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74
174.
“제갈세가의 여식들도 동행했지만 연화문이 검을 들 때 함께하는 벗은 다른 이였지. 둘의 성격은 정반대 같았지만 함께 있으면 꼭 자매처럼 보였다네.”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성도 왜구 때문에 온 건가요? 아니면 검후께 비무를 청하기 위해?”
“아니, 그들은… 신교의 신물(神物)을 찾고 있다고 했었지.”
“!”
뜻밖의 말에 이린의 얼굴이 굳었다. 순간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한 이린은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옆에 앉은 당자혜가 그런 이린을 흘낏 확인한 후 신기한 듯 물었다.
“신물이요?”
“그래, 신교의 신물은 이적(異蹟)을 일으킨다고 하지. 어딘가에 그에 대한 단서가 있다며 절강까지 왔다가 검각에 들렀다고 했네.”
“정말 그런 게 있나요?”
검후는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글쎄. 나는 검각을 지키느라 이곳을 떠날 수 없어 혈교 토벌에도 참가하지 못했으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토벌 후 무림맹에서 연락이 온 적은 있었지. 신교의 신물 중 특이한 요검(妖劍)이 있는데 왜구에 시달리는 검각에 도움이 될 듯하다고.”
“요검이요? 대체 어떤 검이기에….”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검을 익힌 이다 보니 다들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뜻밖의 사실에 굳어 버린 것은 이린뿐이었다.
‘신물이 하나가 아니야?’
신교의 신물이 정말 실존하며, 그것이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린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하나가 여러 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이린은 떨리는 손을 애써 붙잡았다.
‘설마 그런 물건이 여러 개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 요검이라면, 분명 내가 찾았던 그 이상한 금패와는 다른 것일 가능성이 더 커.’
하지만 어딘가에 비슷한 물건이 더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린을 불안하게 했다.
검후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시선을 즐기듯 웃으며 답했다.
“나도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여기까지 운반하는 도중에 사고가 몇 번이나 발생해 결국 포기했다는 서신만 도착해서 장난하자는 건가 했지. 무림맹 놈들이 한가한 놈들도 아니니 그런 걸로 장난칠 리야 없겠다만.”
“그럼 그 신물은 어떻게 됐을까요?”
“글쎄. 위험한 물건이라면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니 없애 버렸거나, 어딘가에 잘 보관해 두고 감시하고 있겠지? 뭐 그렇게까지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니 걱정할 거 없네. 당시에는 암암리에 혈교가 대단한 신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 오죽하면 절강성 끝자락에 있는 검각에까지 소문이 흘러들어왔을까.”
“저희는 처음 들어요.”
어린 시절을 무림맹에서 보냈던 남궁수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답했지만 검후는 피식 웃었다.
“허황된 소문이 퍼질까 봐 무림맹에서 입단속이라도 한 모양이지. 하지만 검각은 워낙에 외따로 떨어진 곳이라 소문의 전파는 느려도 꽤 오래가거든. 누가 여기까지 와서 입단속을 할 것도 아니고.”
중원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무림맹의 입김이 닿기 힘든 법이었다.
지난번처럼 도움을 청한다면 가능한 힘을 보태지만, 누구나 자신의 가문, 자신의 문파, 자신의 연고지가 가장 소중한 법이니까.
“무엇보다 그 신물이라는 게 쓸모가 참 애매해서… 검각에 가져온다 해도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를 물건이라 못 쓰겠음 그냥 바다에 버리라는 뜻으로 가져오는 거 같았거든.”
“어머. 뭔지 좀 궁금하긴 하네요.”
“없어진 물건에 미련 둬 봤자 무의미할 뿐이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젊은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떠드는 모습이 싫지 않은지 검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중에서도 남궁수연과 당자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과연 오대세가 아이들답게 집안 어른들에게서 알아낼 방법을 궁리 중인 모양이었다.
‘귀엽기도 하지.’
검성과 그 벗들이 검각을 찾아왔을 때도, 이렇게 풋풋하고 귀여운 어린 협객들이었다.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지금처럼 강호에 명성이 울려 퍼지는 거물들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
그때 자신이 좀 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무언가 바뀌지 않았을까.
그 어린 소녀들이 가진 의문과 고뇌를 자신이 받아 주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
검후가 그리 엄격한 성정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는지 종알종알 저들끼리 떠들어 대던 아이들이 신이 나서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 댔다.
“검성은 그때도 강했나요?”
“강했지. 검각에서도 대적할 수 있는 동년배는 없어서 결국 내가 나서야 했을 정도로.”
“와아.”
두근거리며 눈을 반짝이는 손님들과 달리 홍유를 제외한 검각의 아이들은 다른 의미로 신기한 듯 검후를 응시했다.
‘검각의 아이들이 아무리 졸라도 입을 열지 않으셨던 분인데 오늘은 어째서일까.’
‘손님이 오셔서 그런 걸까요?’
