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56
156.
일행과 떨어진 당자혜와 연이현은 약재를 파는 가게가 밀집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인적이 조금 드물어지자 당자혜가 잡담하듯 말을 꺼냈다.
“연 소협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네?”
“이린…. 혹시 어릴 적 독에 중독된 적이 있나요? 아니면 독성이 있는 영초를 섭취했거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해하는 이현에게 당자혜가 전음을 날렸다.
-사천당가 사람이 쓰는 독은 치명적인 극독이에요. 아직 어린 소녀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중독되고도 경공으로 뛰어 달아날 수 있는 독이 아니에요. 게다가 이린의 회복은 너무 빨라요. 마치 체내에 있던 내성이 독을 제압한 것처럼요.
“…….”
“뭔가를 캐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독을 쓰는 사람으로서 확인을 하려던 것뿐이니 마음에 담아 두진 마세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현이 물었다.
“이린이, 독에 내성이 있습니까?”
“독도 독 나름이니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요.”
“그래요. 그렇군요.”
눈을 깜빡이는 연이현의 얼굴에는 확연한 안도와 기쁨, 그리고 희미한 슬픔이 섞여 있었다.
복잡해 보이는 표정에 당자혜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어봤나요?”
“아닙니다. 다만 그 아이는 몰랐으면 하는 일이라.”
“알았어요. 말 안 할게요.”
“감사합니다. 당 소저.”
“감사하실 거 없어요. 난 그냥 이린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니까.”
명료한 목소리에 연이현이 빙그레 웃었다.
“당 소저가 아니었다면 이린은 크게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저 때문에 다쳤거든요?”
“하지만 그것 역시 이린을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그야, 그렇죠.”
“누이가 좋은 벗을 사귄 듯해 오라비로서 기쁠 뿐입니다. 워낙에 겁이 없는 아이라 늘 가슴을 졸입니다. 너무 과보호라 여기실지 몰라도 제게는 아직도 어리게만 보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곁에 붙어서 감시할 수도 없겠지요. 부디 이린을 잘 부탁드립니다.”
“뭘 부탁하시는 거예요. 아직 어리다 해도 충분히 제몫을 하던걸요.”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연 소저는 정말 좋은 오라버니를 뒀네요. 부러워라.”
이 동생이 잠깐 사이 또 무슨 말썽을 피우는지도 모르고 두 사람은 그저 평온했다.
* * *
이제는 아예 없는 일, 아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된 혼약의 상대를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한 이린이 굳어 있는 사이, 곽천영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와 이린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 나 기억 못해?”
“?”
이린은 찔리는 바가 있어 움찔 떨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지금의 이 사람이 날 알 리가 없으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예전에 장사에서 만났잖아? 그때도 소매치기를 붙잡은 나한테 네가 지금처럼 시비를 걸었고. 이 얼굴이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얼굴이 아닐 텐데.”
“장사? 소매치기?”
곽천영의 말에 이린은 기억을 더듬었다. 꽤 오래전 일이었지만 이린의 평탄한 어린 시절 중 몇 안 되는 유혈 사태였으니 기억할 만했다.
이린은 기억 속의 폭력 미소년과 눈앞의 미남자의 얼굴이 닮았음을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
“그때 그!?”
“오, 역시 기억하는구나?”
청년은 방금 전까지 사람을 무자비하게 패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상큼한 미소로 이린에게 들이대기 시작했다.
철썩-!
“연 소저!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눈치채고 달려온 남궁청휘가 무례하게 이린의 팔을 잡고 있는 곽천영의 손을 쳐냈다.
“넌 뭐야?”
“그 손 떼.”
놀라서 얼떨결에 잡혀 있던 이린도 그제야 자신이 곽천영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리 일행한테 뭐 볼일이라도?”
그리고 이린의 뒤에는 청휘와 마찬가지로 달려온 노악이 곽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며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법한 노악의 거구에도 곽천영은 위축되기는커녕 신기한 듯 휘파람을 불었다. 노악이 불쾌해하는 낌새를 느낀 이린이 일단 싸움이 나지 않도록 말렸다.
“아, 저기, 괜찮아요. 안면이 있는 사람이에요.”
“친구?”
“으음. 비슷한… 거?”
“거?”
일단 조금은 표정을 누그러뜨린 노악의 질문에 이린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일방적으로 기억하는 구 혼약자에, 어릴 적 한번 본 사이인데 친구라니 좀 그렇지 않나.’
이린은 어릴 적 보았던 난폭한 소년과 자신이 기억하는 혼약자의 모습을 겹쳐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사람은 안 변하는구나.”
“흐음. 이번에는 그때처럼 패지는 않았는데?”
당연히 이린이 어릴 적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천영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사람을 피 떡으로 만들어 놨던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관대해졌다고 주장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당시 만났던 소년과 이린이 기억하는 약혼자를 비교하면 차분해졌다고 할 만했다.
“게다가 일관성 있는 성격 덕분에 이렇게 다시 만난 거 아냐?”
“하아.”
“잘됐다. 어쩐지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 만나고 싶기도 했고.”
“어? 왜?”
우리가 그럴 만한 사이였던가.
의아해하는 자신과는 대조적으로 곽천영은 무척이나 반가워했기에 이린은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좀 떨어지는 게 어때.”
곽천영이 동요하는 이린에게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본 남궁청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야말로 뭔데.”
“그,”
이린과 무슨 사이냐는 말에 대답할 말이 궁해진 남궁청휘가 굳는 것과 동시에 이린 역시 내심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인가? 하지만 친구 약혼자랑 친구인 것도 이상하지?’
