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64
164.
백리한의 덤덤한 말에 당황한 이린이 순간 말을 잃자 백리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놀랄 일도 아니고. 꽤 흔한 일이라고.”
“맞아요. 뭐 꺼림칙한 뒷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사이가 나쁜 편도 아니고요. 한 명 빼고.”
백리한과 백리설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백리한에게 가자 백리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셋째 오라버니 신용도 알 만하네.”
“시끄러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네 사람들 다 아는데 뭐.”
“술자리에서 재미없는 얘기 하는 거 아냐. 근데 넌 왜 집에 있어? 검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남의 집안일이라 딴청 피우고 있던 이들은 검각이란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검각이요?”
“검술 익히고 싶다 그래서 검각에 제자로 보냈거든.”
“백리세가도 가전(家傳) 검법이 있잖아요.”
백리한의 검술을 본 적 있는 이들은 당연히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 집에선 안 가르쳐 주는걸요!”
“우리가 안 가르친 것처럼 말하지 마. 재능이 없는 아이를 가르치는 건 어마어마하게 인내심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라고.”
“오라버니!”
“어머니를 닮은 걸 누굴 원망하겠어.”
백리한은 고향의 술을 홀짝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차라리 가수로 나갔으면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름을 날렸을 텐데.”
“가수는 싫어! 지금도 충분히 기분 나쁜 눈으로 보는 놈들 천지인데!”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너한테 그런 짓을 해.”
“열두 시진 내내 곁에 있을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붙어 있는다고 해도 싫어. 나는 검성처럼 되고 싶었다고!”
“아무리 의욕이 넘쳐도 타고난 재능은 변하지 않는 법이란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
본인의 여동생을 저격한 백리한의 말에 동요한 이는 의외로 백리설이 아닌 진사린이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수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저으며, 사린은 손에 들린 술잔을 비웠다.
“아, 그리고 내가 집에 있는 건 얼마 전에 백중(百仲)이라 어린 제자들 중에 원하는 제자들은 집에 다녀오라고 하셔서 그래. 나야 그래도 가까운 편이지만 고향이 먼 경우도 있어서 오는 길에 힘드니까 가능하면 우리 집에서 쉬었다 가라고 권했거든. 그래서 나도 한동안은 집에 있었어. 이제 다시 돌아가 봐야지.”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싸돌아다니며 집에 서신 한 장 보내지 않는 셋째 오라버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음 씀씀이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오누이를 보며 남궁 형제도 약간 복잡한 얼굴을 했다. 미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형제 구성이, 조금 복잡한 생각을 들게 했다.
“보타산까지 길도 먼데, 조금 위험하지 않습니까?”
“요새 왜구 때문에 좀 흉흉하긴 하지만 원래 늘 가는 길인걸요. 그 근방에는 검각의 고수들이 자주 순찰을 돌기도 하고, 바다에도 관군들이 경계하고 있고요.”
청운진인은 백리설의 대답을 듣고 백리한과 연이현을 번갈아 보며 권했다.
“그럼 가시는 길은 저희와 동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이현은 이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보타산은 워낙에 불교의 성지라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방비가 잘 되어 있을 듯했다.
“이번에 검각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린아도 직접 가서 인사를 드리면 좋을 것 같고.”
“어? 검각에?”
“그럼 바다도 볼 수 있겠네요.”
어느새 정해진 다음 일정에 일행은 시끌벅적해졌다.
“식사는 여기까지 하시고, 우리들끼리 편하게 술자리를 가지면 어때요? 저도 검각에 돌아가면 금주(禁酒)거든요.”
“아, 좋아요.”
백리설의 말에 소녀들은 빠지지 않고 따랐다.
눈치 없이 이린을 붙잡으려던 청휘와 천영은 이현에게 붙잡혀 반대쪽으로 인도 당했다.
“백리 소저가 안채로 안내하시는 듯한데 설마 남자들이 거기까지 따라 들어가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송구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여인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사내들이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이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근래에 두 사람이 집요하게 이린을 쫓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 이현의 엄격한 말에 둘 다 반박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이현을 따랐다.
‘하지만, 요새 나를 너무 피해 다니는 것 같은데.’
분명 함께 여행을 하며 많이 가까워졌다고 느꼈는데. 최근에 또다시 이린이 자신을 멀리하는 것 같아 청휘는 속이 편치 않았다.
소흥까지 오면서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던 이린을 떠올리던 청휘의 시선이 천영을 향했다.
‘다 이자 때문인 거 같다고 하면, 내가 너무 옹졸한 거겠지.’
마찬가지로 천영의 시선 역시 청휘를 향하고 있었다.
‘긁는 게 재밌긴 한데 걸리적거린단 말이지.’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같은 시각, 여자들만의 술자리에 두근두근하며 참석한 이린은 뜻밖의 질문 폭탄에 당황하고 있었다.
“연 공자님은 뭘 좋아해요? 좋아하는 여성상은? 색깔은? 음식은요?”
“진정하세요. 백리 소저.”
백리설에게 붙잡혀 있는 이린을 구해 낸 건 당자혜로, 역시 연장자의 관록이 돋보였다.
“연 소협이 마음에 든다면 더더욱 이린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죠.”
“그건, 그렇군요. 연 소저! 저를 설 언니라고 부르세요. 나도 이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 네. 그럼요.”
백리설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끄덕인 이린은 사린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사린과 눈이 마주치자 또 다른 질문 폭탄이 이린을 맞았다.
“린매, 청휘랑 언제부터 그런 분위기였어? 어때? 맘에 들어? 곽 공자랑 어느 쪽이 더 취향?”
