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75
175.
이린이 없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당자혜와 유영이었다.
어느새 보호자 생활이 몸에 익어 버렸는지 두 사람은 때때로 저도 모르게 이린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이린은 기대에 부응하듯… 자리에 없었다.
“어젯밤에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고 하셨는데. 설마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으실 줄은….”
“어젯밤에요?”
아직까지 쉬고 있는 사린을 제외하고는 다들 무인이다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이린을 찾던 일행은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보타산이고, 섬의 규모가 작지는 않지만 사면이 바다였으니 가봤자 섬 안일 터였지만 대체 밤새 어딜 갔단 말인가.
“갑자기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져서 찾아갔다든가?”
“검각을 벗어나진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수연의 긍정적인 의견과 달리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인지라 유영은 불안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검각 안이라 조심하느라 따라가지 않았더니.’
살면서 곽천영 이후로 이렇게 속 썩이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어휴.”
세 사람이 나란히 한숨을 쉬는 그때, 마침 일행을 깨우러 온 백리한과 은홍이 다가왔다.
“아, 역시 다들 일어나 계시네요. 편히 쉬셨나요?”
“은 소저! 혹시 이린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연 소저요? 아뇨, 방에 안 계신가요?”
은홍의 태평한 반응에 차마 외박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이 고개만 저었다.
“이린은 원래 아침마다 뛰어다니곤 하잖아요? 검각 주변에는 딱히 볼 것도 없지만 남의 사찰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뭐 상관없을걸요.”
“그, 그런가?”
생각해 보면 그동안 경계하고 배에서 지내느라 답답하기도 했고, 섬에 온 것은 처음이니 신기할 만도 했…
‘…지만 밤새 안 들어올 일은 아니잖아!’
저도 모르게 백리설의 의견에 동의할 뻔한 당자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검각 안에 있을지 모르니까요. 좀 찾아 주시겠어요?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것도 그러네요. 제가 찾아볼게요. 연 소저의 용모는 워낙에 눈에 띄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은홍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다 보니 이린의 부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백리설과 은홍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절로 조급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검각이니 새삼 위험할 요소도 없었고, 이린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오늘 배가 몇 시에 오는지에 대해 우선 얘기하고 있는데 홍유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은 사매, 백리 사매 여기 있었구나, 마침 잘됐다.”
“아, 홍 사저! 연 소저가….”
“어라. 벌써 들었어? 연 소저는 사조님 거처에서 조반(朝飯)을 함께 할 테니 다른 분들은 먼저 드시라는 말을 전하러 온 길인데.”
“네?”
“…네??”
홍유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제 귀를 의심했다.
약 한 시진 후, 뭘 했는지 피곤하지만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내려온 이린을 본 일행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 대체 거기서 뭐 했어요?”
“으음. 나중에 얘기할게요.”
“흐음.”
얼굴을 보니 뭐 나쁜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당자혜와 유영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혈교에게 쫓겨 쉬지 않고 달릴 때도 저렇게 지쳐 보이진 않았는데?’
‘밤새 배에 숨어 있다 수십의 왜구를 상대로 싸운 후에도 저렇게 지치진 않았는데?’
당자혜와 유영은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잡아다 추궁합시다.’’
어쩌다 보니 눈빛만으로 대화가 가능해진 두 사람은 피곤하다고 칭얼대는 이린을 끌고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검후 역시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기에 출항 시간 전까지, 일행은 각자 부담 없이 그동안 친해진 검각의 여협들과 인사를 나눴다.
특히 검각의 사람들은 다들 사린에게 미안해했다. 유일하게 희생된 이가 사린의 가까운 이였기에 그들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진 소저. 우리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요.”
“우리가 진 소저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불러주세요.”
내내 무표정하던 사린은 홍유와 나은의 말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래. 소운의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어.’
눈물을 훔친 사린은 웃으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홍 소저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언제든,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서신을 주세요. 못 미더워 보일지 몰라도 저는 장사꾼이거든요.”
사린이 조금 기운을 차린 것을 본 일행은 안도했다. 그동안 아무리 주위에서 달래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린을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이어서 홍유를 비롯한 사자매들은 이린과 유영, 당자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인사였지만 몇 번을 해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검각의 자매들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은공을 어찌 잊겠어요.”
“또 놀러 와요. 언니.”
막내 유나의 말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홍유는 마지막으로 이린을 붙잡고 웃으며 청했다.
“다음에는 꼭 진심으로 겨뤄 보고 싶군요.”
“으음.”
애매하게 웃는 이린에게 홍유가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연 소저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 알았으니, 갈 길이 멀군요.”
싱긋 웃는 홍유를 보며, 이린은 살짝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안 그래도 지난밤의 일로 당자혜와 유영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홍유의 반응에 한숨이 나왔다.
일의 원흉은 당연히 검후였다.
어제, 검후와 함께한 저녁 식사가 파하기 직전, 이린을 부른 목소리가 있었다.
-아가, 궁금한 게 더 있다면 밤에 이곳으로 다시 오렴.
그런 부름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시 검후가 있는 전각으로 돌아가자, 검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이린이 검을 들고 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당연히 챙겨 왔지만.
