉘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고 나니 몸에 힘이 쫙 빠졌다.
거기다 죽어 나간 헌터들이 부활하는 기적 탓에 쉴 틈이 없었다.
“한국 협회로 우리가 가는 건가?”
“누가 오든 가든 뭐가 중요하겠어. 어차피 한걸음인데.”
“그건 그렇지.”
“바로 출발하자. 넌 어떻게 할 거야? 안데르센.”
“난 조금만 더.”
안데르센은 전자기력을 다루는 데 정신이 팔려 다른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망은 고개를 저었다.
“가지.”
“그래.”
두 사람은 안데르센을 놔두고 한국 협회로 향했다.
* * *
“……유다가 죽었다.”
더 블랙이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박현수의 손에 당했다는군.”
믿기 힘든 얘기였다.
유다가 누구인가.
제 스승을 은 60닢에 배신하고, 사탄에게 고개를 숙여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괴물 아닌가.
비록 인간 출신일지라도 악(惡)의 힘으로 초월에 이른 존재였다.
심지어 기수들조차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강자기도 했다.
“부활의 여파가 남아 있었던 게 아니겠소?”
“그건 아니다.”
레이지의 질문에 킹이 부정했다.
“그는 만전이었다.”
전성기 그대로였다.
그 혼자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충분하지 않았다.
그뿐이다.
“사탄께서 일시적으로 유다의 몸에 강림해, 박현수 앞에 몸소 나타나셨다고 들었소만.”
“그 말대로다. 불행 중 다행이지. 그분의 부활이 진정으로 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이러나저러나, 군세의 목적은 무저갱에 봉인된 사탄의 부활이었다.
그의 수족인 유다가 죽긴 했지만, 사탄이 어떻게 된 건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역시나 박현수였다.
“유다마저 쓰러트릴 정도였단 말인가.”
그 강함의 끝은 도대체 어디인가?
킹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쯤 되니까 화를 참기 어려웠다.
벌써 몇 번째란 말인가.
그가 등장하고부터 모든 계획이 실패했다.
그냥 실패했을 뿐 아니라 군세에 지대한 타격을 주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없애야 했다.
‘로벤이 아니라, 그를 죽였어야 했다.’
당시엔 로벤 쪽이 더 큰 위험인자라고 판단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
만약 그때의 선택을 다시 할 수 있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박현수를 죽였으리라.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고, 이제라도 최고의 선택을 해 보자고 다짐했었다.
‘한데, 그 최고의 선택이 몇 번이나 실패했다.’
펑퍼짐한 망토 안에서 두 주먹이 어느 때보다 세게 쥐어졌다.
“군세의 제약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내실을 굳건히 다지도록 하지.”
뭔가를 더 하기엔 이미 늦었고, 박현수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이상 더 큰 실패를 낳을 가능성이 커질 뿐이다.
“퀸은, 어쩌실 생각이죠?”
“……관리는 네게 맡겼을 텐데, 바이스.”
“그녀는 통제할 수 없어요, 킹. 안타깝게도 지성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새로이 만들어진 복합 기수 퀸.
그녀는 이전 개체와 달리 엄청난 힘과 잠재력을 타고났지만, 대신 지성을 갖추지 못했다.
“무기로도 쓰기 어려울 거예요.”
갓난아기에게 총을 쥐여준 꼴이다.
그것은 랜덤으로 터지는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적만을 공격할지 모르나, 아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힐 가능성도 컸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퀸은 실패예요.”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킹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일이 어려워지는군.”
더 블랙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레이지도 머리를 벅벅 긁다가 수련장으로 떠났다.
혼자가 된 바이스는 자리에 가만히 앉은 상태로 눈을 감싼 붕대를 풀었다.
“끝이 머지않았군요.”
누구의 끝인지는 알 수 없다.
바이스는 다시 붕대를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퀸이 놀고 있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다들 오랜만이에요.”
“사람들이 부활한 거, 네가 한 일이야?”
칭란은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박현수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쉿.”
박현수는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많이 알아봐야 좋을 거 없어요.”
“이게 어른한테!”
칭란은 박현수의 손가락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녀는 흥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부모에게 삐진 어린아이 같았다.
‘더 어려지셨네.’
그녀는 재각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본인은 딱히 불만 없어 보였지만, 과한 힘의 사용으로 이제는 유치원생 정도로 작아졌다.
아멜리아의 돌을 사용한다면 그녀를 원래 크기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안 앉고 뭐 해?”
칭란이 한쪽 눈을 치켜뜨며 박현수를 불렀다.
“다른 애들은?”
“저도 빨리 온 거예요.”
