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07
107.
“드디어 와 보는군요, 취선루.”
“헤매지 않았다면 벌써 며칠 전에 와 봤을 것 같은, 그런 안타까운 기분이 드네요.”
느긋하게 3층 난간 너머 동정호의 풍경을 감상하는 남궁수연과 당자혜의 가시 돋친 목소리에 지은 죄가 있는 남궁청운은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어찌어찌 무사히 도착했지만 한참을 산길에서 헤매고, 거기에 산적 토벌에 뒷수습까지 하느라 고생한 아이들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이 막내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정말 요리가 맛있어요. 풍광도 좋고요. 역시 고모님이 추천하신 곳이네요.”
“직접 만드신 단검이라도 한 자루 얻고 싶었는데 맛집 추천만 건지다니.”
“친조카인 저도 아직까지 받아 본 적이 없어요.”
당자혜의 한탄에 제갈수원이 서러운 얼굴로 우는 소릴 했다. 소년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당자혜의 입가에도 피식 웃음이 흘렀다.
“청휘 형님한테는 그래도 돈 받고 해 주셨다면서요.”
“어머니께서 오래전부터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셨거든. 그나마도 남궁세가는 부자니까 비싸게 받겠다고 하시더라.”
“부자일수록 더 비싸게 받으신다더니 가차없네요.”
혈육에게도 가차없는 공평한 차등 대우에 모두들 딱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사실 이래저래 받은 것이 있는 청휘는 입을 꾹 다물고 힘없이 웃었다. 사실 어린 나이에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조카에게 마련야장은 그리 야박한 이모가 아니었기에, 청휘에게 생일 선물을 핑계로 이것저것 만들어 주곤 했다. 하지만 그걸 남들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 뵈었을 때는 굉장히 지친 얼굴이셨는데 무리하고 계신 게 아닐까.’
아주 진기를 다 소모한 얼굴로 조카들을 맞았기에 청휘와 수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들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본 진명현이 한동안 조금 무리해서 그렇지 걱정할 것 없다고 조카들을 달랬지만 받은 것이 있는 처지라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고모님이 젊을 때 자주 오시던 곳이라고 하셨으면 이 주루는 몇 년이나 된 걸까요.”
“글쎄, 40년 내외이려나?”
“직접 물어보지 뭐.”
환갑을 바라보는 마련야장의 나이를 역산하는 청휘의 옆에서 청운이 점소이를 불렀다.
“저희 주루는 약 50년간 이 자리를 지켜 온 전통 있는 가게랍니다.”
“와, 50년.”
그리고 제갈수원의 탄성에 흐뭇해진 점소이가 한 마디를 덧붙이자 주변에 있는 다른 손님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검성과 마련야장께서 젊을 적 친우분들과 함께 자주 찾으신 걸로도 유명합지요.”
“진짜?!”
“정말? 검성이?”
“검성 연화문이 호남 출신이란 소문은 들었는데 동정호에 자주 왔었다고?”
“난 그냥 소문인 줄만 알았는데!”
“뭐야, 자네 그것도 몰랐나?”
검성이란 단어에 저들끼리 수다 떨고 있던 이들까지 귀가 솔깃해졌는지 여기저기서 검성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정호를 한 걸음에 뛰어 건널 정도로 경공도 대단했다지?”
“검성은 혈교와의 전투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교주와 동귀어진(同歸於盡)했다고.”
“맞아, 마지막 전투 직전 만난 어떤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다는 소문 들었어.”
“어? 난 마련야장과 깊은 사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둘 다 남자잖아??”
“그러니까, 그런 사이라는 거지.”
다들 혈족 중 누군가가 혈교와의 전쟁에 참가했던 명문세가의 자제들이라 진실을 알고 있는 일행은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소문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아니, 어쩌면 저렇게 이상한 소문만 퍼져 있죠?”
“워낙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보니 제대로 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 검성의 사문(師門)에 대해서도 높으신 분들은 알고 계시는 거 같은데 말씀도 안 해 주시잖아.”
나이 차 나는 형들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해 주지 않아 꼬맹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묶인 청운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전혀 수수께끼의 인물이 아닌 고모님, 마련야장의 소문에 제갈수원은 여전히 의아해했다.
“아니, 하지만 검성도 마련야장도 두 분 다 여인이신데요. 왜 남자로 알고 있대요?”
“그야 혈교를 꺾고 그 별호가 붙은 순간부터 아무도 여고수(女高手)나, 여야장(女冶匠)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 많던 이름난 고수들 가운데 혈교 교주를 꺾은 게 여인이고 그 손에 들린 무기를 만든 것 또한 여인이었으니 소문내고 싶지 않았겠지.”
우아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당자혜의 말에 제갈수원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마 그 소문내고 싶지 않은 누군가에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을 듯한 기분이 드는 남궁세가 형제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술을 홀짝거릴 뿐이었다.
“자리가 없습니까? 이런.”
문득 창밖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먼 풍경을 바라보던 청휘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난간 밖을 향했다.
주루의 입구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남녀 한 쌍과 그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들은 대부분 무기를 패용한 데다 기도가 범상치 않은 무인들이었다.
“지금 온 사람들은 자리가 없어 거절당한 모양이네.”
“우린 조금 일찍 와서 운이 좋았네요.”
“운이 좋긴. 다 이 형님이 힘을 쓴 덕분이지.”
거들먹거리는 청운에게 수연이 말했다.
