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6
16.
“여기다.”
절벽은 제법 높은 편이었지만, 끝 부분과 건너편 절벽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겁이 많은 이가 아니라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라도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곳이었다.
절벽 아래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폭이 좁은 만큼 유속도 잔잔했다.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는 좀 지치는데.’
한숨과 함께 거침없이 벼랑 끝으로 다가간 이린은 덩굴 몇 개를 잡아당겨 길이와 상태를 확인했다.
“읏차!”
그리고 두 손으로 붙잡은 채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경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성인 여성의 무게 정도는 버텼으니, 지금 이린의 무게 정도로 위험할 리 없었다. 물론 붙잡고 내려오는 게 더 안전하겠지만.
“있다!”
몇 번인가 절벽에 발을 구르며 내려오자, 예상대로 거대한 동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탁!
반동을 이용해 안쪽으로 뛰어든 후 손에 쥔 덩굴을 붙잡아 동굴 안쪽에 고정시켰다. 내려오는 건 쉬웠지만, 올라갈 걸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무 성급했나.’
처음 이 동굴을 발견했을 때 이린의 나이는 12세로, 지금보다 체력이 붙었을 때였다.
그때도 올라갈 때 고생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등에 지고 온 짐에서 옷을 더 꺼내 껴입은 뒤, 등을 꺼내 불을 밝혔다. 아직 제대로 된 무공도 익히지 않은 지금, 등불 없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했다.
“넓긴 넓구나.”
짐에서 실패를 꺼낸 이린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실을 풀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 안의 구조는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기억과 다르다면 큰일이었다. 지금 여기서 길을 잃고 굶어 죽으면 그보다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
이린은 한 손에는 등불을, 한 손에는 아까 챙겨 온 밀전병을 쥐고 우물거렸다. 소풍이라도 나온 양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이린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거 참. 옛날 생각나네.’
진실 확인 겸 민영을 치료하기 위한 비급을 찾으러 나선 길이었지만, 다시 홀로 이곳에 오니 과거가 떠올라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잔혹하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 이 적막한 공간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낮에는 조금 정신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현실을 자각한 이린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빠도, 오빠도 살아 있고 장 총관 아저씨도, 자영도, 장원 사람들도 모두 살아 있어.’
물론 자신과 함께 동굴에 들어와 함께 싸웠던 이들도 지금은 모두 살아 있을 터.
게다가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의 앞날까지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라면 자신이 수년간 이룬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 정도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 동굴의 존재 자체가 그 일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린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이 동굴 안에 있는 것들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있을까?’
이린이 남궁청휘와 동굴 속에 갇혔을 때, 이린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던 영물(靈物).
‘청아 보고 싶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톡톡톡―.
동굴 안의 구조를 기억하고 있는 이린은 거침없이 달렸다. 이전이라면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달렸을 테지만, 지금은 가벼운 발소리가 나는 것조차 즐거웠다.
‘여기도 호수와 이어져 있었고, 이곳을 지나면―.’
촤악!!
물소리였다.
마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다리 위를 지날 때였다.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호수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소리에 이린은 목검을 뽑으며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주둥이가 이린의 눈앞에 있었다. 공격보다 피하는 것을 택하고 몸을 날리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해!!”
“!!”
푸욱―!!
아아아아아아아―.
날붙이가 살에 꽂히는 소리와 동시에, 비릿한 냄새가 풍기더니 마치 짐승의 비명 같은 괴이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이린은 자신을 낚아채 달리고 있는 팔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오빠?”
“후우. 간 떨어질 뻔했네.”
다리를 건넌 후 아까 전의 그 괴이한 생명체가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이현이 겨우 경계를 풀고 이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린을 붙잡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만했다.
이린은 그와 대조적으로 침착하게 물었다.
“저기, 방금 그거 죽은 거야?”
“일단 검이 관통하긴 했는데 죽었는지는 글쎄.”
어쩐지 물속에서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찜찜했지만, 그렇다고 들여다보기도 꺼림칙했다. 게다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비린내가 퍼지고 있었다.
이린은 들고 온 짐을 뒤적여 횃불 하나를 만들더니, 냄새와 소리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쪽을 향해 집어 던졌다.
“린아?”
키아아아아아아아아―
촤악 촤악 촤악!!
툭, 하고 뭔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 같은 것이 들리자, 두 사람은 몸을 움찔 떨었다. 곧 요란스러운 물소리가 잦아들며 비린내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살아 있었나.”
“확인 사살이 중요하구나.”
새로운 교훈을 얻고 잠시 멍해 있던 남매는 곧 정신을 차렸다.
“맞다. 오빠 괜찮아? 안 다쳤어?”
“다치진 않았지만 수명은 한 10년쯤 줄어든 것 같아.”
