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57
157.
처음으로 추월당하고, 필사적으로 그를 따라 달리던 그날. 마지막 도착 지점에 다다르자 곽천영은 굳이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달리던 자신을 끌어안아 멈춰 세우며 그리 속삭였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내였다.
오랜만에 떠올리자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최근에 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지?’
주루에 있던 여인들이 한 번씩 돌아볼 만한 달착지근한 목소리에, 마찬가지로 이린의 옆에 앉은 청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례하군.”
“좀 빠지지?”
“남궁 공자, 저는 괜찮으니까.”
“제가 안 괜찮…!”
울컥해서 말하다 의아해하는 이린과 눈이 마주치자 굳어 버리는 청휘를 그 맞은편에 있던 수연이 집어서 제자리에 앉혔다. 아직 얼마 전 있었던 불의의 사고들로 인한 여파가 남아 있는 탓이었다. 이린도 시선을 두지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곽천영이 이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이름, 안 가르쳐 줄 생각인가?”
“남의 머리카락 멋대로 만지지 마시죠. 연이린이에요.”
“이린.”
“함부로 부르지 말고요. 곽 공자.”
“나도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
“사양할게요.”
적당히 웃어넘기며 이린은 음식 목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 소저, 마음에 드는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주문하세요.”
“하하, 네. 종류가 많아 고민되네요.”
남궁청휘가 오늘도 기꺼이 전주(錢主) 노릇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곽천영이 코웃음을 쳤다.
“뭘 고민해. 어이, 이 주루에 있는 요리 한 종류씩 전부 내와. 그 정도는 내가 내지.”
“네? 넵!!”
“오오.”
통 큰 주문을 들은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 달려가자 두 사람을 제외한 일행 전원은 감탄을 내뱉으며 손뼉을 쳤다.
물론 그 한 사람은 남궁청휘였으며, 다른 한 명은 곽천영의 옆에 앉아 있는 유영이었다.
“곽 공자는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모르는 모양이오?”
“다다익선이라고 들어는 봤나?”
여기서 두 사람의 지갑 대결이 벌어지는 건가 두근두근 일행의 시선이 집중된 그때였다.
쾅!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가 자신에게 모인 주루 안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고 외쳤다.
“자리가 없어? 그럼 주인 나오라고 해! 내가 이 주루를 살 테니까!”
“아이고, 아가씨 제발….”
들릴 듯 말 듯한 애처로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주루 안으로 들어온 이는 온몸을 고급품으로 두르고 있는 기운 넘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낯익은 남궁수연이 어색하게 이름을 불렀다.
“어… 사린?”
“찾았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챈 진사린이 홱 고개를 돌려 남궁수연을 가리켰다.
갑자기 좌중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남궁수연은 순간 당황해 움찔 떨었다. 하지만 곧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평범하게 진사린을 맞았다.
“오랜만이야. 우리 찾아온 거야?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어?”
“개방과 하오문에 의뢰해서 쫓아왔지.”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데?
어이없었지만 개방에서 현재 일행의 움직임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남궁수연과 진사린이 친밀한 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무엇보다 진사린이 아낌없이 은자를 건넸을 테니 거부할 리도 없었겠지.
“사린 언니?”
“앗, 린매. 세상에, 진짜 오랜만이지? 어머나, 여전히 예쁘기도 하지. 아니, 이게 아니라!”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이린을 보고 놀란 사린이 손을 붙잡고 반가움을 표시하다 급 정신을 차렸다. 애써 앙칼진 척하는 고양이 같아서 수연은 내심 킥킥 웃었다.
“역시 같이 있었구나! 어떻게! 나만 빼놓고! 너희들끼리만!”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우연히 만났는걸.”
제갈수원은 두 사람의 순진한 변명을 들으며 아마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조용히 분위기 파악을 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일행을 보며 난감해하는 것은 주루의 점소이였다.
“저기 죄송하지만… 일행이신지요.”
