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13
113.
‘아니, 거기서 왜 울어! 미쳤나 봐!!’
청운진인의 당부대로 굳이 숙소로 돌아간 김에 아예 옷까지 갈아입고 완전범죄를 획책한 이린은 처음엔 들떠서 홀로 거리를 거닐었다. 그동안 주로 다녀 본 연가장과 연가상단 주변의 시장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린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퍼져 있어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자신을 알아볼 이가 없어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리고 역시 말로만 듣던 동정호의 풍경을 보고 싶어 일부러 조금 인적이 없는 호숫가를 향했고, 비천산에서 보던 석양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넋을 놓고 감상에 젖어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청아, 홍아도 있으니 엄연한 의미에서 혼자는 아니었지만.
바람에 불자 면사가 흩날려 걸리적거렸고 안 그래도 모처럼 보는 풍경이 면사 때문에 가려지는 것이 아까웠던 이린은 죽립이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면사를 벗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거기서 마주친 거지?’
하필 그곳에 익숙한 얼굴과 마주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사실 면사를 벗은 거야 뭐 그리 문제되진 않았다.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남궁청휘는 이린을 알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하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눈에 익은 준수한 소년의 얼굴을 마주하자 한동안 잊고 있던, 그날 보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버렸다.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대뜸 눈물을 흘리다니 이상한 사람 같잖아.’
기억보다 어린 남궁청휘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이린은 힘껏 땅을 박차다 문득 제정신이 들어 멈춰 섰다. 바로 멈추자니 위험한 것 같아 한 발 더 내디뎌 호숫가에 매어져 있는 나룻배 위에 멈춰서 죽립을 다시 고쳐 썼다.
“보고 있던 사람은 없겠지?”
이건 이것대로, 너무 눈에 띄는 경공이었다. 누군가 무공을 익힌 이가 보았다면 놀라서 주목했을 속도였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남궁청휘가 자신을 뒤쫓아 오지는 못했으리라.
……뒤쫓아 올 이유도 물론 없지만.
‘이제 보이지 않겠지.’
새삼 생각하니 아쉬웠다. 이런 데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조용히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다행이다. 정말 살아 있구나.’
아직도 이유 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을 훔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남궁세가에 갔을 때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을 은근히 후회하고 있었던 만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억보다 앳된 얼굴의 남궁청휘를 본 것은 솔직히 기뻤다.
그런 생각을 하며 뒤돌아보자 저 멀리서, 용케 이린이 달려간 방향을 잡고 따라오는 남궁청휘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이린을 발견한 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걸려 하는 것이 보였다.
“!?”
“저기, 잠시만요-!”
당황한 이린은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연이어 정박해 있는 뱃전을 통통 튕기듯 움직이는 이린은 새삼 주변을 의식하느라 전속력으로 달리지 못하고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석양을 받으며 호숫가를 달리는 남녀의 술래잡기는 아쉽게도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굉장한 경공이다.’
이린을 쫓아 전속력으로 달리던 남궁청휘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이린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어릴 적 이린을 만나고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던 경공을 의식하며 경공 수련에 꽤 힘을 쏟았다. 그런데도 이린을 따라잡는 데 이렇게 힘이 부치다니.
‘하지만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 놓칠 순 없지.’
따라잡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이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달릴 뿐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청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며 소리 지르듯 말을 걸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움찔한 이린이 비어 있는 어느 어선의 선미에 잠시 멈춰서 뒤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따라오지 마요!”
“왜 도망가시는 겁니까?”
“나, 낯선 사내가 갑자기 따라오는데 어떤 여인이 도망가지 않겠어요?”
“소저 같은 경공의 소유자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뛰쳐나가는데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무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린은 청휘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호수가 아닌 숲이 우거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도 이렇게 어색하지 않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둘 다 무위가 높다는 뜻이었다.
