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17
117.
“와아.”
“그렇게 제 딸과 옷을 바꿔 입은 제갈가의 아가씨를 붙잡아 간 죄로 당시 이 근방을 주름잡던 사파 집단 몇 개가 사라졌지요. 이 나이 먹도록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가시려는 것을 붙잡고 은인들의 성함을 여쭈었는데 가르쳐 주질 않으셨지요.”
“그럼 어떻게 알았어요?”
“어린 소저는 막내라고만 부르셔서 함자를 알지 못했지만, 다른 분들은 몇 번인가 서로 이름으로 부르셨기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검성과 마련야장으로 명성이 높아지셔서 당연히 그분들이시구나 했지요.”
뜻밖에 알게 된 어머니의 호방한 과거사에 남궁청휘는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본인이 강호를 주유할 적 이야기를 자주 하는 분은 아니었다. 다만 그리 얌전하기만 한 분은 아닐 거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데 젊을 적엔 생각보다 활달하셨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편이 어머니에게는 더 좋지 않았을까.’
지금껏 자라며 봐 온 바로는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던 부모의 모습에 아들은 회의적인 생각을 품었다.
사실 사이가 좋다 나쁘다는 표현을 쓰기가 어려울 정도로 청휘의 부모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정략결혼이 다 그런 거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웃었지만,
‘그게 웃을 일인가?’
남궁청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 중 대부분은 남궁청휘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청휘의 반응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가 검성과 인연이 깊군요.”
“여협들 간에 친분이 있으셨던 게죠.”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지는 사이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면사의 귀부인이 한 듯 물었다.
“그런 일이 있는데 왜 관에 도움을 청하지 않지?”
“푸훗.”
누가 보아도 세상 물정 모르는 귀하신 분의 의문에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어처구니없어하며 웃음을 흘렸다.
제 주인을 비웃는다 생각했는지 주변에 있던 검을 찬 무인들의 미간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무인들뿐 아니라 짐을 들고 시중을 드는 여인들까지 여럿이 시립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지간히 신분이 높은 귀부인인 모양이었다. 뒤쪽에 아이를 안은 유모가 보이는 걸 보면 친정 나들이라도 가는 길일까.
무인들에게서 은은한 살기를 느낀 당자혜가 내심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불법이 아니니까요.”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
“빚 대신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은요. 정당한 일이니 과정이 거친 것 정도는 굳이 문제 삼지 않겠지요.”
“하지만 도박은 국법에 어긋날 텐데.”
“음지의 일이라 대부분 관에서도 묵인하고 있답니다. 노름판이 과연 아무 수작 없이 공정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요.”
뒷돈을 받았을 거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당자혜의 말에 와 닿는 것이 있었는지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희 딸아이 얼굴이 곱기로 소문이 나 있었으니 그놈들이 분명 일부러 함정을 팠던 게 틀림없습니다!”
“영감님의 아들 파락호인 거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해 볼 만하다 했지 않겠수? 소운도 그 집에서 오라비 뒤치다꺼리하느니 기녀가 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
“뭐가 어째?”
노인장의 말에 딴지를 건 이는 을 훤히 아는 동네 토박이 뱃사람들이었다. 덕분에 다점은 여기저기서 화제가 전환되며 소란스러워졌다.
“어차피 기녀가 되었어도 먹고살기는 힘들지 않았겠어?”
“맞아, 나중에 혈교인지 뭔지 때문에 기녀들이 장사가 안 돼서 울상이었잖아.”
“기루에 갔다가 암살당하는 일이 부지기수니 누가 기녀를 찾겠소?”
“내로라하는 기녀들이 죄다 혈교 간자들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는걸.”
당시에는 칼 한번 뽑아 보지 못하고 기루에서 암살당한 고수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나름 이름난 이들도 상당수가 꽤 고상하지 못한 최후를 맞았으니 다들 몸 사리느라 기루 출입이 줄었을 정도였다.
아직도 기녀들 사이에 혈교가 숨어 있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덕분에 기루 출입이 잦은 이에게 무섭지 않으냐고 놀리는 풍조와 나는 혈교 따윈 두렵지 않다며 호기를 자랑하는 풍조가 동시에 존재했다.
“남궁 대협께서도 풍류에 조예가 깊으시다 들었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루에서 난봉꾼으로 악명 높은 손님들이었다는데 나같이 건전한 손님이 무서워할 이유는 없지. 혈교는 무자비하게 사람 죽이는 걸로 유명한데 기루에서만 사람을 가렸겠나?”
듣기에 따라서 띄워 주려는 것으로도, 돌려 까려는 것으로도 들리는 애매한 질문에 남궁청운이 퉁명스럽게 답하자 질문을 던진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허나 당시 기루에서 이어졌던 의문사에 대해 남궁세가의 의견을 듣고 싶은 이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하여 기루에 가질 못하는 이들도 많지 않습니까. 검황 어르신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그렇게 무서우면 안 가면 될걸. 남의 의견을 뭐 하러 물어봐.”
사람들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지 알 것 같은 청운은 히죽 웃으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남궁세가 직계 중에 기루에 신경 쓰는 놈은 나밖에 없거든?”