“일단 루주 불러오라니까?”
“아가씨 제발.”
“충동구매 하지 마시고요.”
사린을 따라온 이들이 울고 싶은 얼굴로 한숨 쉬며 매달리는 모습에 다들 슬쩍 시선을 피했다. 주루를 사는 것이 충동구매라니 이건 격이 다른 돈지랄… 아니, 지갑질?
이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닌 남궁수연이 한탄했다.
“쟨 나이 먹고 어째 더 심해졌어.”
“평소에도 저래?”
“본인이 소유한 지점에서 들어오는 수익이 만만치 않다니 뭐.”
“벌써 소유한 지점이 있어?”
“음. 조부께 일찍 물려받은 게 있다고 들었어. 본인이 운영도 할걸? 수완도 좋다고 들었어. 근데 어쩌고 온 거지?”
이린이 신기한 세계에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진사린의 선명한 존재감에 순식간에 뒤로 밀려난 남궁청휘와 곽천영은 소녀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귀만 기울였다.
“원흉은 운 오라버니니까 우리한테 따지지 마. 아직 식전이지? 자리는 많으니까 일단 여기 앉아. 네 일행들이 다 울고 싶은 얼굴이잖아.”
남궁수연은 능숙하게 회피하며 사린을 끌어들였다. 정말 따라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놀라긴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반가웠다.
“여기까지 온 김에 같이 다니든가. 마침 네 약혼자도 있네.”
수연의 말에 순간 움찔한 이린이 의식적으로 옆자리에 있는 청휘에게서 슬쩍 멀어졌다. 청휘가 의아한 눈으로 이린을 보자 자연히 이린과 가까워진 곽천영이 히죽 웃는 것이 보여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둘 다 초면이죠, 황보산 공자?”
“…….”
“?”
그리고 수연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이린의 시선이 줄곧 조용히 차만 들이키고 있던 황보산을 향했다. 이제 보니 황보산의 시선은 계속 진사린을 향한 채였다. 물론 지금 주루 안에서 진사린을 보고 있지 않은 사람이 더 드물긴 했지만.
“어? 황보…산?”
“그래. 네 약혼자 되실 분.”
남궁수연의 말에 이린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숨을 삼켰다.
‘저 둘이 약혼한 사이라고? 남궁청휘가 아니라?’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 인선은 내가 정한 게 아니다? 황보산 공자가 동행하는 건 나도 나와서 알았거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린은 지금 상황이 달갑지는 않은지 애매한 표정의 황보산과 남 일이라고 속 편해 보이는 남궁청휘의 얼굴을 한번 보고 혼란스러워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 공자가 약혼자라고 말한 적은 없었, 내가 착각하고 있었나? 하지만 왜 사린이 황보 공자와 약혼을…?’
당연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남궁청휘와 진사린이 약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황보 공자가 예전에 누구와 혼인했었지?’
사실 황보산은 이번에 함께한 일행 중 유일하게 이린과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린이 마지막에 함께한 황보연 공자는 황보산의 동생이었고, 황보산은 황보세가의 소가주였으니까.
길어질 것만 같던 황보산과 진사린의 어정쩡한 대치 상황을 끝낸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동석할 거면 앉지그래?”
“당신은 누구야?”
“오늘 한턱 쏘기로 한 사람.”
“그럼 앉아야지.”
곽천영의 말에 진사린은 사양 않고 앉았다. 주루 하나 정도는 충동구매 할 수 있는 대부호도 남이 사는 음식은 거절하지 않는 법이었다.
“아가씨, 저희는 다른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가씨가 다시 주루를 사겠다고 할까 봐 사린을 따라온 이들은 호위 한 쌍만 남기고 후다닥 사라졌다.
“흥.”
그리고 때맞춰서, 곽천영이 주문한 음식들이 줄줄이 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복잡해졌지만, 일단 다들 먹는 게 어때?”