“그럼 좀 도와주시지 그래요? 보니까 다들 무인이고, 도장(道長)도 계시는 거 같은데.”
“도사? 난 그런 번지르르한 소리나 해 대는 족속들은 따악, 질색이거든?”
“일행 중에 소저도 있는 것 같은데요.”
커다란 사내들 사이에 있어서인가 유독 작아 보이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있는 사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흰 손은 분명 젊은 여인의 것이었다.
‘이린도 이제 열일곱이 되었을 텐데.’
검은 면사로 꼼꼼히 가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여인을 본 청휘는 이린이 떠올라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뭘 그렇게 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어? 아니. 아는 사람인가 하고 잠깐 봤는데. 면사 때문에 잘 모르겠네.”
이린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싱겁게 웃으며 시선을 돌리는 청휘를 보며 수연도 피식 웃었다.
“난 또 천하의 남궁청휘가 어떤 아가씨한테 한눈에 반해서 눈을 못 떼나 했지.”
“그 정도로 쳐다보진 않았다.”
“어, 뭐야, 뭔데요? 청휘 형님을 한눈에 반하게 만들 정도의 미인이라도 지나갔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제갈수원이 끼어들어 창밖을 기웃거렸지만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 외에는 모두 아저씨들뿐이었다.
“넌 어린애가 무슨 말투가 그렇게 아저씨 같니.”
“아니, 제가 뭘요?”
투덜거리는 제갈수원과 남궁수연을 보고 웃는 사이 1층 입구 쪽에서 면사를 쓴 남녀를 둘러싼 일행들이 수런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볼래?”
“나는 괜찮으니까 다른 데 가 보자. 다들 배고프잖아. 나중에 다시 오지, 뭐.”
멀리 들리는 여인의 목소리는 아직 앳된 소녀의 것이었다. 움찔해서 돌아보았지만 방금까지 주루의 입구에 있던 면사의 여인과 그 일행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 그 사람들 결국 그냥 갔나 봐요.”
“연꽃 필 무렵이라 동정호에 놀러 온 사람이 많은걸, 뭐.”
“실은 여기 검성 때문에 유명한 거 아니에요?”
“강호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기는 하지. 다른 문파나 세가 사람들을 마주칠 가능성도 높으니까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해라.”
남궁청운의 안 어울리는 훈계에 남궁수연과 제갈수원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방금 왔던 사람들도 강호인이잖아요. 어느 문파인지는 몰라도 도장도 계셨고.”
“돌아다니다 보면 도사고 뭐고 발에 채이도록 많다. 일일이 안면 트고 다닐래?”
“좀 도와주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생각해 보니 우리 자리도 넓은 편이고.”
“난 성가신 거 싫다.”
여전히 딱 잘라 거부하는 남궁청운을 보며 남궁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친척 동생다운 폭언을 던졌다.
“사람이 그렇게 치사하니까 여자한테 차이는 거예요.”
“뭐, 뭐 인마?! 아, 안 차였거든?”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화를 내는 남궁청운을 보며 나머지 네 사람이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헐, 누군데요. 누가 청운 형님을? 얼굴도 잘생겼겠다, 돈도 많겠다, 무공도 뛰어나겠다, 어디 가서 처지는 인물이 아닌데?”
“크흠. 역시 수원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구나.”
제갈수원의 순발력 있는 처세술에 기분이 좋아진 남궁청운을 보며 남궁수연이 말을 이었다.
“동정호에서 만난 무희(舞姬)라고 들었는데. 아니, 항주의 가희(歌姬)랬나?”
“무희가 형님을 차……. 거부하다니 무척 담대한 사람이네요.”
“뭐, 시연향의 설요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무희지.”
“와아.”
자기 얘기도 아닌데 우쭐해하는 남궁청운의 옆에서 제갈수원이 추임새를 넣으며 살살 부추겼다. 그러자 남궁청운은 술술 자기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사람한테 기밀 같은 건 못 맡기겠는데.’
아이들이 자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신이 나서 설요를 만나러 다녔던 얘기를 늘어놓던 남궁청운의 이야기는 어느새 이상한 방향으로 귀결됐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여자한테 빠져서 돈 쓰지 마라……!”
“네에…….”
남궁청휘도, 황보산도, 제갈수원도 비교적 세가에서 얌전히 공부만 하던 애들이라 남궁청운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비장하게 말하고 있지만 결론은 돈 쓰고 진상 부리다 출입을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다며 출입 금지당했다, 는 얘기였다.
대충 얘기를 들은 당자혜와 남궁수연이 몰래 전음을 주고받았다. 원래 안면은 있어도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동정호까지 오는 길에 많이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어지간하면 참고 돈이나 더 뜯었을 텐데 오죽했으면.
-그래도 집 몇 채 값은 받았다는 거 같으니 손해는 아니라나 봐요.
-흐음. 남궁세가 소공자다운 씀씀이네요. 하지만 더 받아 낼 수 있었을 텐데 왜 찼을까요?
-출입을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게 더 중요한 손님이 오실 예정이었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우선순위가 밀려났군요. 대체 어떤 손님이었기에 남궁세가의 공자를 거절했을까요.
-대공자한테 혼이 나서 한동안 헛짓하고 다니지 말란 소릴 들을 정도였는데 오지 말라고 했으니 뭐 분할 만도 하죠.
여자들끼리 남일 보듯 잡담하는 사이 불똥은 아직 이쪽 방면으로는 무고한 소년들에게 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