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Demo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171
훈수 두는 천마님 169편
폐허에 자리 잡은 검은 입자가 서서히 뭉치더니, 이내 메마른 노인의 모습이 되었다.
“결국 끝이 났군.”
푸석한 피부에 얼굴에 잔뜩 핀 검버섯은 노인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노인은 저벅저벅 걸으며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검은 털 망토가 바닥에 쓸리며 나타났다.
노인, 킹은 자신의 망토를 둘렀다.
“사탄마저 패배해 더는 미래를 볼 수가 없구나.”
그는 무너진 건물 잔해에 걸터앉았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 왔다.
손은 검은 모래처럼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이미 죽은 몸이다.
억지로 육신만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
“나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구나.”
아주 오래전.
머나먼 우주 한편에 한 왕국이 존재했다.
그 왕국은 엄청나게 진보한 과학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은 백성들을 편하게 만들었으며, 끊임없는 우주 개척으로 왕국이 그리던 이상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했다.
왕국의 어린 왕자는 언제나 이와 같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대손손 말이다.
하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렸던 왕자는 그날의 절망을 잊지 못한다.
‘이곳은 나의 땅이다.’
혼돈이 나타났다.
혼돈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왕국의 모든 기술력을 동원해 혼돈을 요격했으나, 혼돈은 비웃을 뿐이었다.
그날, 어린 왕자는 모든 것을 잃었다.
부모도, 백성도, 나라도.
왕자는 다짐했다.
얼만큼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반드시 모든 걸 앗아간 ‘혼돈의 마왕’에게 복수하리라고.
그러나 어렸던 왕자는 장성한 후에도 복수를 이루지 못했다.
다 늙은 지금의 왕자는, 자신이 다루던 죽음의 막다른 길에 서 있었다.
하나뿐인 비원은 그렇게 쓸쓸히 흩어졌다.
“잔인한 세상이로다.”
‘킹’이란 이름은 언젠가 자신의 왕국을 되찾아 왕좌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이었다.
“박현수라.”
여전히 그를 증오했다.
자신에게서 자격을 빼앗아간 인간을 저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박현수였다.
일이 이렇게 될 것이었나?
‘5년을 준다면 너희 인간이 짐의 군세를 막을 정도로 강해질 것 같으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니까.’
5년 전, 최상호라는 인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의 승리로다.’
그날의 거래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렇게 되었을까?
인간을 얕잡아봤다.
박현수란 변수만 없었어도, 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그 역시 결국 인간이었으니까.
푸스슥-!
검은 모래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폐허가 된 자리엔 검은 털 망토만이 남았다.
* * *
더 블랙은 죽어가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 된다. 짐의 제국은 부활해야만 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헌터가 쏟아낸 총공세는 아무리 그라고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순간에 초월자가 된 박현태와 학센 때문에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니 된다…….’
찬란한 영광이라고 불렸던 제국의 모습이 흐릿한 기억 속에서 아른거렸다.
킹의 왕국과 달리 마법과 검이 발달했던 나라였다.
더 블랙은 그 나라에서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현왕으로 존경받았다.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아이들이 꽃밭을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제 할 일을 끝내면 저녁에 술집에 모여 맥주 한 잔 즐기는 그런 나라였다.
혼돈이 들이닥치면서 평화로운 세상은 한순간에 지옥이 되었다.
황제는 지옥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혼돈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혼돈을 부수리라.
영혼을 팔아서라도.
‘짐의 삶은…… 결국.’
더 블랙은 씁쓸한 얼굴로 소멸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승리했단 사실을 깨달은 인류는 그 자리에서 환호했다.
* * *
“포기해라. 다 끝났다.”
“헥헥……. 포기해!”
아이작과 셀리가 피눈물 흘리는 바이스에게 항복을 권했다.
바이스는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웃기지 마.”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끝낼 수 없다.
얼마나 긴 시간 이어져 온 염원이던가.
그녀의 손톱에서 바이러스가 흘러나왔다.