백리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진사린은 황보산이 신경 쓰이는 듯했으나 자리가 떨어져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든 위치에 있다 보니 서로 관심 없는 척하며 음식에만 집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분위기를 대충 눈치챈 이들은 모르는 척 음식 얘기만 이어 갔다.
“음. 항주 음식은 확실히 담백한 편이네.”
“호남도, 호북도, 사천도 차이는 있어도 맵고 자극적인 편이니까요.”
각각 호북, 호남 출신인 제갈수원과 이린이 그렇게 말하며 서로에게 음식을 추천했다.
반면 남궁세가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린 익숙한 맛 같은데.”
“절강은 안휘랑 가까우니까 그렇지 않을까.”
“곽 공자는 어때요? 입맛에 맞나요?”
이린은 문득 옆에 있는 천영에게 물었다. 감숙에 있는 대천문이라는 말은 이린이 예전에 들었던 것과 동일하니 아마도 그쪽 동네에 사는 건 맞지 않을까 싶었다.
“흐음. 나도 뭐든 담백한 것보단 자극적인 게 좋아서.”
그렇게 말하며 곽천영은 이린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린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래요? 보통 추운 지방일수록 음식이 담백해지는 거 같던데.”
“아, 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리한이 입에 넣은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옆자리에 있는 노악이 쯧쯧 혀를 차며 백리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음식이고 뭐고 틀어박혀서 벽곡단만 먹으며 살았다 보니. 그게 어디가 음식이야?”
“그건… 그렇겠네요.”
“…….”
이린은 물론, 곽천영의 수작질을 떫은 눈으로 보고 있던 남궁청휘마저도 그 말에는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어느 집이나 무공에 미친 곳은 애들한테 그런 아동 학대를 저지르는 모양이었다.
이린은 곽천영에게 살짝 동정심이 들었다. 인성 교육은 뒷전에 무공 수련만 시키는 문파라 성격이 저 모양이었던 걸지도 몰랐다.
“곽 공자도 유람 나오신 건가요?”
“편하게 불러. 이 시기가 마침 축제 기간이라고 해서 일부러 맞춰 왔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더라고. 스승님께서 젊을 때 한 번은 가 보라고 하셔서 왔더니만.”
“등 축제는 관심 없는 사람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즐겁게 강 건너 불구경하던 남궁수연이었으나 곽천영에게 호기심이 생겼는지 자연스레 질문을 던졌다. 이린은 수연과 수원이 서호의 관광지에 대한 얘기를 하며 분위기를 이끌어 주자 안도하며 식사를 즐겼다.
“그럼 뇌봉탑에는 가 보셨어요? 우리도 아직 안 가 봤거든요.”
“뇌봉탑?”
“연 소저가 가 보고 싶다고 하셨던 곳이라. 그렇지요?”
“아, 네. 백사전 이야기 좋아하거든요.”
“백사전? 그게 뭔데?”
“백사전을 몰라요?”
“몰라. 처음 들어.”
천영의 말에 다들 신기해하면서도 어딘지 납득했다. 문파 중에는 산에 처박혀서 무공만 가르치는 곳도 있으니까. 게다가 감숙성은 꽤 멀리 떨어져 있고 험지도 많으니 유명한 이야기라 해도 잘 모를 수도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문파지만 거기도 꽤나 애를 험하게 가르치나 보구나.’
무가 아이들만 모여 있다 보니 다들 이해한다는 듯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입담이 좋은 제갈수원이 백사전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하자, 곽천영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애매한 얼굴을 했다.
“백소정은 대체 그 남자의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까지 난리를 친 거지? 1000년이나 수련을 했다며 그냥 혼자 잘 살았으면 됐을 것을.”
“글쎄요. 우선 얼굴이 맘에 들지 않았을까요.”
“흐음. 얼굴이라, 확실히 중요하긴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곽천영은 생선 요리 하나가 마음에 든 듯 즐겁게 우물거리는 이린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