박현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후, 필요한 인원이 전부 모였다.
상석에는 의장 아르망이 앉았다.
지금 와서 상석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이곳에서 가장 먼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모두 고생했다.”
지옥 같던, 어쩌면 진짜 지옥이었던 몬스터 웨이브가 막을 내렸다.
엄청난 희생자를 냈고, 동시에 엄청난 재각성자가 탄생했다.
희생자는 박현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 되살렸지만, 그전까진 모두가 절망에 휩싸였다.
심적으로든, 신적으로든 많이 고통받았다.
“이번에 자리를 만든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이후엔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계획하기 위함이다.”
4개월 조금 후면 군세의 제약이 끝난다.
“계획?”
그 말에 의문을 표한 건 박현수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계획을 짜려고요?”
“……당연히 군세가 침략해 오는 것에 대한 대비지.”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남은 기간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요, 다들.”
“그게 무슨 말이야? 긴장해도 모자랄 판국에.”
말을 꺼낸 건 하유락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예전과 달리 칠흑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두 눈 역시 먹을 칠한 듯 새까맸다.
“아직은 적응이 잘 안 되네요.”
“시, 시끄러워.”
하유락은 괜히 볼을 붉히며 머리카락을 쓸었다.
“잘 어울린다구요.”
“그런 말은 쪼옴!”
그녀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둘만 있을 때 해. 남부끄럽게.”
“둘만 있을 땐 해도 돼요?”
“거기 둘.”
탕탕-!
칭란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테이블을 작은 손으로 두들겼다.
“사랑 얘긴 끝나고 하면 안 되겠니?”
“사, 사, 사랑은 무슨!”
하유락이 발끈하며 외쳤지만, 새빨갛게 닳아 오른 얼굴은 어쩌지 못했다.
박현수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긴장해라 말라 이런 게 아녜요. 준비는 전부 끝났어요. 필요한 건 휴식, 그리고 또 휴식.”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요. 전부 휴식하세요. 이제 모두 끝났다, 생각하고 푹 쉬는 거예요.”
“그럼 되는 거냐?”
아르망의 질문에 박현수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4개월 후에 봬요.”
회의가 끝났다.
박현수는 일이 있다며 먼저 떠났고, 남은 인원끼리 추가적인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라고 해 봐야, 박현수가 남기고 간 말 때문에 모두가 쉽게 자리를 못 뜨고 있을 뿐이었다.
“쉬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쉬엄쉬엄 준비하라는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쉬라고 하잖아.”
“마음을 비우라고 그러는 걸지도.”
“마음을 비운다라.”
그게 가능한가?
남은 기간은 고작해야 4개월.
미친 듯이 준비해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고작 4개월 동안 미친 듯이 준비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여기서 뭐가 더 추가된다고 전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몬스터 웨이브를 통해 전력은 확실하게 보강되었다.
지금 수준이라면 어렵게 공략했던 포탈 정도는 쉽게 찜쪄먹을 수준은 되리라.
“어차피 발전하지 못한다. 그러니 쉬어라. 이런 뜻이었구나.”
“현수 녀석.”
칭란이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휴식이라.”
확실히, 푹 쉬어 본 지가 언젠지 기억나지 않았다.
박현수의 말처럼,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훈련이 아닌 휴식일지도 모른다.
결정을 내린 아르망이 입을 열었다.
“4개월 동안 개인 정비 시간을 갖지.”
* * *
“이젠 좀 괜찮냐?”
“살 만하군.”
카본의 물음에 아이작은 주먹을 쥐락펴락 반복하며 대답했다.
찢긴 몸은 원상태로 돌아왔지만, 영혼에 제법 큰 타격이 왔다.
덕분에 며칠은 꼼짝없이 요양했다.
“고작 며칠 만에 회복한 몸뚱이가 경이로운 거다.”
카본은 툴툴거리듯이 말하곤 위로 올라갔다.
[그의 말이 맞아. 보통은 영혼이 그 정도로 타격을 받으면 정신적으로 사망한다고, 파트너.]“하지만 회복했잖아.”
[그러니까 내 파트너인 거지. 캬하하하!]“몸이 찌뿌둥해.”
하루라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데, 며칠을 쉬어 버렸다.
아이작은 마검을 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약 1m가량 허공에 떠 있는 천사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서 뭐 하냐?”
[상태는 괜찮아진 모양이구나?]루치엘은 고개를 반듯하게 세우고 눈동자만 아래로 내려 아이작을 보았다.
정말 한결같은 놈이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나를?”
[그렇다.]“무슨 일인데?”
[사실 이 몸도 같이 불렀다.]“…….”
