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4
14.
“오빠, 언제 들어왔어?”
“아까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불도 안 끄고 잠들었나 했지.”
“아직 잘 시간은 아니야.”
이현은 고개를 젓는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하지만 피곤하지? 오늘 일도 많았고.”
“음, 그렇지.”
“오랜만에 오빠가 재워 줄까?”
농담 섞인 이현의 말에 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놀란 것은 오히려 이현 쪽이었다.
“와아~ 우리 린아,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갑자기 어리광을 부릴까?”
“헤헤헤.”
끔찍하게 죽었던 사람이 눈앞에서 멀쩡한 얼굴로 살아서 웃고 있는데, 조금은 어리광 부리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이현은 제 품에 폭 들어오는 이린이 품에 폭 안기자 이현은 이린을 안아 들고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우리 린아,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하고~ 예쁘고~”
“그만해, 그만.”
그만하라며 손을 내젓자, 굳이 다 맞아 주며 허허 웃는 이현을 보니 갑자기 또 꿈을 꾸는 것만 같아 이린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유모나 보모 대신 그 빈자리를 채워 주었던 오빠. 아버지도 그래서 어설프게 보모를 들이지 않으셨던 게 아닐까.
“자아. 오빠가 옆에 있을 테니까 푹 자.”
이현의 말에 이린은 그제야 이현이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아침에 이린이 무서운 꿈을 꿨다고 대성통곡한 것이 신경 쓰였으리라.
“자고 일어나면 오빠랑 아빠가 또 없어지지 않을까.”
이미 아빠는 집에 없기도 하고.
이불을 덮어 준 후 이현은 어린 소년답지 않게 검을 익히느라 거칠어진 손바닥 대신 부드러운 손등으로 이린의 눈꺼풀 위를 덮었다.
“아버지는 금방 돌아오실 거고, 오빠는 린아 두고 아무데도 안 가.”
노곤한 몸에 수마까지 덮쳐 와 정신이 몽롱해지는데도 다정한 목소리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순간 이린은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을 내뱉었다.
“나 있잖아. 굉장히 긴 꿈을 꿨는데…….”
“응.”
“아빠랑 오빠가 남의 집 도와주러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거야.”
“…그래서 그렇게 울었구나. 무서웠지?”
어쩐지 있을 법한 일이라, 이현은 웃음도 안 나와 그저 쓰게 웃었다. 아침에 갑자기 오빠는 도망쳐서라도 살라던 이린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아버지는 오늘 바로 다른 사람을 도우러 떠나시지 않았나. 어쩌면 그런 아버지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린이 불안해 그런 꿈을 꾼 걸까.
“모르겠어. 아빠도 오빠도 없으니까 내가 장주가 되어야 하잖아. 모두 나를 쳐다보는데… 울 수가 없었어.”
“…….”
이린의 말에 이현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 어린 동생이 그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
“장원을 함께 지킬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할 사람도 찾았는데, 그 사람이 일이 있어 나갔다 돌아오지 않아서 결혼은 못 했어.”
“어떤 놈인데.”
“잘 모르는 사람인데 무공이 쓸 만해서 결혼하기로 했었어.”
“…….”
‘결혼을 잘 모르는 놈이랑 하면 어떡해.’ 이현이 작게 중얼거리자 이린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다 갑자기 어디에 무슨 비고(秘庫)가 있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내가 그게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하니까 갑자기 장원 사람들도, 몰려든 사람들도, 절반이 강도로 돌변해서…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은 날 지키다 모두 죽어 버렸어.”
“…그래.”
“나는 마지막까지 도망 다녔는데, 결국 혼자 남아서 살해당했어.”
어린 동생 입에서 살해당했다는 말이 담담하게 나오자, 이현의 손이 움찔 떨렸다. 꿈속의 일이라지만,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였다. 애써 불쾌한 기색을 감추며 이현은 이린을 도닥였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잖아. 좋은 일이 생길 꿈인지도 모르지.”
“응.”
부드러운 이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린은 ‘그래야 해.’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빠와 아빠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정반대의 꿈이었다.
이현은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이린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오빠가 계속 린아 곁에서 지켜 줄게. 린아는 아무 걱정 하지 말렴.”
“오빠랑 아빠가 못 미더워.”
“아버지 그 말 들으면 우신다…….”
웃음기 섞인 다정한 목소리.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가족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다정한 속삭임에 이린은 천천히 잠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찰나의 꿈이고, 자신은 난자당해 불타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오빠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언제나 자신을 안심시켜 주던 목소리.
하지만 오빠는 죽었잖아.
오빠에게 보호받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
또다시 눈을 떴을 때 오빠가 없으면 어떻게 해?
불안과 함께 이린의 의식은 서서히 수마에 잠겨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린은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누워 있었다. 이미 한밤중인지 불빛이라곤 없었다.
‘얼마나 잔 거지? 정말 피곤했나?’
맑아진 머리로 슬슬 몸을 일으킨 이린은 잠들기 전까지는 없던 탁자 위의 밀전병을 보고 피식 웃었다. 평소보다 일찍 잠든 이린이 자다 일어나 배가 고플까 봐 준비해 두고 간 모양이었다.
밀가루 반죽에 고기와 채소가 듬뿍 들어가 있어, 어릴 적부터 식욕이 왕성하던 연씨 남매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맛있다.”