이린은 청휘가 계속 따라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이 이상 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의미 없는 술래잡기는 앞서 달리던 이린이 동정호에 도착하곤 근처에서 보지 못한 어느 숲속으로 들어서며 끝났다.
“후우.”
멈춰 선 이린이 숨을 고르고 홱 뒤를 돌아보자 말문이 막힌 것은 무리해서 뒤따라온 청휘 쪽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집요하게 따라올 필요는 없잖아요!!”
“그건…….”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나요? 당신이 봤나요?”
“아, 아닙니다!”
생각 없이 따라온 덕분에 할 말이 없어진 청휘가 당황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이린의 목소리가 점점 뾰족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 왜 따라온 거야?’
이린은 찔릴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분명 오늘 처음 본 사이고, 이린은 그저 풍경 구경을 하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놀라 자리를 피했을 뿐이었다. 물론 경공이 좀 지나친 감은 있었지만 그야 이린의 자유였다.
하지만 약혼녀도 있는 청휘가 여자 꽁무니를 뒤따라온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럼 왜 따라온 거죠?”
“저는 그저…….”
아직까지 귓가에 올리는 시끄러운 심장 소리에 정신이 없는 청휘는 지금 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이 지나치게 달려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이린을 만나면 어찌할까 혼자 생각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그제야 자신이 지금 이린과 처음 만나는 사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이러면 날 무뢰한으로 알 텐데!’
남궁청휘는 호흡을 가다듬고 서둘러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이 남궁 모가 소저에게 실례를 범했음을 알고 있으나 실은, 그저 소저께서 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물지으시는 걸 보고 마음이 쓰여 그만 뒤따라왔습니다. 혹여 제가 모르는 사이 소저께 다른 무례를 저지른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적 없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초면에 그런 걸 봤으면 그냥 못 본 척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송구합니다.”
이린이 돌아서자 청휘는 어쩔 줄을 몰라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린도 어쩔 줄 몰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왜 또 따라와요.”
“이런 곳에 소저를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경공이 뛰어난 것은 방금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무공까지 뛰어나리란 법은 없었다.
‘이린이라면 무공도 뛰어날 것 같지만.’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진 남궁청휘는 허둥대며 변명을 떠올렸다. 그리고 뒤늦은 자기소개를 하려 했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남궁세가의…….”
“아이고, 청춘 남녀가 이런 곳에서 사랑싸움인가?”
“그래도 우린 아가씨 덕분에 부수입 좀 올리겠는데.”
안타깝게도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남궁청휘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이린과 청휘가 돌아본 그곳에는 두 사람이 동정호에 오는 동안 마주쳤던 이름 모를 누군가들과 비슷한 복장과 눈빛을 한 사내들이 있었다.
자신들이 대체 어디까지 왔기에 또다시 이런 뜻밖의 조우를 하게 된 것일까 난감해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이런 으슥한 곳까지 들어오다니 겁이 없……!”
퍼억!!
빠악!!
산적을 본 적이 없었다면 당황했을지도 모르지만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복장과 무기들을 들고 있어 준 덕분에 두 사람은 주저 않고 동시에 발차기를 날랐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린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산적들의 얼굴을 가격해 단 번에 기절시킨 두 사람이 동시에 땅에 발을 디뎠다. 산적들이 강제로 침묵하게 되자, 두 사람 사이에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청휘가 작게 심호흡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이 끊겼습니다만 저는…….”
“어이, 이봐! 무슨 일이야!!”
“…….”
“…….”
웅성거리며 나타난 시커먼 사내들의 모습에 청휘도 이린도 말없이 검을 들었다. 일행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두 사람의 실수였다.
“위험하니 피하시는 게.”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린의 차가운 목소리에 상처받은 청휘의 마음을 대변해 준 것은 놀랍게도 산적들이었다.
“어이, 아가씨. 그렇게 쌀쌀맞으면 남자들은 상처받는다고. 우리가 잘 교육해 줄…….”
