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23
123.
“…보다시피 제법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 남편이 남긴 유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오.”
자조 섞인 미소에 이린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이현을 힐끔거렸다.
“저희는 본래 악양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부인께서는 어찌하실 예정이십니까.”
“악양에서 친정 식구들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소. 염치없지만 그때까지만 신세를 져도 되겠소?”
“심려 마십시오.”
대화가 마무리되는 듯하자 이현을 뒤따라 들어온 설요와 무희 몇몇이 따뜻한 물과 모포를 건네주며 조심스레 부인에게 휴식을 권했다.
“놀라셨을 테니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기는 저희가 잠시 돌보고 있을 테니 조금 눈을 붙이시지요.”
“지금은 조용하니 얌전해 보이지만 이 아이가 보기보다 꽤 까다로운 아이라서 어떨지 모르겠군.”
잠시 경계하는 듯하던 부인은 이현과 이린을 한 번씩 보고는 아이를 설요에게 넘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 품에서 얌전히 물을 받아먹으며 꼬물거리던 아기는 익숙한 품에서 떨어지자 인상을 찌푸리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히잉-”
아이가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설요는 아이가 떨어질까 놀라 몸을 움츠렸다. 당황하는 설요의 옆에 있던 이현이 서둘러 아기를 받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부인에게 이현이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제가 안아 보아도 될까요.”
“아직 미혼이신 듯한데, 아이를 볼 줄 아시오?”
“동생이 나이 차가 많이 나 어릴 적부터 제가 돌봤답니다.”
이현이 이린을 돌아보며 웃자 이린이 입술을 비죽이다 피식 웃었다. 다정다감한 오누이의 모습이 신기한 듯 여인은 묘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린아 어릴 때 생각나네….”
호언장담했던 대로 연이현은 능숙하게 아기를 안아 얼렀다.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빽빽 울어 대던 아기는 마치 사람 차별하듯 금방 연이현의 품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기도 연 공자를 좋아하네요.”
설요의 감탄 섞인 중얼거림에 아이의 어머니 역시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요령이라도 있소?”
“저도 까다로운 아이를 키웠던지라.”
“…….”
기억도 없고 할 말도 없는 까다로운 아이는 제 오라비를 쏘아볼 뿐이었다.
그런 동생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현은 쉬시라며 인사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낯선 이들과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불편할 듯해 이린도 따라나섰다.
다행히 까다롭지 않은 쪽 아이는 얌전히 설요의 품에 안겼기에 유모 역시 부인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린아, 아기를 보는 건 처음이지?”
“응.”
“안아 보고 싶어?”
“아니, 너무 작아서 조금 무서우니까, 됐어.”
“이 정도는 그리 작은 편은 아닌데. 곧 걸어 다닐걸.”
“거짓말.”
이린은 이현의 뒤에 붙어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얼굴에 벌써 이목구비가 잡혀 있는 것이 여아인지 남아인지는 모르지만 필시 십여 년 후에는 미인 소릴 들을 듯했다. 꼬물거리는 손도 이린의 손가락 하나 겨우 잡을 듯 작았다.
“린아도 이렇게 작았는데 많이 컸지.”
“음, 오빠. 그 아련한 시선 좀 그만….”
생각해 보니, 이현의 말대로 아기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낯설고 신기했다.
“작다. 귀여워.”
“린아도 귀여워.”
“하지 마.”
여전히 꿀이 뚝뚝 떨어지는 오누이의 대화에 모두 자진해서 자리를 피했다. 그 와중에 그나마 남매에게 가장 면역이 있는 사람이 다가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자 이현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들은 이런 데서 뭐 하냐. 좀 작작해라.”
“하지만 귀엽잖아? 아, 하긴 너는 애들은 익숙하다 못해 지겹다고 했었지.”
“그런 옛날 말을.”
“우리 린아한테 한 말이었지.”
“어? 그랬나?”
“처음 만났을 때.”
이현의 말에 노악이 기억을 더듬었다.
“아? 아아, 그때…면 이 꼬맹이가 요만할 때 아냐.”
“네? 그렇게 어릴 때 저를 봤어요?”
이린을 한 번, 아기를 한 번 쳐다보며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노악의 말에 이현의 어깨에 반쯤 매달려 있던 이린의 눈이 노악을 향했다.
“그래. 너뿐만 아니고 이 녀석도 처음 본 날. 뭣 때문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스승님이 우리 사형제(師兄弟)들을 끌고 연가장에 간 날이었지. 아직도 그건 기억난다. 이 녀석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나와서 ‘제 동생이에요!’하고 자랑하는데 연 장주님도, 스승님도, 다른 사람들도 다들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뭐야, 내가 한 말은 기억하면서? 이상한 데서 엉뚱한 짓을 한단 말야.”
“음,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네 첫마디는 애기 옷이 너무 얇지 않냐? 였던 것 같다.”
“네가 애 겉옷도 안 입혀서 나왔거든?”