이것 역시 이린에게는 그리운 맛이었다. 이 전병을 만들어 주던 소소는 이린이 아직 어릴 적에 장원을 떠났으니까.
‘아직 장원에 남아 있구나. 못 나가게 막을까.’
혼인하고 장원을 떠난 소소의 남편은 술만 마시면 부인을 패는 개망나니였다고 들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장원으로 도망쳐 온 소소를 이린의 아버지가 상단에 청해 다른 성으로 보내 주었다고 했던가.
타인의 인생에 얼마나 개입해도 좋을지 고민하며 전병을 오물대던 이린은 잠시 고민 끝에 옷을 챙겨 입고 남은 전병을 챙겼다.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목검도 함께.
“내 기억력 꽤 쓸 만하네.”
이맘때 한창 검술 배우고 싶다고 오빠한테 부탁해 목검 하나 슬쩍해서 휘두르고 다녔었지.
이린은 검을 잡기에는 아직 작은 손으로 목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아침에 조금 움직여 봤을 때 어느 정도 확신은 했지만, 솔직히 약간 불안했기에 기억하고 있는 검법 몇 개를 시전해 보았다.
‘괜찮아.’
아직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어린 몸이라 자신이 익히고 있던 수준보다는 어설펐지만, 자신의 기억이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걸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어린 민영의 몸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확인하지 않을 순 없었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조용히 문을 열고 나섰다. 밖은 깜깜했다.
오늘부터 장원은 장주가 부재중이다. 그에 경비가 삼엄해진 것은 자명한 일. 이린이 밖으로 나가는 걸 가만두고 볼 리도 없었다.
‘몰래 나가는 수밖에.’
이린은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한 후 소리 없이 담장 위로 몸을 날렸다.
‘우리 장원 경비 이대로 괜찮은가.’
아무리 장원 구조를 꿰고 있어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이린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단번에 장원을 빠져나왔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였지만, 지금보다 어릴 적부터 오빠와 기초 체력 단련을 함께해 온 몸이었다. 경공을 펼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전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지만.
장원을 빠져나온 이린은 그 길로 마지막 기억에 있는 뒷산, 아니 비천산을 올랐다.
사실 장원이 산에 있으니 뒷산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렇게 불러 입에 붙은 탓에 새삼 정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금 걱정했던 몸 상태도 다행히 한잠 자고 나니 가뿐해져 있었다.
익숙한 산길을 확인하고 연가장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달빛 아래 조용하기만 한 연가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이 꿈일지도 모르지.”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본 연가장은 화염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었건만, 지금 연가장은 고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혹시 보고 싶어 하는 환영을 보게 하는 기문진에라도 걸린 건가 의심도 해 봤지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도 눈앞의 풍경도 너무 생생했다.
무엇보다 어려진 몸에서 느껴지는 이 어린아이 특유의 활기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무공을 익혀 단련한 몸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이린은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꿈이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소의신녀(素衣迅女) 연이린.
스물여덟의 자신은 이곳 연가장(燕家莊)의 장주(莊主)였다.
이린이 아직 스무 살이었던 8년 전, 지현문에서 일어난 의문의 혈겁으로 연가장은 연가장주 연적훈과 소장주 연이현을 포함한 장원의 주요 고수들을 잃었다.
위태로워진 연가장을 어떻게든 지켜 내려 아등바등했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하잖아.’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있는 이 평화로운 풍경을 자신이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마지막으로 꿈을 꾸는 것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헉, 헉.”
거의 무의식적으로 달려가던 이린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가슴을 문지르며 숨을 골랐다.
‘지금 어린아이라는 걸 잊고 무의식적으로 달려 버렸네.’
아직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몸이 여기저기 비명 지르는 것을 느끼며, 이린은 눈앞의 익숙한 경치를 눈에 담았다.
비천산. 연가장의 소유지만 연가장의 무인들조차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이린의 기억 속에 이 산은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기억과 똑같아. 이 길을 수십 수백 번 달렸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린에게는 마음 편히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연가장을 집어삼키기 위해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무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젊은 여인이 연가장을 홀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린 자신조차도 수많은 고수들을 잃은 연가장을 홀로 지켜 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린은 장례를 핑계로 방문한 수많은 조문객들 앞에서 아직 미혼인 자신을 상품으로 내걸었다.
[연가장의 유일한 혈연은 저 한 사람뿐이니 연가장은 제가 물려받을 겁니다. 하지만 저 혼자 연가장을 이끌어 나가기는 무리겠지요.] [연 소저.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 [선친께서는 제 혼인에 관해선 제 뜻을 존중한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혼인한 사내가 저와 함께 연가장을 이끌게 될 겁니다.]연가장이 가진 것은 적지 않았다. 비천산 일대의 토지와 객잔은 물론, 건실한 상단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장주였던 연적훈은 상단의 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상단주에게 일임해 둔 덕분에 상단의 운영에 큰 타격은 없었다.
[소녀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나 경공(輕功)만은 뛰어나니, 경공으로 저를 능가하는 분을 부군(夫君)으로 맞겠습니다.] [아가씨!!]흰 상복을 입고 슬픔에 오열하는 대신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장례에 찾아온 문상객들 앞에서 경공으로 자신을 이기는 자와 혼인하겠다고 밝힌 이린을 보며, 연가장의 식솔들은 경악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문상객들 대부분이 밝아진 안색을 애써 감추며 대꾸하려는 순간, 이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