‘이러니 강호의 젊은이들이 삐뚤어지지.’
검후는 과연 훌륭한 스승이었다. 함께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이린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비무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린도 검후도 검기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가장 단순하게, 외공으로 단련된 검술을 겨뤘을 뿐.
해가 다시 뜰 때쯤에야 검을 멈춘 두 사람의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체력도 보통이 아니구나. 덕분에 이 늙은이도 오랜만에 땀을 다 흘려 보는군.]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 묻고 싶은 것이 있더냐?] […아니요.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사실은 혈교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검후가 스스로 이야기했다시피 이곳은 중원의 동쪽 끝, 가장 늦게 정보가 닿는 곳 중 하나였다. 게다가 검후는 20년 전 혈교와의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검성에 대한 것도 검후가 말해 준 이상을 묻는 건 남의 개인사를 파헤치는 것 같았기에 그 역시 포기했다.
[그럼 내가 한 가지 물으마.] [하문하십시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무엇인지.] [네.] [네가 생각하는 답을 들려주겠느냐?] [그건….]“분명 어린 아이인데 이상하게 어린아이 같지가 않단 말이지.”
검각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손님들을 태우고 있는 배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검후가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밤새 검을 잡은 것치고는 확실히 피곤하기도 했지만 몸은 도리어 상쾌했다.
“연 소저가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그런 소릴 할 때가 아니란다. 홍유.”
“네, 사조님.”
“너도 비무를 보았으니 알았겠지?”
“예.”
“내 사손(師孫)이 저 어린아이에게 뒤처져서야 내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사조님의 엄격한 목소리에 홍유가 풀이 죽어 되물었다.
“…역시 뒤처집니까?”
“아이가 좀 맹한 구석이 있으니 허를 찌른다면 아주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 너는 검각에서 쌓은 실전 경험이 풍부하니까.”
“정공법으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홍유가 검후의 말을 되씹는 사이 소혜가 웃으며 물었다.
“연 소저의 검을 직접 겪어 보니 어떠셨습니까?”
“너도 직접 보지 않았더냐?”
“스승님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흠. 아직 한참 어린아이답지 않게 고요하고 훌륭한 검이었다. 뭘 주워 먹었는지 내공도 탄탄하고. 하지만 스스로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있더구나.”
“연 소저는 검성이 연가장 출신인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홍유는 함께 배를 타고 오며 검성과 연가장에 대해 물어보곤 했지만 이린은 검성을 동경할 뿐 자신의 혈연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연이현은 침묵하는 듯했다.
“…본인이 감추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지.”
“어째서요? 자랑스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검각 출신들은 모두 검후께 검을 배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집니다.”
“검성이 연가장 출신이란 것을 감추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설마 혈연에게까지 감출 줄은 몰랐지만.”
“네?”
어린 사손을 두고 검후의 시선은 다시 바다를 향했다.
이린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검후의 물음에 답한 이린은 마지막으로 가볍고도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이린은 그저 그것만을 묻고, 검후의 대답에 무척 기쁜 듯 웃었다.
그 얼굴은 언젠가 보았던 미소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기에 오래된 옛 기억을 자꾸 떠오르게 했다.
이젠 30년도 전의 일이었던가.
두 젊은이와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건만 그만큼 강렬해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미래의 검성 연화문이 검각을 방문한 날, 공교롭게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이유도 없이, 그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어린 여협들은 겁 없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심지어 해적선으로 끌려가는 검각의 어린 제자를 목숨을 걸고 구해 온 것까지 같았다.
겁도 없이 사람을 구해 오는 여인을 기겁해서 엄호하면서도, 그 절친한 벗은 화를 냈다. 그리고 여인은 벗의 속도 모르고 그저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정다워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었다.
[참으로 좋은 벗을 두셨습니다.] [네.]무뚝뚝한 인상의 젊은 여인은 그 말에 기쁜 듯 환하게 웃으며, 화를 내며 달려간 제 벗의 이름을 불렀다.
[선하! 주선하!!]주선하.
아직도, 그 이름에는 후회가 남았다.
“스승님. 아직도 그자가 신경 쓰이십니까?”
“…그때, 나는 그 애들에게 무언가 전해 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단다.”
먼저 검을 잡은 선배로서, 여인으로 강호에 선 검수로서.
하지만 그 아이가 품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컸는지 알지 못했던 자신은 분명 그 아이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해 온 일은 어쩌면 선배인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스승님, 주선하의 일은 스승님과 아무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어찌 관계가 없겠느냐.”
강호의 모든 여인이 관계가 있는 것을.
스승과 사조의 대화를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홍유는 방금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추측에 마치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어째서 검성과 그 벗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죽은 신교 교주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신념이 너무도 강했던 여협.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으나 과욕으로 도를 지나쳐 버린 자.
수많은 강호의 고수들을 무릎 꿇리고 사도(邪道)에 빠져 세상을 어지럽히는데 일조한 여인.
스스로를 구천현녀(九天玄女)라 칭했던 혈교의 주구(走狗).
주선하.
혈교와의 전쟁 중 검성의 손에 죽었다는 그자의 이름과 동시에, 이린이 검후에게 했던 대답이 홍유의 귓가에 맴돌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신념(信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