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76
176.
툭!
“아, 이런.”
“뭐 하십니까. 장주님.”
“정리를 좀 하려고 했더니 이것저것 같이 딸려 나와서.”
연적훈이 떨어뜨린 물건을 확인한 장 총관이 쯧쯧 혀를 찼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책상 정리를 한다 했더니, 이런 물건을 이렇게 아무 데나 굴리고 있었다.
낡은 신분패에는 ‘주선하’ 세 글자가 선명했다.
“이런 물건을 아직도 갖고 계십니까?”
“어? 어어.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미 죽은 사람 아닙니까.”
“유품이랄 것도 없는 사람인데 뭐 어떤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는 연적훈의 태도에 장 총관의 잔소리가 더욱 심화되었다.
“아, 왜요. 기일마다 향이라도 피워 주시게요?”
“그게… 나한테는 누이 비슷한 사람이기도 하고….”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는 연적훈에게 눈을 흘기며 장 총관이 단호하게 잘랐다.
“누가 보면 성가셔지니 그만 처분하세요. 소장주님과 아가씨 생각도 하셔야죠.”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적훈은 장 총관이 보지 않는 사이 다시 신분패를 주워들었다.
저 오랜 벗은 이런 바보짓을 알면서도 분명 모르는 척해 주리라.
‘미련이라는 건 알지만.’
아직까지 품고 있는 것이 어찌 주선하 한 사람뿐이랴.
주선하가 장원을 떠날 때 함께 떠난 장원의 무인들 대부분이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뿐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들은 언제나 다정하고 선량하고 정의로웠으니, 아직도 연적훈은 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동참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누군가 안다면 위선자라며 돌을 던지겠지.’
정말 그들이 한 일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이 변했을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연적훈은 여전히 믿고 싶지 않았다.
연적훈이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신분패들은 작은 위패이며, 신분패들이 들어 있는 작은 서랍은 작은 사당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사당은 하나가 아니었다.
“나한테는 짐만 남기고 다들 떠나 버렸구나.”
떠난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뒷산에 이상한 거나 풀어 놓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시는지.”
“근데 그거 정말 그분이 하신 거 맞습니까?”
“거기 예전엔 그런 거 없었다고. 있었으면 애들이 발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수확했지.”
애들은 자기들이 몰래 잘 다닌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린애들이 밤에 위험한 영물이 있을지도 모르는 산속 어딘가로 몰래 들어가는 걸 방치하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당연히 몰래 쫓아가서 확인했지. 애들이 순진해서는.’
둘 다 또래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해도 당시 겨우 열다섯, 여덟 살인 어린애들이었다. 장원 무사들은 따돌릴 수 있을지 몰라도 아비가 몰래 쫓아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뒤를 밟아 알아낸, 아이들이 몰래 드나들던 동굴은 연적훈도 아는 곳이었다.
하긴 그런 동굴이 또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겠지만.
“…그러니까 말을 안 하셨겠죠. 그 일에 대해 뭐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음…. 솔직히 몇 대 맞을 줄 알았는데 애들이 그런 걸 알았는지 아무 말도 없었지.”
맞긴 맞았다. 다른 일로 맞았을 뿐.
“원래 무슨 생각하는지 잘 모를 분이잖습니까.”
“선…, 잘도 알아채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지.”
그때가 가장 좋았지.
가족들이 있고, 장원에는 항상 무술을 단련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모두가 웃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자란 어린 소년에게 연가장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곳이었다.
만약 세상과 단절되어 살 수 있었다면 언제까지나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래, 애들 연락 온 건 없고?”
“있었으면 당연히 장주님께 가장 먼저 가져왔겠죠. 그만 좀 보채십시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요즘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잠도 안 와. 벌써 동정호에서도 남의 집안일에 휘말려 수적들과 싸웠다잖아?”
“강호에 나서서 그 정도 일이야 뭐 놀랄 일도 아니고. 누가 들으면 장주님 젊을 적엔 평화로운 강호 유람을 즐기신 줄 알겠습니다? 잠이 안 오시면 그 시간에 일을 하시죠.”
그렇게 말하며 장 총관은 매정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포기하며 서류를 받아 드는 것과 동시에 쿵쾅거리는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장주님, 소장주님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게!”
