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0
20.
떠나는 것은 빠를수록 좋았기에 배웅은 길지 않았다.
연가장을 떠나며, 그사이 새로 장만한 연가장의 대문을 돌아본 금혜 선사가 흐뭇한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호남 연가장에 대단한 무재가 나왔습니다.”
“연가장의 소장주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어린 나이에 남다른 무재더군요. 떠나기 전에 잠깐 보았을 때와도 어딘지 기도가 달라 보이고요.”
“어린 소장주도 물론 대단하지만, 빈승이 말하는 것은 어린 여동생 쪽입니다.”
“네?”
“여아(女兒)이니 소림의 제자로는 들일 수 없어 아쉬울 뿐입니다.”
금혜 선사의 말에 윤승재는 이미 보이지도 않는 연가장의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무가의 아이답게 자질이 뛰어나고 담력도 남달라 보였지만, 여아이기에 딱히 제자를 들여야 하는 친한 사저(師姐)나 사매(師妹)도 없는 연승재는 그리 관심 있게 보지 않았었다. 무엇보다,
“연유는 모르지만 연가장에 얽히는 것은 다들 꺼리지 않았습니까? 소장주 연이현 역시 뛰어난 무재인데 제자로 들이려는 곳은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소장주라 하나 연가장이 다른 문파의 속가(俗家)도 아니니 이름난 대문파라면 제자로 권해 볼 만한데,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아미타불. 꺼리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것뿐이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림이야 그리 조심스러워할 이유가 없으니 아쉬울 뿐이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럼 소장주에게는 왜 권하지 않으셨습니까?”
“연 장주께 영식(令息)은 하나뿐인데, 하나뿐인 장남을 불가(佛家)에 출가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속가 제자로 두기에는 아까운 재능이고 말입니다.”
“아.”
제가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 윤승재는 얼굴을 붉히며 금혜 선사를 따라 비천산을 내려갔다. 애초에 남의 일에 신경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다.
* * *
“아빠!”
“민아!!”
장주님이 자리 비우신 사이 밀린 일이 많다며 장 총관은 연적훈을 끌고 갔다.
이린의 안내를 받아 바로 민영을 찾아간 서문제우는 며칠 만에 다시 만난 딸과 감동의 상봉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린은 옆에 서 있는 오빠에게 툭툭 눈치를 줬지만, 이현은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이 이린이 미리 준비해 준 상자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아저씨, 아저씨께 드릴 게 있어요.”
“……?”
이린이 건네준 상자를 열어 보자 약초 향이 나는 단약 하나가 나왔다.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서문제우가 눈을 부릅떴다.
“이건……!”
“린아 몫으로 준비해 두었던 영약입니다. 린아가 민아에게 양보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제가 관리하던 것이라 린아의 성화에 못 이겨 승낙했습니다.”
서문제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나 쉽게 양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얼마 전 처음 알게 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아이를 위해 이런 귀한 것을 양보하다니……!’
이린은 아직 어려 가치를 잘 모를지 몰라도, 소장주인 이현이 이것을 민영에게 주는 것을 쉬이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 장주님은 물론이고, 도련님과 아가씨 두 분은 저와 딸의 은인이십니다!!”
어느새 호칭과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고개를 조아리는 서문제우를 보며 이린과 이현은 황급히 그를 일으켰다.
“민아가 빨리 나아야죠. 아저씨도 힘든 일이 많으시겠지만 기운 내세요.”
“예!!”
이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서문민영만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린이 준 영약은 동굴에서 발견한 것이 아닌, 영물에서 채취한 내단으로 새로 만든 것 중 하나였다.
‘아무리 영약이라지만 아픈 아이에게 먹일 거면 역시 오래된 것보단 좀 신선한 게 좋지 않을까.’
이현으로서는 본인이 확실하게 효과를 확인한 만큼 더 좋은 것을 이린에게 주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둘의 뜻은 일치했다.
오누이가 가져온 내단으로 만든 영약에 대해선 장 총관 아저씨가 연적훈에게 보고할 예정이었고, 서문민영에게 주겠다는 말 역시 이미 전해 두었다.
아픈 아이에게 주는 것에 대해 아버지가 반대할 리가 없다는 남매의 단호한 얼굴을 본 장 총관은 피곤한 듯 잠시 이마를 감쌌다. 이 집에서 일한 지 십 수 년, 저 단순한 사고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서문제우의 상태도 좋아 보이니 지금 심법을 건네줘도 문제는 없겠지.’
그리고 이린은 오빠인 이현 몰래 다시 한 번 서문제우를 찾아갔다. 이린이 그동안 민영을 돌봐 왔으니 핑곗거리는 충분했다.
“의원이 계속 약을 주고 있으니까 시간 맞춰 계속 먹어야 해요. 자영이 챙겨 주지만 민아가 영 먹기 싫어해서 도망 다니거든요. 시간 되면 붙잡고 계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본 아빠와 놀다 지쳤는지 어느새 잠들어 있는 민아를 힐끗 본 이린이 품에 감춰 온 서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건 아빠와 오빠에겐 비밀이에요.”
“네?”
“혈맥을 바로잡는 데 효과가 있는 심법이에요. 제가 익혀 본 것은 아니지만 꽤 정순하니 아저씨가 먼저 익혀 보신 후 민아에게 가르쳐 주세요.”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하긴 했지만, 이미 이전에 남궁청휘가 보증했었다. 동굴 안에 있던 비급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정순한 정파의 것이라고.