이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둘이 처음 만났을 무렵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이린과 이현의 나이 차를 생각해 보면 아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대략 여덟아홉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 녀석이 얼마나 웃긴 줄 알아? 그 뒤로 나한테 서신을 보냈는데 거의 육아 일기였다고!”
“와.”
“네가 어쩐지 육아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서 그만. 하지만 육아 일기는 따로 제대로 쓰고 있었거든?”
오래 알고 지낸 사이란 하여간 할 말도 많았다.
근데 왜 그 사이에 내가 끼어 있죠. 그것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동생 예쁘지? 귀엽지? 하고 물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그냥 한두 번이 아니고.”
아기를 내려다보며 세 사람이 즐겁게 투닥거리는 것을 지나가는 주변 사람들은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지나쳤다.
남궁청휘 역시 제 옷에 붙은 재를 털어 내며 시선은 슬쩍 그쪽을 향했다.
산만 한 덩치와 안 어울리게 노악은 헤벌쭉 웃으며 아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도를 봐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아이도 노악을 무서워하지 않고 까르르 웃었다.
여기저기서 피비린내와 탄내가 진동하던 분위기도 아기 웃음소리가 들리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남궁청운이 통솔하고 있어 아직 살벌한 수적들의 배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 막내공자는 왜 여기 있어? 지금 저 일행은 대부분 수적들 배에 가 있지 않아?”
당자혜에게 약을 받기 위해 건너온 심여준의 말에 청운진인과 백리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눈치는 어디 갖다 버렸나 봐.”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버려두죠.”
남궁청휘의 시선은 줄곧 이린에게 꽂혀 있었다.
심여준을 제외하고 진작에 그 사실을 눈치챈 이들은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입꼬리는 슬쩍 올라간 채로.
어느 정도 뒷수습을 한 이후 일행은 일단 예정대로 배가 악양에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부인이 유산 싸움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내비쳤으니, 악양에 도착해 안전한 곳까지 인도한 이후의 일은 어디까지나 집안일이었다. 이린은 부인과 아이들이 걱정되었지만 어설픈 참견은 피하기로 했다. 도움을 청하지 않는데 끼어들기에는 민감한 부분이었다.
이현 역시 이린이 지나치게 타인의 일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기에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신분이 범상치 않아 보일수록, 그 일에 얽히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악양에 도착할 때까지, 일행은 몇 차례 더 수적들의 습격을 겪어야 했다.
통행세를 요구하지 않고 문답무용으로 덤벼드는 것을 보면 절대로 평범하게 영업하는 수적들은 아니었다.
“남의 집 재산 싸움에 끼게 될 줄이야.”
“돌아다니다 보면 참 별일이 다 있지.”
덕분에 경험이 짧은 어린 소년 소녀들은 뜻밖에 풍부한 선상(船上) 전투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활약이 돋보인 건 당자혜였다.
독과 암기를 쓰는 만큼 소모도 컸지만 당자혜의 소매가 한번 펄럭일 때마다 수적들이 와르르 쓰러지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제 동료들이 쓰러져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 수적들의 안색 역시 볼만했고.
‘과연 연연벽화(連延碧花).’
이미 그 별호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독수(毒手)에 걸리면 몸에 푸른 꽃이 피는 듯 독이 퍼져 나간다는 살벌한 별호의 주인다웠다.
“굉장해요!”
“이 정도는 별거 아니랍니다.”
이린의 순수한 찬사에 당자혜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당자혜의 활약에 이린이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본 이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얼굴을 했으나 차마 지적할 순 없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린과 이현은 그 활약하는 이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너무 심려 마세요. 아가들이 무서워하잖아요.”
“연 소저.”
부인은 습격이 있을 때는 자신을 구해 준 이린이 시야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듯했기에 수적들이 습격할 때 이린은 오히려 대부분 안쪽에 붙어 있어야 했다.
이현은 말할 것도 없이 아기 때문이었다. 유모가 있었지만 부상이 심했고 두 아이 중 하나가 유독 사람을 가리니 이현은 보모 노릇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드디어 악양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에 연씨 남매는 내심 숨을 돌렸다.
“여러모로 미안하오. 우리 때문에 모처럼의 뱃놀이도 망쳐 버렸군.”
“급한 용무가 있던 것도 아니고, 뱃놀이는 나중에 얼마든 다시 할 수 있는걸요. 그렇지, 아가?”
“아응-”
어설프게 대답 비슷한 소리를 내는 아기를 어르는 이린을 보며 부인이 평온하게 웃었다.
부인은 종종 이린을 청해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이현과 이린이 우애 좋게 서로 따르고 아끼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은공들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소.”
“딱히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연 공자도 그렇고 오누이가 똑같기도 하지.”
“부인이야말로, 괜찮으신가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이린의 질문에 부인은 빙긋 웃었다. 바로 얼마 전 곁에서 모시던 측근을 모조리 잃어버린 이의 웃음이라기에는 어딘가 차가운 것 같기도, 오싹한 것 같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