검황은 기루에 대해 신경 쓸 생각이 없다는 뜻인 동시에, 아들이 기루를 들락거리는 것 또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뜻밖의 내놓은 자식 선언에 다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선주(船主)가 남궁청운을 찾아왔다.
“남궁 삼공자님.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배에 오르시지요. 일행분들도 저를 따라오십시오.”
남궁청운이 코웃음을 치며 먼저 몸을 돌렸고, 더 이상 생산적인 대화가 이어질 것 같지 않아 일행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검황은 옛날부터 염문설 하나 없는 분 아닌가.”
“완고하고 결백한 성정이라 흠모하는 이들도 많았고.”
“일찍 혼인하신 데다 기루 같은 곳에 출입한 적도 없으시니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귀부인은 흥미로운 듯 웃었다.
“이런 소문을 듣는 것도 꽤 재미있군. 역시 나와 보니 좋구나. 세하 그자의 말대로야.”
“귀하신 분께 어울리는 곳은 아닙니다.”
“귀하신 몸이라.”
그리 중얼거리는 부인의 눈에 면사를 쓴 사내와 여인 하나가 일행을 따르지 않고 아까 그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저희 딸이 그 뒤로 어찌되었냐고요? 그건 왜….”
“도망쳤소!”
노인장이 대답하기도 전, 아까 노인의 말에 딴지를 걸던 뱃사람들 중 하나가 대신 소리쳤다.
“한번 도박으로 사람 팔아넘긴 놈이 두 번은 안 할까? 도박한 아들놈 손모가지를 부러뜨리진 못할망정 오냐오냐하니 그 짓을 또 벌이지! 소운이 아주 잘 도망갔어!”
“도박 좀 했다고 자식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어!!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놈인데!”
“그렇다고 딸을 팔아??”
아까에 이어 다시 싸움이 시작되자, 다점의 주인장이 찻잔을 정리하다 말고 다가와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궁금해하고 있을 다른 손님들더러 다 들으란 듯 커다란 목소리였다.
“또 빚에 팔려 갈 처지가 된 따님이 결국 야반도주를 했거든요. 덕분에 아저씨가 아직까지 우리 가게에서 일하며 빚을 갚고 계시죠.”
“흥!! 제 애비랑 오라비까지 버리고 어떤 놈팡이를 따라갔을지 알 게 뭐야!!”
“소운은 그런 여자가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점점 격해지는 싸움을 보며 주인장이 지금 싸우고 있는 저이가 젊을 적 그 아가씨를 짝사랑했다고 슬쩍 덧붙이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점을 나섰다.
“혈육이라고는 참으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 많구나.”
그리고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귀부인 역시 피식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는 드물지 않은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린 이들을 제외하면 다점에서 눈에 띄던 대부분의 손님은 밖으로 나온 터였다.
다점을 나선 귀부인의 눈이 자연스레 아까 본 면사의 남녀를 찾았다. 딱히 말을 걸 생각은 없었지만 사이좋게 멀리 있는 배에 오르는 두 사람에게 묘하게 시선이 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본 여인은 그저 주변 풍경을 보고 있었다는 듯 찬찬히 시선을 돌렸다. 일행이 하나같이 무기도 패용하고 있으니 저들이 강호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시선을 들키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라 애써 모르는 척했다.
“뭐지?”
“글쎄, 얼굴 가린 사람들끼리 동질감이라도 들었나.”
시선에 일일이 신경 써서야 집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갈 용모의 소유자인 남매는 여인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배에 올랐다.
지금도 이린을 은근히 뒤쫓는 시선이 있었으니 새삼스럽진 않았다. 그리고 그 상대는 지금 같은 배에 올랐으니, 아까 그 여인과 달리 이린에게서 시선을 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묘하게 간질간질한 뒤통수를 난감하게 문지르는 이린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수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린? 왜 그래?”
“으응, 아냐. 그런데 배 안에 주연이 준비되어 있는 거야? 그래도 괜찮나?”
“유람이 목적이니까 아무래도 호숫가를 크게 벗어날 생각은 아닌가 봐.”
“아, 저기 봐.”
배가 출발하자 주변을 살피던 이린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걷고 수연이 이끄는 대로 함께 경치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기 봐. 벌써 연꽃이 피었어.”
“아, 해가 지면 연꽃 모양 등을 띄워 놔도 예쁠 것 같지 않아?”
배에 오른 뒤 내내 이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청휘는 소매 속에 있는 물건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멀어지는 이린을 보며 손을 거뒀다. 소녀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또 괜히 눈이라도 마주칠까, 슬쩍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이린이 있는 곳만 유독 밝아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행이 탄 배는 남궁청운이 전세를 낸 상태였다. 보는 눈이 많지 않아서인지 주저 없이 면사를 걷은 이린의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반짝이는데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뭐라 말을 걸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청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이린에게 다가간 제갈수원이 이린의 옆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와, 와와, 연 소저 면사 걷은 건 오랜만에 보는데 정말 고와요.”
“고마워요. 제갈 공자.”
“어휴, 어린애가 능구렁이 같아.”
“물론! 수연 누님도 고우십니다~”
소년의 넉살 좋은 목소리에 소녀들이 쾌활하게 웃었다. 제갈수원이 아직 어려서인지 이린도 수원을 대할 때면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풍경을 보며 즐겁게 떠들며 웃고 있던 일행은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주연을 마련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