초월자라도, 스치면 죽진 않더라도 당장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사탄이 죽었다.”
“…….”
“너와 하나 남은 네 동료, 겨우 둘이서 뭘 할 수 있지?”
레이지란 이름의 다른 기수는 현재 카본과 싸우는 중이었다.
그 싸움도 곧 끝난다.
사탄뿐만 아니라 킹과 더 블랙 역시 죽었다.
군세는 힘을 잃었으며, 승패는 아까 전부터 정해졌다.
“저항해봐야 무의미하다. 당장 내 동료가 네 동료를 쓰러트리고 합류한다면 넌 결국 죽는다. 그게 아니더라도, 박현수가 돌아온다면 넌 한낱 벌레에 불과할 거다.”
아무렇지도 않게 독설을 내뱉는 아이작.
셀리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보았다.
평소에도 말투가 날카롭긴 했지만, 이 수준으로 독설을 날리는 건 처음 보았다.
“나는…… 나는 포기할 수 없어.”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다시 마검을 세웠다.
“발악하겠다면 받아 주마.”
“나도…….”
“넌 됐다.”
셀리가 돕기 위해 나서려 하자 아이작이 그녀를 제지했다.
“엥?”
“그녀와는 내가 승부를 내겠다.”
[파트너, 굳이…….]
“시끄러워.”
[힝.]
아이작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되겠어? 둘이서도 힘들었잖아.]셀리와 힘을 합쳤지만,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혼자서 그녀와 싸운다?
마검이 보기엔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하려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었어.”
[음?]
몇 번이나 검을 부딪쳤다.
바이스는 분명 강하다.
객관적으로 따져도 자신보다 위였다.
그러나 혼자서 못 이기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승부를 내지 않은 것은 첫째로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그녀가 스스로 포기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고 마음 위로 검을 세웠다.
그 위로.
또 한 자루가 세워졌다.
“죽어!!”
바이스가 손톱을 바짝 세운 채로 돌진해 왔다.
아이작은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심안이 아니더라도,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니까.
“참(斬).”
사악-!
두 자루의 마음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바이스는 가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손톱이 아이작의 콧잔등에서 멈추었다.
“내 아이의 복수조차 못 하고…….”
바이스는 그의 몸에 기댄 채 아래로 미끄러졌다.
셀리가 총총총 그쪽으로 다가왔다.
“끝났엉?”
“그래.”
아이작은 마검을 집어넣으며 바이스를 편한 자세로 눕혀 주었다.
적이었지만, 그녀 덕분에 많은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싸우면서 그녀에 대해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쁜 여자는 아니었어.”
아이작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셀리는 쪼그려 앉아 그의 등을 보다가 바이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표정엔 원통함이 담겨 있었다.
뽀송뽀송한 손으로 그녀의 표정을 펴 주었다.
“안녕.”
셀리 역시 자리를 떴다.
싸늘한 주검이 된 바이스의 시체가 웃고 있었다.
* * *
“다 끝났군.”
레이지는 상체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로 허허롭게 웃었다.
“이게 나의 끝일 줄은 몰랐군.”
“자결해라. 그 정도 배려는 해 주지.”
“자결이라.”
폭력과 투쟁, 지배의 상징인 자신에게 자결을 종용하다니.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저 말이 진짜 배려라는 것이다.
레이지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많이 죽었군, 나도.”
“나는 웬만하면 자결을 요구하지 않아. 널 적수로 인정했다는 거야.”
“하하하! 그것참 영광이로군.”
웃음을 거두었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먹구름이 가셨다.
‘나름 재밌는 인생이었지.’
레이지는 다른 기수들처럼 복수 같은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혼돈의 마왕과 싸워 보고 싶다.
오로지 그 일념 하나만으로 기수의 자리를 꿰찼다.
혼돈의 마왕은커녕, 박현수의 동료에게 패배한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박현수와 신나게 싸웠다면 더 즐거웠을까?
