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52
152.
“후우, 이제 겨우 항주야?”
여행자 특유의 가벼운 옷차림의 소녀가 수통에 있는 물을 마시며 숨을 돌렸다.
가벼운 옷차림이라지만 안목이 있는 자라면 소녀의 차림새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타고 있는 말의 안장과 고삐조차 고급품이었으니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한숨을 쉬었을 정도였다.
집 몇 채 정도는 능히 나올 정도의 재산을 몸에 두르고 있는 소녀는 거침없이 말을 몰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뒤따르던 이들은 기운이 넘치는 소녀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한숨을 쉬며 매달렸다.
“아가씨, 제발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직까지 그 소리야? 난 이대론 안 돌아가!”
“저희가 죽는데요?”
“저런, 고용주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나일 텐데?”
안타깝게도 맞는 말이었다. 급료를 주는 사람이 주인이니 소녀가 그들의 주인이었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부모님에게 말도 없이 가출을 감행한 소녀라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아니긴 뭐가 아냐, 가자.”
재주도 좋게 말을 달리며 대화를 주고받는 일행은 대화 내용과 달리 꽤 평온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티격태격 언쟁을 벌이며 말들을 재촉하는 일행 앞에 나타난 것은 여행길의 필수 관문, 산적 떼였다. 물론 이미 먼 길을 달려온 이들이 새삼 산적의 등장에 놀랄 리는 없었다.
“가진 걸 모두 내놓으면 목숨만은-”
“돈 필요해? 그럼 가져!”
“???”
촤아악!!
산적들이 진부한 작업용 대사를 마저 읊기도 전, 선수 쳐 외친 소녀가 무언가를 꺼내 산적들을 향해 뿌렸다.
“악! 아얏!”
“으악! 뭐, 뭐야, 암기? …가 아니네?”
자신들에게 뿌려진 무언가에 화들짝 놀란 산적들이 소녀가 던진 것을 서둘러 집어 들었다.
맞아서 아프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은자?”
“헐? 돈?”
바닥에 떨어진 은자를 보고 당황해 무기를 떨어트리는 이조차 있었다.
“받아라! 어리석은 도적놈들!”
산적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전낭에서 작은 은자와 동전을 한 움큼씩 꺼내 뿌리기 시작했다. 고수는 동전을 비수처럼 쓴다지만 그런 차원의 금액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산적들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아얏, 아야얏? 도, 돈이다?!”
“악, 은자야?! 은자 맞아? 아얏, 이거 진짠데?”
“아야, 이건 내 거다!!”
“아니, 잠깐, 이놈들이… 기, 기다려!! 니들만 줍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산적은 자신들에게 돈을 상납하는 것도 아닌 집어던지는 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잠깐 저항했으나, 알량한 직업윤리를 지키기에는 너무 많은 은자였다.
“이랴!”
판단력이 흐려진 산적들이 은자를 줍느라 정신없는 사이, 소녀의 말은 멈추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소녀의 곁에서 비슷한 속도로 말을 몰고 있던 여인이 황망한 목소리로 외쳤다.
“으흐흑, 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나 바빠!”
“저렇게 돈을 낭비하지 마시라고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내 돈으로 무슨 짓을 하든 무슨 상관이야?”
“저건 도적들이잖아요!”
“그럼 다 목을 베는 게 좋아?!”
“그, 그건…!”
여인이 차마 다 죽여 버리란 말은 못 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서는 다른 의미의 한탄이 이어졌다.
“우린 대체 왜 있는 거지.”
“무급 노동이 좋긴 한데 밥값 못하는 이 기분 뭐지.”
산적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직업윤리를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호위 무사들의 자괴감 섞인 목소리를 뒤로한 채 소녀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목표는 서호다! 달려!!”
* * *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처음엔 정말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주장하던 이린은 결국 그냥 포기하고 오빠의 간병을 받기로 했다. 사실 성이 찰 때까지 받아주지 않으면 또 울까 봐 무서웠다.
