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79
179.
어느새 멀리 있는 작은 인영에게 달려가고 있는 이린의 모습에 남겨진 이들이 제 눈을 의심했다.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저기 있는 건 누구지?’
의아해하는 이들과 달리 청운진인은 대충 누군지 알겠다는 듯 느긋한 얼굴이었다.
달려간 이린이 누군가에게 덥석 매달리자 말을 몰던 남궁청휘와 곽천영이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 떨었다. 급격하게 낮아지는 주변 공기에 다들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두 사람을 곁눈질하던 청운진인이 입을 열자 순간 경직되었던 공기가 맥없이 사라졌다.
“연 소저의 부친께서 직접 마중 나오신 모양이군요.”
“아.”
“…….”
멀리서도 아버지 얼굴이 보이니 바로 달려 나간 모양이었다.
“하긴 집을 떠난 지 수개월이 지났으니 반가워 달려갈 만도 하군요.”
당자혜의 말에 대부분 별로 납득하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이린의 아버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죠.”
들은 바가 많은 당자혜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담겼다.
“소문으로만 듣던 호남제일미남자의 부친을 뵐 수 있겠군요.”
“그럼요. 미중년이시죠.”
목에 매달려 있던 이린을 떼어 낸 남자가 이린의 얼굴과 팔을 잡고 어디 다치진 않았나 살피는 것 같더니, 곧 이린을 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까르르 웃는 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팔불출 아버지이시지만요.”
“부자(父子)가 얼굴만 닮은 게 아니군요.”
“…….”
“…….”
문화 충격으로 말을 잃은 이들이 입만 쩍 벌리고 있자 수연이 웃음을 삼켰다.
“저런 게… 평범한 부녀지간인가?”
“…….”
곽천영의 말에 남궁청휘도 아는 바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 * *
“린아!”
“아빠!”
“세상에, 내 새끼. 이게 얼마 만이야! 몇 개월 못 본 사이 좀 큰 거 아냐? 아니, 좀 야위었나? 잘 지냈어?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아빠 왜 여기 있어?”
“마중 나왔지.”
전서구로 서신을 받은 연적훈은 걱정이 돼서 이린을 마중하러 장원에서 탈출… 아니 오랜만에 외출을 나와 장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장사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노상 식당 하나를 전세 내어 오매불망 딸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덕분에 옆에 호위는 물론, 상단 직원 몇 명이 서류를 들고 장주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사고 쳐서 오빠 속 썩였다며.”
“…본의는 아니었어.”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고 저도 모르게 달려와 버린 이린은 자신이 두고 온 일행을 떠올리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나 얼마나 빨리 달렸지?’
하지만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이니.
이린은 그냥 포기하고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찻집 주인은 통 큰 손님이 기다리던 누군가가 드디어 도착했다는 걸 눈치채고 서둘러 시원한 차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손님이 적지 않을 듯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연 장주님.”
뒤늦게 도착한 이들이 말에서 내려 연적훈에게 예를 표했다.
안면이 있는 남궁청운과 청운진인의 인사를 받으며 연적훈 역시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우리 딸을 여기까지 데려다주어 고맙소.”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원하게 식힌 차 한 잔을 단숨에 마신 청운진인의 말에 이린이 깜짝 놀라 붙잡았다.
“벌써요? 좀 쉬었다 가시죠.”
“마음은 고맙지만… 저쪽도 사고 치지 않을까 걱정이라서요.”
싱긋 웃으며 청운진인은 자신이 타고 온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본인은 괜찮아도 지쳐 있는 말의 상태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연적훈도 눈치챈 듯 잠시만 기다리라며 청운진인을 만류했다. 안 그래도 여기로 오며 데려온 말이 있었다. 별로 달리지 않았으니 지치지도 않은 상태였다.
“적어도 말과 식량은 좀 바꿔 가는 것이 좋을 듯하오.”
“연 장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미남의 미소에 무심코 설레어 버린 소저들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다들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청운진인께선 대체 왜 그렇게 일찍 출가하셨어요?”
“정말요. 아쉬워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환속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하하.”
살면서 숱하게 들어온 소리라 그런가 별로 난처해하는 기색도 없이 청운진인은 연적훈이 건네주는 말의 고삐를 잡으며 장난치듯 가볍게 물었다.
“궁금하십니까?”
“네.”
“그리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
말을 흐리던 청운진인이 이린을 보며 한숨을 쉬듯 피식 웃었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차였답니다.”
“네?”
“감사합니다. 연 장주님.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어이없어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청운진인은 그대로 말에 올라 떠났다.
너무 뜻밖의 말에 굳어 버린 이들은 한동안 멍하니 멀어지는 청운진인만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와, 의외!”
“대체 어쩌다가??”
미남에, 체격도 좋고, 사문도 좋고, 능력도 좋고, 성격도 매력 있어 보이는데 차였다니!
뜻밖의 이유에 다들 속닥거리기 시작하자 남궁청운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떨떠름한 얼굴로 외쳤다.
“거기 아가씨들. 재미있다고 소문내고 다니지 마라.”
“소문 안 내요!”
참으로 뜻밖인 남궁청운의 말에 수연이 웃으며 답했다.
“참 특이한 사람이란 말이지.”
“그러게.”
어떻게 봐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지만.
청운진인이 서둘러 돌아가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소주에 남아 있는 벗들이 걱정되어서겠지.
‘괜찮겠지.’
그곳 상황이 어떨지 알 수 없으니 그저 막연하게 괜찮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아버지인 연적훈 역시 마찬가지일 터.