‘킹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내가 상대될 리가 없지.’
킹과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자신이 박현수를 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렇다고 해도 재미는 있었을 것이다.
둘 다 주먹을 쓰니까.
“내가 살 방법은 없나?”
“없어.”
군세에 가담한 정도가 아니라, 레이지는 지배층이었다.
인간으로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받아들이는 선택지를 골랐다면, 애초에 그가 놔달라고 했을 때 보내 줬을 것이다.
“그럴 것 같았다.”
“선택은.”
“너에게 죽고 싶군.”
“잘 가라.”
달의 마력이 그를 덮쳤다.
레이지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지막까지 배려해 주기는.
‘썩 나쁘진 않았어.’
다른 기수와 달리, 레이지는 큰 후회를 남기지 않고 최후를 맞이했다.
카본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레이지라는 적은 그에게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아닌 말로, 둘의 실력은 한 끗 차이였다.
그 승부에서 자신이 승리했을 뿐이었다.
“피곤해.”
카본은 지상으로 내려와 그대로 주저앉았다.
달의 마력이 풀리며, 하늘색과 짙은 파란색이 반반 섞인 머리카락으로 돌아왔다.
스태프를 대충 바닥에 던졌다.
깍지를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드러누웠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었다.
* * *
인류는 승리했다.
그러나 누구도 승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군세와의 전쟁은 지구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자연이 크게 훼손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나마 아프리카에서 최대한 방어선을 구축해 막아 냈기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하유락은 오랜만에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일주일이 흘렀지만, 집무실은 여전했다.
그런 큰 전쟁이 진짜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내가 무슨 실없는 생각을.’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대전쟁의 여파는 한국까지 미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와 인접한 유럽과 중동 쪽은 큰 난리가 났다.
심각한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바이스란 이름의 기수가 사용한 힘이 바람을 타고 타 대륙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많은 이가 고생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가 않아.’
한숨이 푹 나왔다.
하유락도 피곤했지만, 해야 할 일이었기에 바쁘게 업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창 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통유리 너머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똑똑-!
그는 손가락으로 유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유락이 움찔하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바쁜가 봐요?”
박현수가 히죽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그에게 달려갔다.
“몸은 좀 괜찮은 거야?”
“일주일이나 지났으니까.”
“일주일밖에 안 된 거지! 진짜 괜찮아?”
일주일 전, 히말라야산맥 부근에서 발견된 박현수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급히 각성자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여러 치유계 헌터 중에서도 그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면서 하루가 지나자, 사람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박현수의 몸이 자체적으로 회복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앉아 봐요.”
“왜?”
“줄 게 있어서.”
“줄 거?”
그에게 받을 건 없었다.
설마-!
하유락의 얼굴이 벌게졌다.
지금 여기서 그걸 주겠다는 건가?
제대로 된 연애도 하지 않고서?
‘이, 입맞춤도 안 했고, 또…… 바, 밤일도…….’
너무 많은 걸 스킵하고 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유락은 볼을 감싸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박현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그녀를 보았다.
“뭐 해?”
“응? 아, 아니야. 앉자.”
하유락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박현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옆에 앉았다.
“그, 그래서 준다는 게 어떤…….”
그녀의 눈이 심하게 반짝였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대체 어떤 걸?
박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소한 건 넘어가고, 주머니에서 작은 씨앗을 하나 꺼냈다.
“받으세요.”
반짝거리던 하유락의 눈이 짜게 식었다.
그녀는 박현수 손에 들린 새까만 씨앗을 보면서 불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게 뭐야?”
“음. 굳이 따지자면.”
박현수는 검지와 엄지로 씨앗을 쥐고 머리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지구에 필요한 특효약?”
“특효약?”
“네. 시간이 꽤 필요하겠지만, 이게 있다면 지구는 다시 건강해질 거예요.”
“그게 대체 뭔데?”
“세계수의 씨앗.”
한 그루만으로도 행성의 대기를 천 년 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신의 나무의 씨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