“맞다. 그러고 보니 나 어제 아빠 꿈꿨어.”
“아플 때는 원래 그런 거야. 아버지야말로 요새 악몽 안 꾸셨나 모르겠네.”
보통은 엄마를 찾지만.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이현은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의 머리카락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데.’
왜 다들 그렇게 수군거릴까.
이린은 고분고분 오빠가 주는 밥과 약을 먹고, 다른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느냐 뒤늦게 안부를 챙겼다. 어제 너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남궁 공자는 왜 다친 거야? 내가 도망치던 때에는 분명 멀쩡했는데.”
“독안혈수의 공격을 받아 내고, 한쪽 팔을 잘랐다더구나. 너와 당소저를 쫓는 것을 막으려고 한 거겠지.”
“아.”
이린은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동생을 못 본 척하며 이현이 말을 이었다.
“나는 못 봤지만 검기를 다뤘다고 하니 다들 난리더구나.”
“벌써?”
검기라니. 이린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안타깝게도 평생 검을 휘둘러도 재능이 없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만 성공해도 기재라는 말을 듣는데 너무 이른 성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궁청휘 위에 있는 세 형들 역시 평범하게 그 기재의 범주에 속했다.
“남의 집안사까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본인은 좀 힘들어지겠지.”
“으응.”
‘예전의 남궁청휘도 꽤 빠른 편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닐까. 내가 준 영약과 비급 때문인가? 하지만 남궁세가에서 구해다 먹이는 영약도 많았을 테고, 아니 그렇다 해도 너무 이른데. 혹시 예전에도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그렇다면 지금 청휘의 실력이 드러난 것 역시 이린의 책임이었다. 아직 약관도 안 된 소년이 혈교의 고수와 맞붙는 불상사를 만든 장본인이니까.
식사를 마친 이린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남궁 공자에게 사과하러 가 봐야겠다.”
“당 소저가 아니고?”
“당 소저도 안 좋아?”
깜짝 놀라 묻는 이린을 보며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까 너를 찾아왔었거든.”
“당 소저한테도 가 봐야지. 어제 제대로 못 봤어.”
우는 오빠 달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만.
이린은 본인이 중독되었던 것은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자신과 동행했던 이들의 부상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자혜의 방을 찾아간 이린은 우선 차분하게 진맥을 받은 후,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떤 의미로는 이현보다 더 했다.
“알겠어요?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을 하면 안 돼요. 연 소저가 죽을 뻔했잖아요.”
“그야. 당 소저라면 해독약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이린의 대답에 당자혜는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제 스스로 독침에 등을 내줬다는 말을 들으니 혈압이 솟구치는 듯했다.
“해독한다고 다가 아니에요. 그리고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일이 있다고요. 해독제가 분실되었거나! 파손되거나! 혹은 체질적으로 독에 더 취약하거나! 그럴 경우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연 소저가 죽으면, 내 손으로 연 소저를 죽인 나는요! 내가 받을 충격은 생각 안 했어요?”
생각보다 격앙된 당자혜의 말에 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뭐죠. 그, 날 그렇게 걱정할 줄은 몰랐는데, 하는 얼굴은.”
당자혜의 말에 이린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달아 올랐다. 정곡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입가에 헤실헤실 미소가 걸렸다.
“어어. 아하하. 아뇨. 그냥, 음. 저기, 당 소저?”
“뭐죠.”
“자혜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마음대로 해요.”
처음에는 면사로 가리고 있어 몰랐지만, 처음 만난 날부터 묘하게 호감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이린이었다. 모르는 사이 자신이 이린을 구해 준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기억을 더듬어 봤을 정도였다.
피차 사천과 호남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 그럴 리는 없었지만.
사천당가의 사람을 경원시하는 시선에는 익숙했지만. 이런 강아지 같은 시선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조금 뚱한 얼굴로 답한 당자혜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나도 이린이라고 부를 테니까.”