“어어….”
몰려 있는 이린을 구해 준 것은 유영이었다.
“연 소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그럼요. 그럼 저희는 잠시 나갔다 올게요.”
술자리를 빠져나와 둘만 남자 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곤란하신 듯해서 거짓말을 했는데 괜한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고마워요, 유영.”
습관대로 불렀던 이린이 당황해서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그만.”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괜찮나요?”
“네. 그런데… 혹시 이전에 제가 연 소저를 뵌 적이 있었나요?”
“아뇨. 아마 아닐 거예요”
이린의 단호한 대답에 유영이 도리어 의아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린의 친밀한 태도가 너무 낯선 탓이었다.
“저는 이번 여행 이전에는 호남을 떠난 적이 없거든요. 유영은 이전에 호남에 방문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저도 이렇게 먼 지방까지 와 본 적은 처음이니. 분명 연 소저를 만난 적은 없겠군요.”
“제가 불편하세요?”
이린의 말에 유영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은 환경이었다 보니 조금 낯설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러고 저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이상하지만 대공자가 무례한 행동을 하셔도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늘 무공 수련만 하느라 사람 대하는 일이 드문 분이라 조금 상식이 부족합니다. 어릴 적 연 소저를 만난 일이 무척 기억에 남으셨던 모양인데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뻐하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보이긴 했지만 진짜구나.’
유영이 먼저 가 보겠다고 사라지자, 이린은 유영이 왜 저리 서둘렀는지 깨달았다.
‘곽천영한테 보고하러 갔군.’
남의 집에서 은밀하게 만나는 것도 좀 보기 안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이린도 술을 깨기 위해 걸었다. 소흥주는 도수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의 집에서 이러는 것도 좋지 않지만 좀 돌아다니는 건 괜찮겠지.’
집 안에 수로가 있어 물이 흐르는 것이 신기해 이린은 조금 걷고 싶어졌다.
일부러 어두운 길로 들어섰던 이린은 앞쪽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앞에 있는 것은 익히 잘 아는 얼굴과 그 형제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돌아다닐 셈이냐? 슬슬 돌아와서 집안일 좀 돕거라.”
“아니, 왜요. 형님들이 잘하고 계신데.”
“나는 머리가 좋지만 무예가 약하고, 둘째는 머리가 나쁜 데다 너보다 능력도 떨어지지.”
“신랄하기도 하시지.”
“둘째도 곧 정신을 차릴 거다. 머리는 나쁘지만 나쁜 짓을 할 정도로 모질지도 못해. 그러니 쓸데없는 배려 한다고 나돌아다닐 필요는 없단 말이다.”
“저런, 큰형님. 저는 그냥 삼남(三男)으로 태어난 김에 놀 생각이거든요?”
“한아.”
“너무 걱정 마십쇼. 필요하면 돌아올 테니까.”
가볍기만 한 백리한의 목소리에 이린은 도리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결국 못 돌아갔던 거 아냐.’
생각났다. 그때, 백리한의 시신을 거둬 간 이는 백리한의 첫째 형이었다.
이린은 당시 경황이 없어 만나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오빠의 장례 때 부조금까지 보내 주었던 사람이었다.
이린 역시 장례가 끝난 후 서한과 부조금을 보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현과 백리한이 죽은 후 교류가 있지는 않았으니 원망의 말 한마디도 보내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이좋은 형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이린은 그때, 누군가를 챙길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사실 백리한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을 정도로 관심이 없기도 했고.
“어이, 거기 있지? 나와. 형님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니 걱정 말고.”
골몰히 옛 생각에 젖어 있는 사이 어느새 혼자 남은 백리한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나 부르는 건 아닐 테니 반대쪽인가.’
반대편에서 나온 이를 본 이린이 움찔했다.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남궁청휘일 줄은 몰랐다.
“송구합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기척을 죽이고 걷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들은 건 어쩔 수 없지, 소문만 내지 마.”
“당연하죠.”
“장남이 아닌 아들이 너무 뛰어나면 성가신 법이거든. 그것도 어머니가 다르기까지 하면.”
“백리 소협께서는 그래서 일부러….”
“아, 오해하지 마. 나는 그냥 한량이 적성에 맞거든.”
백리한의 말에 남궁청휘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자 백리한이 웃으며 덧붙였다.
“뭐, 어느 분 생각처럼 데릴사위로 집을 떠나는 방법도 있지만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네?”
“잘 생각해 봐.”
멍하니 서 있는 청휘를 남겨 두고 백리한은 손을 흔들며 유유히 사라졌다.
‘남궁청휘는 가문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편이었지.’
백리한과 비슷한 이유였을까?
‘데릴사위라. 그러고 보니 사린은 외동딸이었지. 그럼 사린과 혼인했으면 데릴사위였을까?’
하지만 황보산은 황보세가의 적장자이니 데릴사위가 될 수 없는 몸이었다.
게다가 분명, 황룡전장을 이은 이는 사린이 아니었다. 이린이 알기로 황룡전장의 외동딸이 죽기 전 이미 전장의 소장주는 정해져 있었다.
‘어째서 바뀐 거지. 설마 나 때문인가?’
이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들의 인생까지 주무를 생각은 없었는데.
게다가 변수가 많아질수록 자신이 아는 정보들이 쓸모없어질 여지가 많았다.
자신이 들어 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을 안 이후로 혈교의 습격에 대한 서신을 보내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이번 여행만은 마음 편히 즐기고 싶었는데.’
무엇 하나 마음 편한 일이 없었다. 남궁청휘와 조우한 이후로 줄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