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1
11.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느긋한 여유를 만끽하던 이린의 평화는 불청객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저 아이를 잡아!”
이린이 있는 별실에 우르르 몰려든 건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린이 아닌, 이린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있는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몰려드는 이들이 평범한 건달패가 아닌 무림인들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본 이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만요!!”
“―!!”
사내들이 달려들려는 순간, 이린의 목소리가 그들을 저지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무게가 실린 음성에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이린을 향했다.
안 그래도 이린의 외양에 놀라 잠시 동요했던 이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충분히 겁을 먹을 만한 상황임에도 어린 소녀가 동요 없는 차분한 얼굴로 그들과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이린은 떨고 있는 아이에게 만두 하나를 더 건네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식사 중인 별실에 들이닥쳐 이리 소란을 피우시다니 참으로 무례하시군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
방 안에 있는 것은 어린아이 둘뿐이었다. 아이 혼자서는 앉기도 힘들어 보이는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이린의 파란 눈을 마주한 이들은 당황한 듯 흠칫 몸을 뒤로 뺐다.
이 근방에는 연가장의 여식인 이린에 대해 아는 이들이 많았지만, 타 지역에서 온 이들이 이린에 대해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눈치를 보던 일행 중 청수한 기운의 중년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소매의 매화 문양 덕분에 이린은 그가 어디 출신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화산파(華山派).’
화산파라면 정파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거대문파 중 하나였다.
이린이 자신과의 혼인을 상품으로 걸었을 때 불문(佛門)인 소림은 당연히 불참했지만. 도가(道家) 계통인 무당파와 화산파의 본산 제자들은 드물게 참가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경합에 참가하는 것 자체를 불명예스럽다 여기는지, 매화 문양을 달고 다닐 정도의 고수는 좀처럼 보질 못했기에 이린에게는 다소 낯설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는 화산의 2대 제자 윤승재라 한다.”
“윤 대협이시군요. 저는 이곳 호남 연가장주의 여식입니다. 혹시 이 아이에게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호남 연가장주라면 군자검 아닌가? 군자검에게 저런 딸이 있었어?
뒤쪽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지만 이린은 못 들은 척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옆에서 손에 든 만두를 다급히 먹다 콜록거리고 있는 아이에게 차를 따라 주는 이린의 여상스러운 태도에, 윤승재는 난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 그 아이와 아는 사이인가?”
“아니요. 배가 고파 보여 먹을 걸 주고 있었을 뿐입니다만. 혹시 이 아이가 뭔가 나쁜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이린의 대답에 사내들이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혹여나 연가장과 연관이 있을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이거 이제 보니 화산파만 있는 게 아닌데?’
사내들의 복장도 무기도 제각각. 정파인임은 분명해 보였지만, 대충 봐도 여러 문파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 시기에 호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벌써 20년 전, 이린이 8세 때의 일이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어도 어린 이린에겐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갑작스레 식사를 방해해 미안하구나. 우리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흉적(凶賊)을 찾고 있을 뿐이란다.”
“흉적이요.”
이린의 담담한 시선이 자연스레 벌컥벌컥 차를 마신 후 다시 만두를 오물거리고 있는 어린아이에게로 향했다.
흉흉한 사내들이 무서운지 이린 뒤에 숨어 만두만 먹고 있는 아이는 어딜 봐도 그런 흉한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설마하니 이 아이가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고수라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강호에서는 거지와 중, 혼자 다니는 여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그것이 조금 변질되어 반쯤 우스갯소리로 미인과 노인, 어린아이를 조심하라는 말도 있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실은 실력을 감춘 고수일 수 있다는 뜻이다.
거지들의 단체인 개방(丐幇)에는 무공을 익힌 거지들이 있고, 숭산 소림사(少林寺)에는 무술을 익힌 승려들이 있다. 또한 흉흉한 세상에 겁 없이 홀로 다니는 여인이 뜻밖의 고수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개방이나 소림 같은 유명한 곳이 아니더라도 무공을 익히면 노화가 늦어지는 데다,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 환골탈태(換骨奪胎)로 젊어질 수도 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고수들이 어디에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고수들이 어디 길거리에 돌처럼 굴러다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만두를 다 먹고 사내들이 무서운 듯 이린 뒤에 숨은 아이는 너무 어렸다.
이린 앞에 있는 이들도 딱히 아이를 경계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아이 자체가 위험한 존재는 아닌 듯했다.
‘그럼 남은 건 이 아이의 부모나 보호자가 범상치 않은 존재란 뜻인데.’
이린에게 변명하기 위해 윤승재가 입을 열 때였다.
“그런 뜻이 아니라 저 아이는…….”
“쿨럭!”
“―!!”
아이가 다시 쿨럭거리는 소리에 또 뭔가 먹다 걸렸나 싶어 뒤돌아본 이린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아가야?!”
괴로운 듯 끊임없이 기침을 하는 아이의 눈과 코와 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곧 앞으로 풀썩 쓰러진 아이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귀에서 흘러나온 피가 다시 흘러 들어갈까 봐 균형을 맞춰 안아 든 이린이 맥을 짚었다.
