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60
160.
부상자가 섞인 일행의 관광 일정은 느긋했다. 남궁청휘는 아직은 좀 쉬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지만 곽천영이 합류한 이후로는 그럴 수가 없어 꼬박꼬박 따라다니며 곽천영과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부상이 꼭 악재만은 아니었다.
“읏….”
“앗, 괜찮아요. 남궁 공자? 상처 덧난 거 아니에요?”
곽천영이 드물게 이린의 주의를 돌리는 데 성공하면 남궁청휘는 부상을 핑계로 이린의 동정심을 사곤 했으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조금 쉬시는 게 좋겠어요.”
그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뇌봉탑을 향하던 일행은 이어지는 치정 싸움에 흐린 눈을 할 뿐이었다.
특히나 처음 보는 혈육의 교활한 모습에 남궁수연과 제갈수원이 경악해 두 눈을 의심했다.
“난 쟤가 저럴 줄은 몰랐지.”
이린에게 청휘 괴롭히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는 곽천영을 보며 수연이 감탄했다.
역시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었다. 저 고지식한 얼굴의 남궁청휘가 저런 짓도 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쟤는 언제부터 저렇게 린매한테 빠졌어?”
“몰라. 첫눈에 반했는지 아주 그냥 눈을 못 떼더라고.”
“저 대치 구도… 묘하게 끼어들고 싶어지는걸.”
“쟤네는 그렇다 치고, 넌 황보 공자하고 얘기 좀 해 보면 어때? 혼인 전에 얼굴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잖아.”
“됐어. 아직 혼인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고.”
“어, 안 하게? 그러고 보니 너 여기 와도 괜찮은 거야?”
“몰라.”
수연의 말에 답하는 진사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약혼할 상대인 황보산은 이번에 처음 봤지만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고 딱히 잘 아는 바도 아니니 딱히 안 좋은 감정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불만이 있을 뿐.
[사린은 안 돼.]‘왜, 나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못 정해? 쟤도 이제 저가 좋다는 여자애 따라다니는데.’
진사린의 시선은 남궁청휘를 향하고 있었다.
약혼할 뻔한 사이였다고는 하나, 남궁청휘에게 딱히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약혼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생판 모르는 놈보다는 얼굴도 성격도 알고 있으니 낫다는 정도의 감각이었고, 무엇보다 남궁청휘의 처지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적당히 납득한 결과였다.
‘아빠는 남궁청휘가 남궁세가를 물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혼사를 추진했겠지. 이번에 황보세가와 혼사를 맺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친의 그런 계산 역시 알고 있었으므로, 약혼이 깨졌을 때도 ‘걔 괜찮을까?’하고, 나름 남궁청휘의 안전을 걱정했지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약혼이 깨진 이유를 알았을 때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내가 결정해도 되는 거였어.’
남궁청휘는 진사린과의 혼사를 거부했다. 그 결과 강제 폐관수련을 당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으나 어찌되었건 제 인생을 스스로 결정한 셈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혼인임에도 사린은 스스로 정할 수 없었다. 남궁청휘에게서 시선을 돌리던 사린은 자신을 보고 있던 황보산과 눈이 마주쳤다.
“흥.”
진사린은 고개를 돌리며 수연을 잡아끌었다. 뇌봉탑은 산 위에 있었으므로 일행은 지금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생각보다는 높은데.”
“이화를 객잔에 두고 오길 잘했네.”
일행 중 유일한 민간인은 사린의 보좌였는데 이미 서호까지의 여정만으로도 지쳐서 관광을 포기하고 객잔에 누운 상태였다. 일행의 화려한 면면에 사린의 호위도 일부 객잔에 남았다.
남궁청운도 서호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귀찮다고 이현 일행에게 아이들을 떠넘겼으므로, 분명 이린 하나면 돌볼 거라 생각하고 나왔던 이현의 벗들에게는 날벼락이긴 했다.