서류를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나는 장주를 보며 장 총관이 한숨을 내쉬었으나 서신이 궁금한 것은 매한가지라 슬금슬금 연적훈의 뒤로 다가갔다.
“잘 지내고 계신답니까?”
“어어. 곧 돌아오겠다는데?”
“벌써요? 소장주님은 전에 나가서 몇 년이나 안 돌아오셨잖습니까.”
“으음….”
“왜 그러십니까?”
“생각보다 이린이 속을 썩이고 있는 모양인데.”
연적훈은 이번에도 안부 인사로 시작해 ‘우선 이린은 오늘도 건강하고 해맑게 잘 놀고, 잘 먹고 있다는 점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부터 강조하는 서신을 읽으며 허허 웃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이린이 얽힌 파란만장한 일화에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건강하고 해맑게 잘 놀고, 잘 먹고 있다’는 거지?”
“대범하기로는 참 따라갈 수가 없군요. 우리 아가씨는.”
짧게 요약된 소식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아저씨들은 잠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한 휴식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정말, 누굴 닮았는지.”
“누굴 닮긴요. 그 피가 어딜 가겠습니까.”
입으로는 변함없이 장주를 놀리는 장 총관이었지만 연적훈과 함께 서신을 읽으며 점점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수적에 이어 혈교에, 왜구에.
서신에 적혀 있는 것은 어린 소녀의 첫 외유치고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모험들뿐.
이현이 보낸 서신을 모두 읽은 두 사람은 말없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 *
“연 소저는 혈교에 대해 잘 모른다고요?”
“그쪽은 워낙에 흉흉한 얘기가 많아서 그런가 얘기를 잘 안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도 검성에 대한 이야기는 좀 들었는데.”
“하긴, 무고한 사람들 끌고 가서 잔인한 짓을 했다고 들었어요.”
오늘 여인들의 화제에 오른 것은 혈교였다.
혈교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이린의 말에 다들 자신이 아는 얘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당시에 이름난 고수들을 암살한 걸로도 유명하잖아요. 신교 교주인 주선하가 주도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신교로 오해받은 많은 여인들이 곤란을 겪게 되었죠?”
신교의 교인들은 대부분 여인이었다. 그리고 여인은 어디에나 있었다.
대단한 중임을 맡는 이는 없지만 차를 나르는 시비도,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도. 사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드나드는 기루와 극장, 창관에서 일하는 이들도 여인이었다.
모든 가문에는 부인과 누이와 딸이 있었고, 문파의 제자들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천애 고아일지라도 어린 시절을 함께한 이들 중에는 여인이 있고, 물건을 사려면 시장에서 여인과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의 의문사가 실은 신교에 의한 암살이었음이 알려지며 모든 여인은 의심을 받았다.
“언행이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신교, 여자가 고분고분하지 않아도 신교, 말투가 거칠어도 신교라고 우기고. 그걸 빌미로 힘없는 여인들을 핍박하는 경우도 많았다고요.”
“덕분에 지금도 신교라면 질색하는 이들도 많죠.”
백리설과 남궁수연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저 힘없는 자들을 지키고자 모인 이들이었다고 해요.”
“네?”
“밖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지만, 암살당한 자들 중에는 평판이 안 좋은 자들이 많았고요.”
자신의 말에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당자혜가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래도 백도구존(白道九尊) 중에도 여협이 많으니 여협들을 무시하지 못 하지만 당시에는 여인들을 제대로 무인으로 대우하는 일이 드물었다고 해요.”
유일하게 예외로 인정받는 것은 검각과 아미파와 같이 종교를 바탕으로 한 여인들만의 문파였다. 그 외의 가문과 문파는 대부분 여인에게는 무공을 잘 가르치려 하지도 않았다. 가르치더라도 그저 대부분 겉핥기 수준으로 가르칠 뿐, 비급이나 영약 같은 것과는 당연히 인연이 없었다.
가끔 뛰어난 여협이 나타났다고 하면 신기해하지만 그래 봤자 여인이니 대부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재밌게도 신교에 의해 강호의 많은 명사들이 죽고 싸울 이가 줄어들자 존재조차 몰랐던 여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묻혀 있었을 뿐 원래 그곳에 존재했다.