‘맥이 요동치고 있어. 음식은 내가 먹었던 걸 똑같이 줬으니 문제가 있다면 내가 멀쩡할 리 없고, 설령 몸에 맞지 않은 음식이 있었다 해도 보통 피를 토하지는 않을 텐데. 중독되어 이러는 거라면 검은 피가 나올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안은 채 등을 문지르며 한쪽 손으로 맥을 짚던 이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사내들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다! 우린 정파의 인물들인데 저런 어린아이에게 살수(殺手)를 쓰겠느냐!”
“의술을 배우신 분은 안 계신가요? 안 계신다면 의원을 불러와 주세요!!”
“아, 그, 그래!”
이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제야 몇몇이 다급하게 달려 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린아!?”
소란이 커진 탓인지 주루의 주인과 이현이 달려왔다. 이현은 이린을 둘러싸고 있는 흉흉한 사내들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덩치만 보면 성인 남성과 비슷해 보이는 이현이 나타나자 잠시 긴장했던 사내들은 이현을 부르는 이린의 목소리에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오빠!”
“제 여동생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소협께서는?”
“호남 연가장의 소장주 연이현이라 합니다.”
“연 소협이셨군요. 저희는…….”
무언가 설명하려던 두 사람의 대화는 주루의 주인을 부르는 이린의 목소리에 끊겼다.
“아저씨,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의원을 불러와 주세요! 다른 사람들이 부르러 갔지만 외지인들이 쉽게 찾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술렁이는 가운데 아까 윤승재라고 자신을 소개한 화산파의 제자가 자신이 의원은 아니지만 아이의 혈맥을 살펴보겠다며 다가왔다.
“화산의 이름을 걸고 이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실 수 있나요?”
“맹세하겠다.”
“믿겠어요.”
이린의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에 가장 놀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누구도 아닌 이현이었다.
안 그래도 무슨 일인지 무인들이 몰려와 있어 걱정된다는 루주의 말에, 이곳이 어딘지 모르는 이는 없으니 무도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 안심시키고 돌아오던 참이었다.
마침 친분이 있는 형산파(衡山派)의 제자들과 만나 잠시 안부를 나누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려던 차에, 이린이 있던 별채에서 사람들이 급히 달려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동생이 험악한 무림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보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정작 이 어린 누이동생은 형형한 눈빛의 무인들 사이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기혈(氣血)이 엉망이구나. 기맥(氣脈)이 막혀 뒤엉켜 있는 것을 보니, 이 아이의 상태가 하루 이틀 사이에 이렇게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말하며 윤승재가 내기(內氣)를 운용해 아이의 뒤엉킨 기혈을 바로잡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곧이어 도착한 의원이 아이를 진찰한 후 조심스레 침을 놓자 증상이 점차 완화되었다. 하지만 의원 역시 같은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타고나길 뒤틀린 체질을 가진 아이 같습니다. 지금껏 살아 있는 것도 신기하군요. 지속적인 치료로 어찌 연명은 할 수 있겠지만, 의원이나 내가의 고수가 지속적으로 돌봐 주지 않으면 어려울 듯합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말하자면 타고난 불치병을 가진 아이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아이를 잡으려던 이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착하기 짝이 없는 이린의 오빠 이현의 얼굴은 침통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 되겠네.’
하여간 착해 빠져 가지곤.
“오빠, 아픈 애를 여기 계속 놔둘 수는 없으니 일단 장원으로 데려가자.”
“린아?”
“아저씨, 이 아이의 부모가 찾아오거든 연가장으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예, 아가씨.”
이린이 눈짓하자 이현이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이 아이의 부모에게 볼일이 있으신 거라면 여기서 기다리시든, 따라오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난감해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이린은 이현을 이끌고 연가장으로 돌아왔다.
올 때처럼 경공으로 서둘러 돌아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겨우 상태가 안정된 아이에게 괜히 안 좋은 영향이 있을까 싶어 관뒀다.
“놀러 나왔다가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 놀랐지?”
“괜찮아. 근데 생각해 보니 오빠 제대로 먹은 게 없는데 배고프지 않아?”
“아아. 노악을 만나서 얘기할 때 적당히 먹었어.”
노악은 같은 호남에 있어 약간 교류가 있는 형산파(衡山派)의 제자였다. 이현과는 동갑이라 어릴 적 몇 번 만난 이후 서신으로 친교를 이어 가고 있는 친구 중 하나라 이린도 기억하고 있었다.
‘성격은 썩 안 닮았는데 말이지.’
생각해 보면 옛날부터 이현 주위에는 왜인지 성격이 이상하거나 더러운 놈들만 득시글거렸다.
“오빠, 가끔은 오빠랑 비슷한 성격의 친구도 사귀고 그래.”
“……??”
뜬금없는 말에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이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장원으로 돌아온 이린은 장 총관과 아버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아직까지 정신을 잃고 있는 아이를 손님방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