이린만이라도 돌려보낸 이현의 판단은 옳았다. 설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는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 우리는 돌아가서 좀 쉬도록 하지.”
“네.”
찻집에서 숨을 돌린 일행은 연적훈을 따라 장사의 연가상단으로 향했다.
“아. 장주님, 돌아오셨… 오셨군요, 아가씨!”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장사 지부장인 연사훈을 필두로 아는 얼굴들이 이린과 일행을 맞았다.
“어머, 괴기기광 님의 조카분들도 오셨네요.”
“내가 가서 말씀 전할게.”
그리고 그중에는 뜻밖에 서로 구면인 이들도 있었다.
“어? 아가씨 오셨군… 으아악!!!”
“어?”
“아.”
곽천영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는 다순을 보며 이린은 자신이 이 둘이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폭행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의 얼굴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 * *
취로개의 말대로 소주의 상황은 엉망이었지만 다행히 백리한의 숙부와 가족들은 무사했다.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다행히 무사히 도망쳐 살아남은 그는 백리한의 청에 흔쾌히 저택을 치료소 대용으로 쓰는 것을 허락했다.
가족들은 무사히 챙겨 도망쳤지만 일하던 이들은 그때 도망을 친 것인지 죽은 것인지 생사를 알 수가 없다고. 건물이 비어 있는 것보다는 좋은 일에 쓰이는 것이 낫겠다며 많은 재산과 사람을 잃은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소흥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이 정도면 거기라고 안전하리란 법은 없지 않을까요.”
“일단 내려가서 형님과 얘기를 좀 해 봐야겠다. 어차피 백리세가는 그곳 지주이니 어지간해서는 떠날 수도 없고, 소흥주를 만드는 양조장도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지만 여인들만이라도 다른 곳에 보내 두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겠느냐.”
“후우.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는 게 큰일이군요.”
“곧 추수를 하면 저놈들이 또 다 털어 가려 할 텐데 걱정이구나.”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 숙부를 배웅한 백리한은 한숨을 내쉬며 벗들과 함께 주변을 순찰했다.
워낙에 죽거나 다친 이가 많아 끝이 보이질 않았지만 일단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잔당들로부터 보호했다. 종종 왜구의 잔당과 마주쳤는데 사람 수가 많지는 않아 그리 위험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과 달리 무림맹의 인물들과 취영개는 금방 찾아 보호할 수 있었다. 소주 역시 수로가 많았는데 수색 도중 물에 빠진 채 정신을 잃은 취영개를 발견한 백리한 덕분이었다. 거지라서 그런지 그 생명력은 참으로 끈질겼다.
“얼굴을 아는 사이니 어쩔 수가 없군.”
“기껏 구해 놓고 왜 말을 그렇게 해.”
이현의 웃음 섞인 핀잔에 백리한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취영개가 어지간히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쪽에는 이제 생존자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저 안쪽까지 가 볼 테니 먼저 가 있어.”
“저쪽까지 흘러들어 갔으면 살아 있기는 힘들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취영개를 노악에게 떠넘긴 백리한이 이현과 함께 안쪽으로 배를 몰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수로에서는 썩은 내가 나고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도 이 사이에 있으면 목숨을 건지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린을 데리고 오지 않길 다행이야.’
이런 끔찍한 풍경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쉬는 이현의 눈에, 수풀 사이로 무언가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기, 뭐가 움직이는데?”
“어?”
백리한이 배를 몰아 이현이 가리킨 곳 가까이로 다가가 수풀을 헤치자 뭔가에 상처를 입고 쓰러진 젊은 사내 하나가 보였다.
“이보세요, 괜찮으십니까?”
“…으…….”
이현이 말을 걸자 제대로 대답은 못 해도 신음 소리를 내는 듯했다.
“숨이 붙어 있어.”
“일단 데리고 가자.”
“하여간 연이현, 귀찮은 건 잘도 찾는다니까.”
“배까지 몰아 준 사람이 뭘 내 탓을 해.”
청년을 응급 처치하며 이현이 쿡쿡 웃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이현은 저택 안에는 자리가 없다는 말에 할 수 없이 데리고 온 청년을 저택 하인들이 쓰던 숙소로 데리고 가야 했다.
“무림맹 인사들이 적지 않은 데다 까다로워.”
“성가시긴 하지만 그래도 왜구와 싸우다 다쳤다는데 관대하게 봐주지 그래.”
“헤에. 본인들은 감추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봐도 혈교에게 당한 흔적들이 많던데.”
“혈교에게 당한 게 더 부끄러운가?”
“글쎄.”
“기준점이 다른 거겠지.”
한숨을 쉬며 이현은 깨끗한 물을 떠 취영개가 있는 방을 찾았다. 다행히 의식을 차린 듯 취영개가 멍한 눈으로 이현을 맞았다.
“유정검… 내가 그대들에게 신세를 지는군.”
“어려울 때는 도와야지요.”
끌어들여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던 전적이 있으니만큼 취영개는 대답을 피했다.
“아직 젊은 개방도들도 있었네. 제발… 시신이라도 거둬 주게.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취영개에게 진통제를 먹여 준 이현은 한숨을 쉬며 하인들용 숙소로 향했다. 아까 데려온 청년도 어쩌면 의식을 찾았을지도 몰랐다.
끼익-
“너, 넌 누구냐!!”
“…….”
그것이 자신이 구해 준 사람에게 이현이 들은 첫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