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72
172.
밖이 어쩐지 소란스러워 방 밖을 내다본 사린은 소란의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린매네 오라버니?’
저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어떻게 찾아온 건지 이린의 오라버니가 이린을 끌어안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세하를 경계하고 있던 이린은 아직 피범벅인 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떻게 찾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좀 안심할 수 있겠구나.’
마찬가지로 세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린은 이현이 왔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심했다. 동생과 여행하는 데 친구들을 바리바리 불러올 정도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 위험천만하게 해적선으로 뛰어든 누이동생을 찾으러 오는 데 혼자 왔을 리가 없었다.
이린의 오라버니를 본 사린은 안심과 함께 마음이 무거워졌다.
‘곧 내 일행도 찾아오겠구나.’
그럼 소운의 부고도 듣게 되겠지.
보좌도, 호위들도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었다. 수년간 어린 사린의 곁을 지켜 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집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소운은 사린이 집을 나올 때 유일하게 막지 않고 머리를 식히러 가자고 말해 주었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면 실망한 이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들과의 고용 관계는 사린이 급료를 주고 있다고는 하나, 본래 사린의 아버지가 시작한 계약이었다.
딱히 사린을 좋아해서 곁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해 주는 대로 시집이나 가는 게 나았던 걸지도 몰라.’
그랬다면 소운은 죽지 않았겠지. 툴툴거리는 자신의 투정을 받아 주며 묵묵히 웃었겠지.
사린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이린에게 향했다.
‘부러워.’
홍유, 유영, 이린.
고작 셋이었다.
단 세 명이서 수십의 왜구를 해치웠다. 그중에서도 이린은, 자신보다 어리고 약하다고만 생각한 이린의 활약은 눈부셨다.
사린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도 저렇게 강했다면, 힘이 있었다면….’
부질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아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자신의 방문 앞을 지나가고 있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흰 면사. 자신들을 구해 준 세하라는 여인이었다.
가까운 거리여서일까. 면사 너머로도 세하의 붉은 눈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 듯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사린은 세하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진 소저. 몸은 좀 어떠신가요?”
“덕분에 괜찮습니다. 당신은….”
“세하라고 불러 주세요. 괜찮으시다면 차 한 잔만 함께 해 주시겠어요? 연 소저는 바쁘신 것 같아서요.”
이현에게 한창 시달리고 있는 이린의 모습을 본 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린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사린은 당연히 회천 상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 역시, 사린을 알고 있었다.
“진 소저는 황룡전장의 금지옥엽과 같은 이름이더군요.”
“어머, 그런가요.”
사린은 동요하는 모습을 감추려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룡전장의 금지옥엽이 무척 상재가 뛰어나고 수완이 좋다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얼마 전에도 후계자로 내정된 사촌 오라비보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키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익까지 올랐다지요? 게다가 운영하고 계신 가게의 평판도 좋더군요.”
“…….”
애써 표정을 감추고 있었으나 어제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살면서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너무나 큰 사건을 겪은 지금의 사린은 평소보다 허점투성이였다.
그런 사린에게 세하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줬다.
“진 장주께선 따님이 이리 뛰어나시니 필시 자랑스러우시겠죠. 제가 진 장주였다면 분명 진 소저를 후계자로 삼았을 거예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입은 차가운 현실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을걸요.”
자신이 아들로 태어났다면 당연히 물려받았을 모든 것이었지만, 아버지는 딸로 태어난 사린의 능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지금 사린이 운영하고 있는 것은 증조모로부터 미리 받은 재산들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사촌 오라비의 어설픈 짓들을 적당히 방치했다. 그 야비한 놈은 언제나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았다. 머지않아 다른 자들에게 짓밟힐 텐데, 자신이 양보해야 할 필요 따윈 없었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해 밀려난 주제에 자신에게 폭언을 던지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린은 안 돼. 여자애가 사업이라니.] [무술 같은 걸 배우게 하니까 기고만장해진 겁니다.] [무술이야 건강에 좋으니 배우게 했다만 재능이라곤 없으니 곧 포기할 게다. 곧 황보세가로 시집가서 후계자를 낳으면 우리 상권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 너무 안달하지 말거라.]자신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몰랐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면. 이득도 손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였다면 좋았을 걸.
오라비를 이기면, 자신을 조금은 인정해 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누구도 공감해 주지 않을 답답함에 울분에 차 있을 때, 마침 연이린과 남궁수연에게서 연이어 서신이 도착했다. 부러웠다. 자신과는 달리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그 애들이.
실무자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남기고, 사린은 집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진 소저가 전장을 잇는 데 꼭 아버지의 인정이 필요한 건 아니죠.”
“네?”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이도 있지만,”
세하의 손이 사린의 손을 붙잡았다.
“쟁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이도 있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능력도, 자격도 충분하죠.”
빛을 잃었던 사린의 눈이 반짝였다.
“바꾸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요?”
* * *
당자혜를 위시하여 연이현과 백리한은 위험을 무릅쓰고 해로로 여동생들을 쫓았다. 길을 잘 잡은 덕분에 왜구들이 관병에 압송되는 것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여인들이 무사히 구출되어 가까운 마을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길이었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단 사실을 알고 안도한 이들은 그대로 객잔에 늘어졌다.
“하아, 살 거 같다.”
이현과 뒤이어 도착한 당자혜에게 한참을 혼나야 했던 이린은 씻고 싶다는 말로 겨우 두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에 나란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남궁청휘와 곽천영의 눈빛도 썩 곱지는 않아서 이린은 조금 기가 죽었다.
‘둘이 사이좋아졌나.’