“네!”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이린의 얼굴이 꼭 놀아 달라 보채는 강아지 같아 잠시 망설이던 당자혜가 슬쩍 눈치를 보다 물었다.
“…머리카락 만져 봐도 돼요?”
“네에.”
망설임 없는 대답과 함께 방긋 웃는 이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당자혜는 이런저런 잔소리를 이어 갔다.
“그러고 보니 이린이 구한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죠?”
“아. 잊고 있었어요.”
그러다 문득 그 일에 휘말린 아이들이 화제에 오르자 그제야 아이들의 존재를 떠올린 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리고 흐느적거리며 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회복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당분간은 좀 주의하도록 해요.”
“와, 이게 현기증이란 건가. 신기하네.”
어제는 그냥 몸에 힘이 없어 그런가 했더니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이린의 얼빠진 중얼거림에 당자혜는 쯧쯧 혀를 차며 이린을 데리고 일어났다.
“한동안은 빈혈 증세가 좀 있을 테니 조심해요. 식사 잘 챙겨 먹고요. 아이들 어느 방에 있는지 모르죠? 안내해 줄게요.”
함께 여행하며 이린이 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건 알게 됐건만, 혼자 두는 건 못미더웠다.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방은 멀지 않았다. 사실 건물 하나를 통으로 빌린 상태라 어느 방에 들어가도 크게 문제되진 않았겠지만.
“잘, 못 했어요. 힉.”
자혜와 함께 아이들이 묵고 있다는 방으로 찾아간 이린은 인사를 건네기도 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들 때문에 당황해 굳어 버렸다.
“어?”
“아.”
당황하는 이린과 반대로 당자혜는 뭔가 아는 얼굴이었으나 이린에게 설명해 주진 않았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말렴. 꼬마야.”
“히익.”
당자혜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린은 아이들이 왜 겁에 질려 있는지 깨달았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얘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렇지?”
“흑. 으으흑. 죄, 송해요.”
결국 아이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일단 애들을 달랜 아린이 당자혜의 눈길을 피해 제 품으로 숨는 아이들을 다독였다.
울먹이는 애들을 달래서 겨우 사정을 들은 이린은, 아이들이 먹을 것을 주겠다는 말에 속아 따라갔다가 중독되어 협박당했다는 말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살던 아이들은 맞아요. 개방에서 확인해 주더군요.”
이미 확인된 사항인지 당자혜가 설명을 덧붙였다.
“혈교랑 관계가 없는 것이 확실하다니 다행이네요. 괜찮으니까 떨지 말고 일어나, 응?”
몸을 바닥에 붙이고 덜덜 떠는 아이에게 일어나라 한 이린은 여자아이의 손에 붕대가 감겨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다, 뭔가 깨달은 듯 깜짝 놀라 외쳤다.
“혹시 그 손! 그때 다친 거니?!”
“네?”
붕대를 감고 있는 손은 마지막에 독이 묻은 소도가 들려 있던 손이었고, 이린은 그 흉악한 할배가 던진 검이 소도에 맞도록 몸을 틀었다.
다행히 잘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실수해서 손을 다치게 한 건가 싶어 이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제 뒤에서 달리며 모든 상황을 보고, 아이들 치료한 것도 확인한 당자혜가 대신 나서서 설명했다.
“아뇨, 다섯 손가락 모두 무사해요. 이린이 각도 조절에 실패한 게 아니라 그때 충격으로 좀 삐끗한 것뿐이에요.”
“아.”
흉악한 마두가 던진 검이니, 소도에 맞았다 해도 들고 있던 손이 무사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후우. 깜짝 놀랐네.”
어린애 손가락이 잘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는, 이제 끌려가나요?”
“?”
“동생만은 제발 자,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아니, 너는 운 없이 휘말렸을 뿐인데 너한테 화를 내는 건 불합리하지.”
이린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부르튼 손은 이린의 손에 비해 너무 작았다. 이린은 떨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달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