요사이 남궁청휘와 가까워졌던 이린은 새삼스럽게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남궁청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안 그래도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싸움이라도 벌일까 걱정스러웠다.
“저기,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남궁 공자.”
“연 소저.”
어릴 때 잠깐 안면 있는 사이인 게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혈교 때문에 신경 쓰이지만 지금 여기서 싸움 나면 곤란해. 일단 얽히지 말….’
“대공자.”
“!”
순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이린의 시선이 여인에게로 향했다.
‘유영!!’
너무 반가워서 그만 붙잡고 끌어안을 뻔한 이린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단정한 눈매의 여성을 보고 멈칫했다.
‘맞다. 유영이 날 알 리가 없지.’
얼굴을 가리고 있어 망정이지 첫 만남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뻔했다.
유영은 천영을 향해 눈짓하며 무언가 압박을 넣는 듯했다.
‘전음으로 대화하는 중인가.’
대화 내용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천영의 태도에 대해 뭔가 충고하는 모양새가 이린에게는 조금 익숙했다.
유영의 충고가 통했는지 곽천영은 태도를 조금 바꿔 이린에게 정중하게 청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난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차라도 한잔하는 게 어때? 물론 내가 대접할게. 일행들 몫도.”
아까보다 살짝 나긋나긋해진 태도에 이린은 살짝 망설였다. 시선은 자꾸 천영의 뒤에 있는 유영을 향했다.
“우리는 이제 식사하러 갈 예정이니 필요 없어.”
“너한테 묻지 않았는데?”
남궁청휘가 차갑게 거절하자 곽천영 역시 서늘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금방이라도 둘이 싸울 기세라, 이린이 난감해하는 것을 본 유영이 제 주군을 두둔하며 나섰다.
“대화에 끼어들어 송구합니다. 대공자께서 언사가 다소 거친 분이라 무례를 범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그저 아가씨를 뵙고 반가운 마음에 청하셨을 뿐이니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네.”
남장을 하고 있어 얼핏 보면 남자같이 보였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여인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일행인 듯한 여인이 이리 정중하게 나오자 남궁청휘도 유영에게까지 차갑게 대하지는 못했다. 이린은 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한이 돌아온 것은 그런 기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이? 무슨 일이야?”
“아.”
“이현이 없는 사이에 또 무슨 일 저질렀니. 꼬마 아가씨.”
“으음.”
할 말 없는 이린이 대답을 회피하는 사이 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감숙에 있는 대천문의 제자 곽천영이라 합니다. 우연히 어릴 적 인연이 있는 소저와 재회해 회포를 풀고자 하는데 제 언행이 다소 거칠어 오해를 산 듯합니다.”
“흐음.”
내숭을 떨며 정중히 인사하는 미청년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기란 힘든 법. 드높은 미모 기준선을 가뿐히 통과한 곽천영을 향한 백리한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감숙이라니 멀리서도 왔군? 좋아. 마침 주루에 자리를 잡고 왔으니 같이 가지. 일행이 많아 자리는 넉넉하게 잡아 놨거든.”
“감사합니다.”
남궁청운이 보았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모습이었으나, 사실 백리한이 그를 응원해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남궁청운보다는 연이현과 더 가까운 사이고.
무엇보다 백리한은 자신의 즐거움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남궁 사공자가 아무래도 미적미적 재미없단 말이지.’
다소 찜찜한 얼굴의 노악을 잡아끌며 백리한은 히죽 웃었다.
“그때 그 뱀은? 지금도 데리고 있어?”
“응. 청아가 기억하려나.”
이린은 소매 속에서 슬쩍 청아를 꺼내 보여 주며 답했다.
끼이?
이린의 팔을 타고 나온 청아는 슬쩍 곽천영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날 기억 못해? 배은망덕하게. 어, 한 마리 늘었어?”
끼이-
반면에 홍아는 처음 보는 낯선 인물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른 일행들은 교우 관계가 많지 않다는 이린이 낯선 미청년와 친분이 있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힐끔거렸다. 이린이 데리고 있는 뱀에 대해 아는 걸 보면 정말 면식이 있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청휘였다.
‘설마 예전에 이린과 함께 장사에서 만난 그 녀석인가.’
과거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울컥한 남궁청휘는 이린의 옆으로 다가가 억지로 곽천영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홍아는 낯을 가리니 함부로 건드리지 마.”
“남이사.”
그런 남궁청휘의 안색을 살피며 나머지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본인을 사이에 둔 남자 둘이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방치한 이린은 슬슬 뒤로 빠져 곽천영의 뒤를 따르던 유영에게 다가가 친밀하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예요? 마찬가지로 감숙에서 오셨나요?”
“…….”
얼마 전까지는 당자혜에게 밀리고, 이제는 처음 보는 여인에게까지 밀린 남궁청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왜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지.’
그렇게 숫자가 늘어난 일행을 데리고, 백리한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주루로 들어섰다.
과연 유명한 이름값만큼이나 화려하고 풍광이 좋은 곳이었는데, 대체 언제 예약을 해 두었는지 몰라도 재주도 좋게 창가 자리에 일행이 앉을 만한 자리가 딱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데.”
이린의 옆자리를 꿰찬 곽천영이 그렇게 말하자 이린이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자기 이름을 말하려 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곽천영은 멋대로 손을 뻗어 이린의 면사를 걷으며 요염하게 웃었다.
“오랜만인데 얼굴 정도는 보여주지 그래?”
“아.”
“예쁘다.”
곽천영은 이린의 면사를 벗기고,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 손길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이린은 옛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사람이었지.’
[미안하지만, 연 장주는 나와 혼인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