그 원인이 본인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린만 그저 속이 편했다.
목욕을 하고 나오며 이번에 활약한 홍아를 쓰다듬어 주자 기쁜 듯이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혼자 있게 되니 자꾸 세하가 떠올랐다.
제 말에 놀랍다는 듯, 비꼬는 것이 아닌 순수한 찬탄이 섞였던 세하의 눈빛을 떠올리자 어쩐지 씁쓸해졌다.
‘보통 그렇지 않은 거겠지.’
이린은 스스로 운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친부모는 누군지 모르지만 유복한 연가장에서 자라 굶주린 적이 없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다정다감하여 이린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려 애썼다.
여아로 태어났지만 타고나길 튼튼하고 근골이 좋아 사내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심지어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단련을 받으며 자랐으니, 자신을 놀리려 하는 또래 아이들 정도는 제 손으로 응징이 가능했다.
뒷산에서 영물을 발견해 영약을 얻었고, 비급까지 얻었다. 거기에 타고난 재능까지 있으니, 이린이 제 실력을 내보인다면 강호의 어느 누구도 쉬이 자신을 무시하진 못하리라.
‘하지만,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겠지.’
세상에는 이린보다 운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려진 마선은 얼굴에 흉터 자국 덕분에 팔려 가지 않았고, 혈혈단신 맨손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어린 아이들을 지켰다. 비슷한 처지였어도 다순은 마선과 같은 걱정을 하진 않았다.
오라비의 노름빚으로 팔려 갈 뻔한 여인은 겨우 도움을 받았지만 다시 팔려 갈 처지가 되어 집에서 도망쳐야 했다. 만약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본인이 팔려 가진 않았을 것이다.
혈교와 엮였다는 이유로, 믿었던 남편에게 제 손으로 이룬 재산을 빼앗기고 딸과 함께 버림받은 여인도 있었다. 부인과 남편의 위치가 반대였다면 부인이 남편을 버리는 게 가능했을까?
동정호에서 만난 여인은 유복해 보였지만 남편을 일찍 잃자, 유산 때문에 아이와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만약 일찍 죽은 것이 부인이었다면 남편은 그저 애도의 기간을 가진 후 새 장가를 들면 그만이었겠지.
백리설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검에 대한 재능은 부족했기에 가족들이 없는 곳에서는 사내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자조했다. 백리설이 사내였다면 백리한을 부러워할지언정 평범하게 본인의 타고난 재능을 살리지 않았을까.
검각의 여협들은 무공이 고강하며 협의를 지키지만, 약을 먹여서라도 해적에 팔아넘기려 하는 놈들도 있었다. 만약 검각이 여인들만의 집단이 아니었다면, 감히 그렇게 얕잡아 볼 수 있었을까?
진사린은 더없이 부유한 집의 외동딸이지만 가업은 이을 수 없고, 본인이 원한 적도 없는 혼처로 시집을 가야 했다. 하지만 아들로 태어났다면, 당연히 가업을 이을 것을 강요받았을 테지.
‘내가 겪지 않았다 해서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니니까.’
지금껏 거의 장원 안에서만 살아온 이린은 크게 실감하지 못했지만, 세상은 여인들에게 더 가혹했다.
[장주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요? 당신에게는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이린은 세하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되고 싶지 않아.’
[연 소저는, 정말 행복하게 자랐군요.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답니다.]‘역시 우리 집이 별난 걸까?’
어쩌면 아버지와 오빠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이린이 하겠다고 하면 반대하지 않을까?
7살이나 어린 동생이 장주 자릴 원한다는 것부터가 좀 어이없는 것 같지만, 원하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린아. 언제 나왔어? 배 안 고파? 뭐 좀 먹을래?”
“응? 아니 괜찮아.”
이현은 멍하니 있는 이린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 혹시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강호 초출의 어린애가 (남의 피로)피범벅이 되도록 싸웠는데 당연히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혈교에게 쫓길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이현의 얼굴에는 심려가 가득했다. 이린의 검에 목이 떨어진 해적들의 입장에선 어이없겠지만 이현에게 이린은 여전히 어린 여동생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이현을 보며, 이린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응. 있지, 오빠는… 내가 연가장주가 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장주 되고 싶어? 정말?”
이린이 망설이며 꺼낸 말에, 이린의 안색을 살피던 연이현은 화색이 되어 되물었다.
“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공부는 좀 해야겠지만 그거야 오빠가 옆에서 도와주면 되니까 상관없지. 아버지한테 바로 서신 보내자!”
싱글싱글 웃으며 바로 아버지에게 보고할 기세인 이현을 보며 당황한 이린이 오빠의 소맷자락을 황급히 붙잡았다.
“아니. 진짜로, 진지하게.”
“진짜로 하려는 거지? 괜찮아. 오빠가 보좌할게.”
“아니, 아니야! 오빠 해! 나, 나는 안 해!”
안 되겠다. 이 집은 글렀다.
“왜? 왜 안 해? 하고 싶어진 거 아냐?”
실망한 듯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현을 보며 이린이 복잡 미묘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그리고 내가 하겠다고 한다고 아빠가 허락하시겠어?”
“아버지는… 허락하실걸?”
“…진짜?”
“응.”
이현은 별 망설임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맘에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결정하자.”
“안 한다니까. 그런데 오빤 왜 그렇게 좋아해?”
“응? 그러게.”
쿡쿡 웃으며 이현이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는 장주 자리에 묶어 놓지 않으면 출가해 버리는 거 아닐까.’
정작 오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린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육로로 달려온 일행과 무사히 조우한 이현은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했다.
“린아, 이제 집에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