“근데 일행이 너무 늘었는걸.”
진사린의 호위에 다른 곳에 묵던 곽천영의 일행들까지.
다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무위의 소유자로 보이니 신경 쓰여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참 얻는 게 많아.”
“그래?”
곽천영에게 성의 없이 대꾸하고 있었지만 이린은 뜻밖의 사실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숫자의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천영의 일행이라며 나온 이들은 분명 모두 이린이 알고 있던 천영의 호위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조용히 은신 중인 이들도. 하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어쨌든 이중에 배신자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낫겠지.’
배신자가 있다면 말해 줘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천영이 혈교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서호에 왔으면 뇌봉탑에서 바라보는 서호의 석양을 빼놓을 수 없지.”
“그래서 여기를 나중에 온 거예요?”
“뭐 어두워지면 좀 성가시겠지만 이 중에 밤길을 어려워할 만한 인물은 없는 것 같고, 괜찮지? 사람 수가 너무 많아 주변에 좀 민폐 같기도 하지만 뭐, 괜찮다고 치자.”
안내를 맡고 있는 백리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한의 말대로 서호의 낙조는 아름다웠다. 구경을 마치고, 인원이 많은 만큼 시끌벅적해진 일행이 탑에서 내려올 때였다.
“어?”
이상하리만치 건조한 공기에 다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일행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수선한 소음이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전해졌다.
“무슨 일이죠?”
처음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주위의 다른 여행객들도 무인들로 보이는 일행이 갑자기 고요해지자 덩달아 몸을 움츠렸다.
“화재?”
붉은 노을빛에 섞여 붉은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지?”
“불이라도 난 건가?”
영문을 몰라 하던 이들은 처음엔 작았던 불길이 점점 옆으로, 그 옆으로, 사방으로 번지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내려가 보는 게… 좋겠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가 보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마른 입술을 깨무는 백리한과 연이현, 노악이 아이들을 곁눈질하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
아직 어린 후배들을 데리고 가기에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좌시할 수는 없었다. 불이 난 곳들 중에는, 일행이 어제 구경을 갔던 저자와 주루가 있던 거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내려가죠.”
진사린의 호위들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오히려 이 일행 곁에 있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으로 조용히 따랐다. 사실 자신들이 뭐라 한다고 해서 진사린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행이 내려가기도 전, 먼저 산에서 내려가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왜, 왜구다!!”
“도적이야!! 어서 달아나!”
“꺄아악!!”
공포에 질린 이들의 비명 소리 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왜구’와 ‘도적’이라는 단어였다.
“왜구라면 해적 말하는 거지? 왜 이런 곳까지?”
“지형상 바다와 이어져 있어서 배를 타고 들어오기가 쉽긴 한데….”
다들 동요해 한 마디씩 던지면서도 손은 조용히 자신들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탑으로 들어서는 길목을 막아서자 곧 생존자들을 쫓던 한 무리의 도적과 조우했다. 흥이 잔뜩 올라 양민들을 쫓던 도적들은 병장기를 손에 든 일행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했으나, 믿는 것이 있는지 살기를 뿌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혈기 왕성한 어린 소협들은 자신들을 향한 살기를 가만히 참아 주지 않았다.
“역시 사람 수가 많으니 좋은 거 같기도 해.”
젊은 애들이 먼저 튀어 나가는 것을 본 백리한의 중얼거림에 긴장하고 있던 이들에게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연이어 나타나는 도적들의 모습에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숫자가 적지 않았다.
“자혜 언니, 괜찮으시겠어요?”
“뭐 그럭저럭요.”
그렇게 말하는 당자혜의 손에는 작은 비도가 들려 있었다. 얼마 전 근처의 대장간에서 받아 온 것들이었다.
“린아.”
“조심할게!”