아이작은 짜증 가득한 눈으로 루치엘을 노려보았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왜 부르는데?”
[모른다.]루치엘은 고고한 자세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당당하냐는 거다.
더 얘기해 봐야 자신만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서, 아이작은 위로 올라갔다.
루치엘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좀 괜찮아?”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찾았다고?”
“다들 앉아 봐.”
박현수는 모두를 불러 앉혔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야.”
“네가 언제 그 말을 하나 기다렸다. 그래서 그놈은 뭐였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박현수는 아이작을 습격한 짐승의 정체와 짐승의 몸을 빌려 강림한 사탄에 관해 얘기했다.
“……그러니까, 날 공격한 게 유다라는 말이냐?”
아이작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박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카본도 마찬가지였다.
지구인이라면 모르는 게 어려울 정도로 유다의 악행은 유명했다.
“잘 어울리긴 하네. 사탄과 유다.”
[흥미롭군. 과연 악답다.]“그럼 그럼 현수는 괜찮은 거지? 괜찮은 거 맞지?”
셀리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이곳에서 박현수를 걱정해 주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그날도 괜찮다고 했잖아.”
“현수 괜찮아! 다행이야!”
“너밖에 없다.”
“히히. 셀리밖에 없어.”
셀리의 토끼 귀가 말렸다 접혔다를 반복했다.
기분이 매우 좋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아무튼, 문제는 그게 아니야.”
“이것도 충분히 문젠데 또 뭐가 문제라는 거야?”
“사탄의 정체.”
“……사탄은 창세기부터 존재해 온 사악한 뱀이잖아.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만든. 그냥 악마 아니야?”
“악마가 맞아. 다만, 그냥 악마가 아니라는 거지.”
예전에도 설명했듯, 마족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우주적인 악행을 벌여 마왕이라 불리게 된 존재가 이끄는 종족과 진짜 악마 종이었다.
사탄은 명백한 후자였다.
“다만, 놈이 마왕이라는 거야.”
“마왕……?!”
루치엘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곳의 천사는 아니었지만, 천사란 종족 자체가 마(魔) 그리고 악(惡)에 대칭되는 종족이었다.
그러니 박현수 안에 봉인된 마왕과 아이작을 처음 봤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다.
“이명은 분명히 ‘타락’. 놈은 타락의 마왕이야.”
“정말 잘 어울리는 이명이잖아.”
카본은 실소를 흘렸다.
사탄은 타인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잘못된 길로 유혹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 치의 혀를 놀려 구도자를 타락으로 이끈다.
모든 서적에 그렇게 묘사되었고, 현재도 사탄에 대한 인식이 그러했다.
“놈이 부활하면 많은 사람이 놈에게 감화될 거야.”
“골치 아픈 놈이군. 어떻게 해서든 부활을 막아야겠네.”
“아니, 부활은 못 막아.”
유다의 몸을 빌리긴 했지만, 놈은 어느 정도 완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부활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놈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군세부터 싹 다 없애 버린다.”
“사탄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끔 말이지?”
“화끈? 뜨거워?”
셀리의 뜬금없는 말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아무튼, 4개월 후야. 4개월 후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거다.”
“앞으로 4개월이라.”
“오랜만에 좋지.”
아이작과 루치엘은 훈련장으로 내려갔다.
남은 기간은 앞으로 4개월.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까?”
“승리해야지.”
“승리! 이긴다!”
“이긴다!”
조용히 자고 있던 모나미도 일어나 양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났다.
훈수 두는 천마님 156편 (외전)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하유락은 얇은 코트를 걸치고 한강을 산책 중이었다.
박현수에게서 쉬라는 얘기를 들은 것도 벌써 2달 전이었다.
2달 동안, 자잘한 업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출근을 안 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심심해.”
그녀는 스카프를 괜히 코까지 끌어올렸다.
추위를 타는 몸은 아니지만,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눈가에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2달이나 됐는데도 검은색 머리카락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붉었을 때가 정열적이고 좋았는데.
혹시나 해서 염색도 해 봤지만 역시나였다.
예전처럼 염색해도 순식간에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민아나 부를까. 집에 있을 텐데.”
이민아는 완전히 집순이였다.
처음엔 쉬는 게 너무 어색하다고 한 주제에, 이제는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밥도 배달만 주구장창 시키는 거로 알고 있다.
이참에 밖에서 좋은 밥을 먹여 줘야지.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받지 않는다.
늘어지게 자는 모양이었다.
하유락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집어넣으려고 가방을 열다가 멈추었다.
그녀는 넣으려던 핸드폰을 빤히 보았다.