“아가씨께서 가지고 계신 심법이라면 가문의 것이 아닙니까.”
“아, 연가장 거 아니니까 그건 걱정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남의 가전비급(家傳秘笈)을 몰래 받을 수 없어 손사래를 치는 서문제우를 보며 이린은 안심하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꽤 양심적인 그의 모습이 꽤 달가웠다.
‘기왕이면 좋은 사람에게 주고 싶으니까.’
이린의 말에 서문제우는 별 기대 없이 고사리 같은 손에서 비급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곧 표지 없는 비급의 책장을 몇 장 넘겨 본 서문제우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비록 표지에 적혀 있진 않지만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이것은 ‘해경심법(解境心法)’이라 불리는 비급이었다.
존재한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형체도 잡을 수 없던 비급이 뜻밖에도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문제우를 속인 자들이 가지고 있다며 그를 속였던 그 심법이기도 했다.
“아, 아아……!!”
한 장 한 장 넘겨 보며 모자람 없는 진품임을 확인하고 감격에 신음하던 서문제우는 그대로 이린 앞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쿵!
“은공(恩公)!! 이 서문제우, 죽어도 은공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 괜찮으니 일어나세요.”
서문제우의 과격한 행동에 놀란 이린이 그를 일으켰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자라 서문제우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진심이구나, 이 아저씨.’
진심으로 딸을 살리고 싶었던 거다. 아내를 잃고, 하나밖에 없는 딸을 살리겠단 일념으로 무리해 표행까지 감행했지만, 함정에 빠져 쫓기면서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까지 잃었겠지.
가족을 모두 잃었던 경험이 있는 이린은 그 공포와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에요. 저는 민아가 건강해졌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비밀이에요? 제가 이걸 드렸다는 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희 아빠와 오빠한테도요.”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아빠와 오빠한테는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쉬세요.”
지나치게 결연한 목소리에 당황한 이린이 서문제우를 다독이고 조용히 물러나자, 소란통에 부스스 눈을 뜬 민영이 아빠를 불렀다.
“아빠 왜 그래……? 선녀 언니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선녀… 아니, 우리에게는 천녀님이시구나. 그분은 우리 부녀의 은인이시란다.”
‘언니 갔어?’ 하며 멍하니 이린을 찾아 문가를 두리번거리는 아이를 끌어안고, 서문제우는 끝없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얼거렸다.
부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아이가 불치의 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하루하루 지옥 같았다. 하지만 오늘, 하늘로부터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후우.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어.’
가족들이 몰살당하고, 믿었던 식구들 중 반절 정도가 실은 이린을 죽이려 했고, 나머지 반절의 사람들은 살해당했으며,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마저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처럼 끔찍한 일을 많이 겪은 이린이지만,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피를 쏟는 모습은 역시 충격적이었다.
생판 남인 이린조차 이런데, 친아비인 서문제우에게 그 어린아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하기도 겁났다.
‘다행이야. 민아에 대해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고.’
서문제우는 맨주먹으로 표국까지 세웠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고 생활력 강한 사람이니 이후 일은…….
“아니, 아니지.”
서문민영은 심법을 익히기엔 아직 너무 어리고, 서문제우는 혈교라는 의혹을 받은 탓에 지금껏 쌓아 온 신용이 땅에 떨어져 있을 터.
아무리 이제 와 ‘무림맹에서 조사해 보니 오해 같더군요’라고 한다 해서 바로 신용이 회복될 리 없다.
그사이에 또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눈이 뒤집혀 무슨 일을 벌일지 장담할 수도 없고.
“끄응.”
자신을 은공이라 부르며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던 서문제우의 모습을 떠올린 이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애는 함부로 줍는 게 아니야.”
한 번 주우면 눈에 밟혀서 결국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었다.
* * *
“아저씨는 원래 표국을 운영하셨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지금 어떻게 됐나요?”
“혈교의 잔당으로 오해받았으니 지금쯤 표국은 폐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다 함께 차를 마실 때 이린이 먼저 운을 뗐다.
이린 덕분에 서문민영에 대한 걱정은 덜었지만, 안 그래도 앞날이 캄캄했던 서문제우는 이린의 말에 애써 담담하게 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에게 생활고에 대해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해로 멀쩡한 표국 하나를 무너뜨렸으니 무림맹에 피해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게 어디 쉬울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어디 표국에 표사로라도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무림맹에서 적어도 신원 보증 정도는 해 주겠지요. 하지만 우선은 표국에서 일하던 식솔들이 어찌 되었을지 걱정되니 일이 조금 잠잠해지고 나면 그것부터 확인해 보려 합니다.”
표국주 출신의 표사라니. 지나친 고급 인력이라 취업이 될까 싶었다. 위장 신분이라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서문제우의 말에 딸린 식구가 많은 연적훈은 공감한 듯 한숨을 내쉬며 걱정에 동참했다.
“아직은 자네가 움직이기 힘들 테니 내가 서문표국에 사람을 보내 보겠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장주님!”
“일단 표국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부터 보고 결정하게나.”
아마 무사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면서도, 연적훈은 애써 서문제우를 달랬다. 무림맹에서 금전적 배상을 해 줄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니 서문제우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