이현이 자신을 부르자마자 이린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하며 검을 휘둘렀다. 시무룩해 보이는 이현을 보며 킥킥거리던 백리한과 노악이 어깨를 두드리며 결국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위험하니 뒤에 계십시오!”
“내가 이런 놈들 하나도 상대 못할까 봐?”
호위 무사들은 진사린을 뒤로 보내려 했지만 대치하는 수가 많아지자 사린을 제지하지 못했다. 진사린 역시 다른 이들만큼은 아니어도 검을 익힌 몸이었다.
사린은 못 알아들을 소릴 지르며 여인을 쫓던 도적을 습격해 쓰러뜨렸다.
“뭐, 뭐야. 별것도 아니잖아!”
“방심하지 마십시오! 목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 하셔야!”
호위의 외침에 사린은 움찔 떨면서도 그 말에 따랐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나 진정시킬 여유가 없었다.
“사, 살려 주세요!!”
또 어느 도적 하나가 여인을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할 수 있어.’
어제 이린이 납치당한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실 사린도 그때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했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호위 무사들에게 지시하면 간단한 것을, 그 순간 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일에 움직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린이 망설인 그 잠깐 사이, 이린은 이미 아이를 찾으러 뛰쳐나갔다.
‘나도.’
이번에야말로 나도.
[사린은 안 돼.]“하아앗!!”
검을 들고 달려 나가는 사린의 귓가에 수없이 들렸던 목소리가 또다시 떠올랐다. 분풀이하듯 도적을 공격하자,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도적은 허무하게 쓰러졌다.
“힉, 히익!!”
“헉… 괜찮아요?”
극심한 공포로 공황 상태에 빠져 헐떡거리는 여인에게 사린이 말을 거는 순간이었다.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본 다른 도적 하나가 사린에게로 달려들었다.
“아가씨!!”
퍼억!
호위의 목소리에 황급히 뒤돌아본 사린의 눈에, 자신에게 달려들던 도적이 그대로 얼굴을 가격당하며 종잇장처럼 옆으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아요!”
황보산은 사린의 안부를 한번 살피고 돌아서서 다가오는 도적들을 견제했고, 사린은 얼빠진 얼굴로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황보산이 휘두른 주먹에 맞은 도적의 얼굴이 뭉개져 있는 것을 본 진사린이 몸서리치며 여인을 추슬러 일으켰다.
“여긴 위험하니 안쪽으로 가 있어요.”
“아, 아아, 네! 감사합니다….”
여인은 흐느끼면서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서둘러 도망쳤다. 어느새 다시 사린의 곁으로 온 황보산이 사린에게 충고했다.
“위험하니 진 소저는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검을 익힌 몸인데 이런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어요.”
“…소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이 더 큰일일 겁니다만.”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시죠!”
그렇게 말하는 진사린의 검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황룡전장의 금지옥엽이 검을 배운 것은 둘째 치고, 그 검을 사람에게 휘두를 일이 뭐가 있겠는가. 사람을 벤 것도, 이런 참혹한 현장도 처음이었다.
서호까지 오는 여정에서도 진사린이 직접 검을 휘둘러야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지갑이라면 모를까.
“후우.”
“왜, 왜 한숨이에요?”
“아닙니다. 이게 평범한 반응이란 걸 잊고 있던지라.”
“?”
태어나서 지금까지 황보산이 본 여인들은 대부분이 무인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동행한 여인들 역시 무인이라 하나같이 피를 보는 데 주저가 없었으니, 진사린의 반응이 신선했다.
사실 제일 순진해 보이던 연이린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여 약간 기준이 붕괴된 느낌이었는데 진사린을 보니 갑자기 상식이 확 와 닿았다.
‘검은 배운 것 같지만 무공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지 허술해. 민간인보단 낫겠지만, 떨지 않으면 다행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황보산은 또다시 이쪽으로 다가오는 도적 무리를 상대했다. 이미 기준이 무너진 본인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먹으로 사람을 날려 버리는 장면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꽤 무서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