등불에 이린의 몸을 여기저기 비춰 보며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이현은 그제야 안심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애가! 이 밤중에 집을 나와서 산속이라니! 심지어 이런 동굴은 어떻게 알았어!”
“어, 음, 노, 놀다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앞으로 몇 년 후에, 오빠한테 검술을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하고 산으로 나돌 때. 그때 발견한 곳이었다.
“그런데 오빠는 어떻게 여기 있어?”
“누가 겁 없이 담을 넘는 걸 봤는데 어쩐지 그림자가 너 같아서. 혹시나 하고 가 보니 방은 비어 있고, 전병도 없고. 나와 보니 산속으로 들어가는 그림자가 보여서 따라와 봤는데…….”
기껏해야 집에서 가까운 근처 나무 위에 비밀 장소라도 만들어 놓았겠거니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깊은 산속에 본격적인 동굴을 찾아 들어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어린아이의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행여나 놓칠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이 밤에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어어어, 으음,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 머리를 굴리던 이린의 머릿속에서 아주 흔하고도 드문 단어가 반짝 떠올랐다.
“기연(奇緣)!!”
“기연?”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이린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처음 이곳을 발견한 것 자체가 기연이나 다름없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 여기서 기연을 얻었거든!”
게다가 무엇보다 이린은 이곳에서 정말로 기연을 만났으니까.
소의신녀라는 별호를 얻게 해 준 이린의 경공은 연가장의 것이 아니었다. 12세의 이린이 이 동굴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배운 것으로, 이린 역시 제대로 된 출처를 알고 배운 것은 아니었다.
“정말?”
“정말. 그 검술을 익혀야 하니까 나는 연가장의 검술은 배우지 않을 거야.”
대충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기자, 이현이 알아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아침에 검을 배우지 않겠다고 한 건가……. 그런데 대체 언제?”
“비밀이야!”
“뭐어… 그래.”
어딘지 미심쩍었지만 본인이 어떤 기연을 얻은 것인지 숨기길 원한다면 더 캐묻기는 어려웠다. 동생이 정말 기연을 얻었다면 축하해 줘야 할 만한 일이고.
“그래서 여기는 왜 온 거야? 검을 익히러 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야심한 시간인데?”
“아니이… 실은 여기에 영약이 있는 걸 봤거든. 그게 민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 통하는 법이라, 이린은 결국 가장 중요한 부분을 털어놓고 슬쩍 오빠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혼자 왔어?”
“그게… 전에 봤을 때는 저런 이상한 거 없었거든. 영약이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도 그렇고.”
이린이 전에 이곳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선객이 있었으니까. 이린에게 경공을 가르쳐 주었던 그 사람이 이미 저런 것들을 다 처리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우, 돌아갈 때가 걱정이구나.”
“일단 들어가자.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더 있을지 모르는데도?”
“오빠가 있잖아.”
동굴 안을 눈으로 훑으며 이현에게 매달리는 이린의 눈이 반짝였다.
‘틈 봐서 영약을 먹여 버리자.’
현재 이현의 나이 15세. 나이에 비해 무공의 성취도 높고 오성도 뛰어나니, 영약이나 내단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나이였다.
물론 동굴 안에 위험한 것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청아가 혼자 살아남기 힘들었을 테니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아까 그 생물한테도 반응을 못 한 건 아니었고.’
오빠 목소리에 더 놀랐을 뿐. 이현이 아니었다면 지금 몸으로 잡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도망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뱀 같은 거라면 모를까, 물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고.
“그러고 보니 아까 그거 영물 아냐? 커다란 물고기 같은 거.”
“글쎄. 일단 보통 산짐승 같지는 않았어. 뱀도 아니었고, 물고기 비슷해 보이긴 했는데.”
이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거대 물고기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여기에 영물이 많은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와 오빠가 더 강해지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이 강해지면 죽지 않을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못 가게 막는다고 들을 리도 없고.’
그건 이미 포기했다. 이유가 있다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 테니. 이린이 막아도 무의미했다. 그렇다며 아예 강해지게 만드는 게 나았다.
‘영약 하나는 내가 먹고 빨리 강해져서 영물을 잡으러 다녀야겠다.’
효율을 생각한다면 그편이 나았다. 아버지는 바쁜 몸이고, 이현 역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자신이 강해져야 했다.
어차피 필요한 지식은 이미 다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 수련 외의 공부에 새삼 시간을 빼앗길 이유도 없었다.
‘아, 그럼 전에 있던 영물들은 그 사람이 다 처리하고 내단을 챙겼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빼앗는 게 되는 건가. 미안하네.’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사람 같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뭔가 대신에 보상이라도 생각해 두는 게 좋을까?
적당히 생각을 정리한 이린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