의아해하는 사매들의 기색을 눈치챈 홍유가 눈으로 조용히 주의를 주자, 은홍과 백리설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 기회에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설레는 얼굴을 했다.
“검성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나도 그리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말수가 적고 진중한 아이였지. 다소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리 사교적인 인상은 아니었단다.”
“어? 어머니께 들은 것과 인상이 달라요.”
백리설의 말에 검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아마 아까 말한 연화문의 벗일 거다. 둘은 같은 사문 출신이라 어릴 적부터 함께해 왔고, 복장이나 꾸밈새도 비슷해서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았지.”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요.”
“당시의 일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게다가 도중에 연화문과는 길이 갈리기도 했고.”
“그럼 그 검성이 벗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었어요? 강했어요?”
“물론, 두 사람 다 놀랄 정도로 강했단다. 화문에게는 이기지 못한 모양이지만….”
검성은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그래,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사람이었지. 무뚝뚝한 검성과는 달리 사교적이어서 검각에서 며칠간 머무르는 사이 벗도 잔뜩 사귈 정도로. 게다가 검성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성취가 뛰어나고 총명해서… 생각도 많았지.”
검후가 말하는 검성의 벗에 대한 평가는 백리설의 어머니 여홍려의 말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혼동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게다. 굳이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꿈을 깰 필요는 없으니 그저 지금처럼 생각하도록 놔두려무나.”
“네. 사조님.”
살짝 실망한 듯한 백리설을 보며 검후가 말을 이었다.
“젊은 시절 그 둘은 늘 붙어 다녔다니 백리세가의 안주인께서 검성을 만났던 것은 틀림없을 거다. 다만 말수가 적은 검성보다는 세심한 성격 탓에 그 벗이 더 인상에 남으셨던 거겠지.”
“그렇군요. 그런데 그분은 왜 알려지지 않았나요?”
“그이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거든. 신념이 너무 강한 이였지. 아마 그래서 그렇게 되었을 거다.”
검후의 말에 소녀들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검성이 세상을 등진 데에는 그 탓도 있을까?’
듣기로는 혈교와의 마지막 일전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는데, 혈교와 싸우는 도중에 절친한 벗을 잃었던 게 아닐까?
“혹시 그 벗의 죽음이 혈교와 관계가 있나요?”
“…그래.”
이린의 질문에 검후는 찬찬히 이린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들 이린과 마찬가지로 절친한 벗을 잃은 검성이 그 충격으로 강호를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으로 사고가 흐른 모양이었다.
“지키지 못한 것은 언제나 후회가 남는 법이지. 모두 정진하여 그 삶에 후회가 없도록 하렴.”
“네.”
안 그래도 얼마 전 소중한 사자매(師姉妹)와 벗을 잃을 뻔했던 이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회가 없도록, 이라.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하와 만난 이후 그자의 제안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검성의 벗은 약했나요?”
내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다들 사린이 친밀히 지내던 호위무사를 잃고 침울해져 있는 것을 알았기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이곳에 오는 것도 혹 마음이 상할까 싶어 괜찮겠느냐 물었지만 사린은 고개를 저었다.
[여인들만이 지켜 온 곳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어.]내내 말이 없던 사린이 오랜만에 꺼낸 말이었다. 그리고 검후의 대답은 간결했다.
“아니, 강했다. 당대에 그리 재능이 넘치는 여협이 둘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감탄할 정도였지.”
“그런데도 검성은 벗을 지키지 못한 건가요?”
“그래. 세상에는 단순한 무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무언가를 생각하듯 찬찬히 눈을 깜빡이는 사린을 보며 검후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무인이니 무(武)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지.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힘이 없으면 지킬 수 없는 것이 많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무(武)가 아닌 것을. 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렴. 기껏해야 동쪽 끝의 검각에서 평생을 보내온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구나.”
그 말을 끝으로 그날의 식사 자리는 끝이 났다.
검각에서 마련해 준 숙소로 돌아간 이들은 역시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금방 침대 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생각보다 그리 피곤하지 않아 잠이 들지 않은 이린은 검각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연 소저. 왜 쉬지 않고 나와 계세요?”
“유영. 몸은 좀 괜찮아요?”
“그리 심하진 않습니다. 아마 긴장이 됐나 봅니다.”
유영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식사 시간에는 불참했다. 어쩌면 검후를 만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심하진 않았어요?”
“이곳에서 바다를 보고 있으니 지루하진 않았습니다.”
배를 타고 오는 내내 본 바다가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해상 위와는 달리 여기는 파도가 치고 있어 귓가가 소란스러워 이린은 도리어 안정되지 않는 기분도 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냥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오늘 검후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무(武)가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무(武)가 아니다? 그럼 문(文)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생각보다 단순한 대답이었으나, 무인다운 대답이기도 했다.
“으음. 그렇게 대비적인 개념은 아닐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이린은 천천히 검을 쓸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요. 먼저 쉬세요.”
“어딜 가시는데요?”
“검각을 벗어나진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네.”
그리고 이린은,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