멍하니 검은 화면을 보던 그녀의 볼이 갑자기 불그스름해졌다.
“에이. 무슨.”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반쯤.
하유락은 슬쩍 핸드폰을 다시 꺼내 전원을 켰다.
그리곤 주소록을 들어갔다.
가장 상단에 즐겨찾기가 하나 되어 있었다.
하유락은 입술을 안으로 말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손가락은 통화 버튼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일을 제외하면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다.
“끄응…….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예전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관계가 이상해졌다.
감정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가 돌아오고부터 속에서부터 간질간질하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보고 싶기는 한데.’
2개월 동안 박현수는 한 번도 그녀 앞에 나타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았다.
소식을 모르니까 연락 한 번 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그래. 내가 연락하는 이유는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야.
하유락은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과감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지 마라, 받지 마라, 받지 마라.’
먼저 연락한 주제에 하유락은 눈을 질끔 감고 제발 부재중으로 넘어가길 간절히 바랐다.
그가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만나게 되는 것도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하아. 다행…….”
“뭐가 다행?”
“아, 별 건 아니고.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랑 막상 보게 되면 너무 떨릴 거 그아아아앗!”
하유락은 부끄럽다는 듯 말을 하다가 옆을 돌아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뭘 그렇게 놀라요?”
박현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표정이 너무 뻔뻔스러웠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전화를 받으려는데 딱 끊어져서 직접 왔죠.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싶었고.”
누군 몇 번이나 고민한 생각을 안색 하나 안 변하고 거침없이 말한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저 혼자만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표현을 다 한다.
그게 싫진 않았지만, 왠지 억울했다.
당하는 느낌이었다.
“너…….”
“음?”
“왜 너만 그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왜 너만 표현하냐고!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혼자서만 표현해?!”
박현수는 눈을 껌뻑거리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화가 나서 빨개진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처음엔 이해가 안 갔지만, 박현수는 그리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거리가 확 가까워지자, 하유락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장이라도 맞닿을 것 같은 거리.
가뜩이나 빨갛던 얼굴이 푹 하고 익어 버렸다.
그녀는 휙 고개를 돌렸다.
“어라? 왜 얼굴을 돌려요?”
“……었어.”
“뭐라고요?”
“……았다고.”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뭐라는 겁니까? 제대로 얘기해 주세요.”
“좋았다고!”
빡-!
그녀는 박현수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아무리 박현수라도, 용의 힘을 각성한 그녀의 조인트에는 정신이 나갈 뻔했다.
“으악!”
그는 정강이를 붙잡고 콩콩 뛰었다.
하유락은 당황한 얼굴로 뒤늦게 안절부절못했다.
“괘, 괜찮아? 너무 당황해서 그만…….”
힘 조절을 못 하고 그대로 차 버렸다.
용의 힘을 각성하면서 준 초월자나 다름없어진 하유락이었다.
박현수라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다리가 터져 나갔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하유락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많이 아파? 어떡해……. 바지 좀 걷어 봐.”
“하하. 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
“그래도. 멍이라도 크게 들었으면 어떡해.”
지금 와서 멍이 대수랴?
그러나 하유락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상처 난 곳을 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전장에선 그 어떤 누구보다도 터프한 사람이었다.
한데, 박현수의 앞에선 작은 고양이가 되었다.
박현수는 그런 게 너무 좋았다.
“누나.”
“응? 엇!”
박현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대로 허리를 감쌌다.
자연스럽게 까치발이 들리며, 양손이 포개진 상태로 박현수의 가슴에 닿았다.
하유락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박현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누나를 좋아하는지 알아?”
“…….”
“나한테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거든.”
다른 사람들은 알까?
하유락에게 이런 귀여운 면이 있다는 걸?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얕보여선 안 되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힘들어도 언제 어디서나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치사해…….”
그녀가 볼을 뾰로통하며 말했다.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이런 모습이 너무 좋은걸.”
“그게 치사하다는 거야.”
“그럼 이 치사함을 즐기지, 뭐.”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유락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게졌다.
그녀는 꾸물거리며 박현수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안 되지.”
하지만, 박현수는 그녀가 빠져나가려 할수록 더 강하게 껴안았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누나.”
“……응?”
“모든 게 다 끝나면요.”
박현수는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며 프러포즈했다.
“나랑 같이 살자.”
그리고 하유락은.
“애 딸린 남자는 조금 그런데.”
“그런가?”
“아니, 좋아.”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 * *
늦은 밤, 모나미는 잠에서 깼다.
우주선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3개월이 넘었다.
“아빠?”
좁은 방엔 아무도 없었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열한 시.”