이따금 누군가의 호기심으로, 재미로, 혹은 그저 재능에 대한 감탄으로 드물게 무공을 익힌 이들.
아무도 존재를 몰랐던 여인들이, 싸울 이가 없어지자 갑작스레 발굴된 것이다.
“현재 백도구존에 여협이 반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상 혈교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나 다름없는 셈이죠.”
“그건 참, 묘하네요.”
아무래도 강호의 사정에 밝은 남궁수연이 당자혜의 말을 받아 검성의 이야기를 꺼냈다.
“검성도 마찬가지죠? 검성은 강호의 명사들이 살해당할 때까지만 해도 강호의 일이라 해서 나서지 않았지만,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는 말에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혈교와의 전쟁에 동참했다고 해요. 혈교와의 전쟁 전까지는 그리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죠.”
다들 와아, 하고 동경에 젖어 있는 와중 백리설이 사람들에게 술잔을 건네며 웃었다.
“맞다. 검성은 호남 출신의 여협이라면서요? 이린과 비슷하네요.”
“에이, 어떻게 저랑 비교해요.”
“연 소저는 재능이 있으니 꿈을 크게 가져야죠.”
“백리 소저 말씀이 옳아요. 기왕 검을 잡았으면 검성을 목표로 해야죠.”
“하하.”
이린은 백리설이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자, 이번에는 향설주(香雪酒)예요. 어때요?”
“확실히 아까 마신 것보다 달고, 조금 도수가 높은 것 같네요.”
“그렇죠? 그렇게 독하지 않아서 먹기 좋아요.”
백리설이 까르르 웃으며 향설주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린은 백리설의 설명을 들으며 홀짝홀짝 달달한 술을 삼켰다. 소흥주의 일종인 향설주는 소흥주 중에서는 도수가 높은 편이었지만 이린이 마시기엔 딱 적당했다.
일행은 지금 백리세가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머무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조금 지치기도 했고, 사린이 백리세가 사람의 안내를 받아 죽은 소운의 유해를 수습해 오는 동안 일행은 이곳에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백리 소저는 정말 이대로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네. 검각을 떠나기 전에 인사도 드렸어요. 요새 좀 뒤숭숭해서 그렇지 사실 가려고 하면 자주 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다들 아쉬워하셨겠네요.”
“마지막으로 노래 불러 달라고 얼마나 사람을 들들 볶는지. 목쉬는 줄 알았다고요.”
툴툴거리면서도 백리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수년간 함께 지내 온 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지 않을 리 없지만 검각에 있는 이들 중 백리설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이 역시 드물지는 않았다.
“이린이야말로 정말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요? 모처럼이니 좀 더 머물다 가면 어때요?”
이린은 백리설의 솔깃한 제안에 슬쩍 반대쪽에 앉아 있는 오라비를 한번 쳐다본 후 고개를 저었다.
“으음.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오빠가 너무 불안해하니 안 되겠어요.”
“호남제일미남자께선 여동생이 걱정돼서 어쩔 줄 모르시는 것 같아요. 부러워라. 우리 오라버니들도 좀 배워야 할 텐데.”
“어머. 백리 소협도 백리 소저가 걱정돼서 울었다면서요.”
“하… 다들 그걸 봤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여동생의 웃는 얼굴에, 이현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백리한이 얼굴을 구겼다.
청운진인은 여동생의 반응을 꿰뚫고 있는 백리한에게 감탄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시게, 오라버니.”
“여동생 따위… 배은망덕해….”
“형이나 남동생이 더 있는 것보단 낫지 않나?”
“…….”
노악의 말에 차마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백리한은 침묵했다. 이미 위에 형이 둘이나 있는데 남자 형제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옆에 있던 남궁청운이 잘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잠시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이린도 킥킥 웃었다.
‘사린이 돌아오면 떠나야지.’
다들 지쳐 있던 참이니 백리세가의 배려는 고마울 뿐이었다. 백리세가의 입장에서는 물론 목숨 걸고 고명딸을 구해 준 은인들에 대한 당연한 대접이었지만.
명성이 자자한 소흥의 황주(黃酒)를 마시며 이린의 시선은 흘깃, 남궁청휘를 향했다.
‘남궁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