물론 전혀 기쁘지도 고맙지도 않았기에 청휘는 낄낄거리고 있는 사내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저런 자와 의견이 엇비슷하게 맞았다는 사실에 남궁청휘는 입술을 깨무는 대신 문답무용으로 손에 들린 검을 휘두르기로 했다.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그런 말을 들은 정도는 못 됩니다.”
순식간에 혼자서 서넛은 되는 사내를 가뿐하게 제압한 남궁청휘를 보고 이린이 감탄하자 청휘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쓰러진 산적들을 뒤로 걷어찼다. 하지만 혹여 산적들의 동료가 더 몰려오기라도 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린을 재촉했다.
“여기는 위험한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시지요. 저는…….”
“잠시만요.”
이린이 한쪽 손을 들어 청휘의 말을 멈추게 하고는 귀를 기울였다.
“이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네? 잠시만요. ……소저!”
청휘는 자신이 말을 할 때마다 끊기는 것을 느끼며 산적들이 온 방향으로 겁 없이 들어가는 이린의 뒤를 따랐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옷까지 뺏겼는지 반쯤 헐벗은 홑옷 차림의 사내들이 묶인 채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린이 들은 신음 소리의 진원지는 여기였던 모양이었다.
“사, 살려 주세요…….”
그들을 발견한 이린이 직접 다가가려 하자 청휘가 말리며 자신이 앞을 가리고 섰다.
“괜찮으십니까?”
그들은 숲에서 만난 산적들이 부인과 아이들을 끌고 가고,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며 하소연했다.
산적들은 길에 시체가 널려 있으면 신고가 들어가거나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봐, 일부러 외진 곳에 끌고 와 죽이려 했던 모양이었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연에 이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 어서 관에 알려 주세요!! 그놈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이린과 청휘가 일단 진정하라며 산적들이 쓰러져 있는 곳을 가르쳐 주자 사내들 몇몇이 무슨 기운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갔다.
“관에 신고해서 해결이 될까요?”
너무 멀리 달려와서 여기가 어디 관할일지는 잘 감이 안 왔지만 이린이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사람들을 뒤쫓아 가니 기절한 산적들의 옷을 빼앗고 묶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신매매를 할 정도면 당연히 뇌물도 썼을 듯합니다만…….”
청휘도 나름 곱게 자라 저런 처지의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말투에 한숨이 섞였다.
‘오면서 본 산적들을 오빠가 굳이 관에 들러 당부까지 해 가며 처벌해 달라고 한 이유가 그건가.’
붙잡아 와 처벌까지 해 달라고 부탁한 이의 얼굴이 있으니 쉽게 놓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 따지면 이린은 이런 일처리에 그리 적합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린의 옆에 있는 것은 그 유명한 남궁세가의 직계인 남궁청휘였고, 아마 그도 자신처럼 혼자 나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뒤처리는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청휘는 일단 기절해 있는 사람까지 마저 풀어 주고 지혈까지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소저께선 돌아가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여기는 제가 사람을 불러와 해결할 테니,”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여인과 아이들도 있다고 했죠?”
“네…….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면사 때문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린의 표정이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청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테니 바로 구해 내는 것이 좋겠군요.”
“하지만.”
“우린 이곳 지리를 모르니 도움을 청하는 것은 시간이 걸릴 테고, 신고를 한다 해도 제대로 대처해 주려면 그만한 신분이 필요하겠지요. 아까 남궁세가분이라고 말씀하려 하셨죠? 경공이 뛰어나신 남궁세가분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네……? 네.”
“소협께서 수고해 주세요. 저는 남아서 산적들을 유인해 볼게요. 저기 쓰러져 있는 산적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분명 낌새를 눈치채고 달아날지도 모르니까요.”
“위험한 말씀하지 마십시오. 대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불을 지르려고요.”
“…….”
예전에 언젠가 이런 비슷한 말을 들어 본 적 있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청휘는 애써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