9시간을 넘게 잤다.
하지만 몽롱함은 여전했다.
모나미는 음냐음냐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다리를 움직여 냉장고로 걸어갔다.
“이잉!”
냉장고 문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아이코!”
냉장고 문이 열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모나미는 울상을 한 채로 엉덩이를 문질렀다.
열린 틈으로 들어가니 차가운 한기가 퍼져, 소변 누고 난 후처럼 부르르 몸이 떨렸다.
빠르게 오렌지 주스를 꺼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곤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리며 싱크대 위로 올라갔다.
“맛있는 오렌지 주스!”
모나미는 신이 났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리듬을 탔다.
커다란 컵에 몸집만 한 오렌지 주스를 들고 벌컥벌컥 따랐다.
뚜껑을 닫고 컵을 들었다.
“우와아아!”
투명한 잔에서 찰랑거리는 오렌지 주스가 너무나 예뻤다.
모나미는 기분 좋게 주스를 한 번에 들이켰다.
“키햐!”
아빠가 가끔 맥주 한잔하고 나면 내는 소리를 그대로 따라 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오렌지 주스를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더 잘까 했지만, 주스 한잔하니까 잠이 모두 깼다.
모나미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창문에 매달렸다.
“가까워졌어요.”
저 먼 하늘 너머에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다.
다른 사람을 못 느껴도 모나미는 느낄 수 있었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배에 가지런히 모은 작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조만간, 이 지구란 행성은 하나의 전장이 될 것이다.
아빠가 있긴 하지만, 아빠 혼자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행인 건 여러 삼촌이 있었다.
삼촌들은 아빠만큼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아저씨는 꼭 깨야 해요?”
모나미는 아무것도 없는 땅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게 내려오면 아저씨도 깨어나. 그건 안 돼요.”
[꼬마야.]
그때 모나미의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나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먼저 말을 건 것은 자신이지 않은가.
목소리는 서글프다는 듯 약간의 흐느낌을 가지고 말했다.
모나미는 목소리가 하는 말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몇 차례고 대화를 나눠 봤으니까.
그가 거짓말에 능숙하고, 남을 유혹에 빠트리는 데 장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안 통해!”
[하하하! 우리 꼬마 아가씨는 정말이지, 속이기가 쉽지 않단 말이야.]
“아저씨는 위험해요. 나오면 안 돼.”
[그렇지만 꼬마야. 이 아저씨는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갇혀 지냈어. 슬슬 허기가 진단 말이야.]
이 말은 진심이다.
모나미는 목소리의 주인이 뭐 하는 자인지 알지 못했다.
한 번 봤을 뿐이다.
어릴 적(그래 봐야 몇 개월 전이다) 꿈에서 본 거대한 붉은 용.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그 붉은 용이었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붉은 용은 허기짐과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는데.
“아저씨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더 고통받지 말고 그곳에 있어야 해요.”
[그 말은 경고니?]
“‘동족’으로서 마지막으로 하는 경고예요.”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어린애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 사탄은 그 말을 걸러 듣지 않았다.
하나는 박현수.
이미 만나 봤다.
다른 하나는 만나 보지도 못했고,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종족이 드래곤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가 모나미의 아비라는 것이다.
[그럴 테지. 궁금하구나. 너의 진짜 아빠가 어떤 인물인지.] “지금 아빠도 진짜 아빠예요.”
모나미가 목소리를 무섭게 깔았다.
사탄은 이 꼬맹이한텐 그 어떤 이간질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다시 확인하니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대체 무슨 핏줄이기에 이만한 정신력을 가졌단 말인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헤츨링 주제에 말이지.’
100년.
아니, 10년만 지나도 웬만한 성룡들은 저 아이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품고 있는 잠재력의 레벨이 달랐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서라도 저 아이는 죽어야 한다.
[아저씨는 그런 못된 사람 아니에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모나미는 한숨을 푹 쉬곤 다시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하늘엔 별 하나 떠 있지 않았다.
불길한 암운이 점점 짙어져 간다.
“하아…….”
“우리 공주님이 왜 한숨을 쉬고 계실까?”
“아빠!”
언제 왔는지, 박현수가 모나미를 안아 들었다.
모나미는 아빠의 목을 꽉 껴안았다.
“우리 딸 왜 그래?”
“아녜요. 헤헤.”
아빠는 모른다.
목소리와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혼낼 게 뻔했다.
그리고,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걱정할 게 분명했으니까.
걱정까지 끼치고 싶진 않았다.
“추워요.”
“아직 쌀쌀한 계절이지. 들어가자.”
종이 다른 부녀는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개월이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