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07
207.
“!”
조심스레 제단 아래에 손을 뻗는 순간, 누군가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낀 이린은 서둘러 들어온 곳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여기에 들어오신 건 아니겠지?”
걱정이 섞인 어조에 이린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지금 여기서 나가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대체 어딜 가신 거람.”
한숨과 함께 몸을 돌린 백혜안은 제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고모님.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는데 보이질 않아 이곳까지 찾으러 왔습니다.”
익숙하게 향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면 이곳은 지현문 사람들이 아는 곳인 듯했다.
‘설마 진짜 관이었나.’
이린은 제단 아래쪽을 열어 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도 죽여 봤으면서 시체가 무섭냐고 하면 이상하지만 시체를 보는 걸 좋아할 이유도 없었다.
“고모님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호남 연가장의 어린 영애랍니다. 아마 고모님도 살아 계셨다면 분명 무척 반가워하셨겠죠.”
백혜안은 그렇게 말하며 생각났다는 듯 제단 밑에 있는 돌로 된 관을 꺼냈다. 스르륵 당겨지는 것을 보니 꺼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관의 뚜껑을 열었다.
“!!”
이린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스스로 입을 막았다.
관 안에는 정말 사람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단정하고 자애로운 얼굴의 중년의 여성으로 백씨 일가와 조금 닮은 듯했다.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으시군요.”
백혜안은 아까 뽑아 온 꽃을 여인의 몸 위에 얹어 놓고 다시 관을 닫아 원래 위치에 되돌려 놓았다.
“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다시 예를 갖춘 백혜안은 한숨을 쉬며 동굴을 빠져나갔다.
“길이라도 잃었다면 큰일인데….”
멀리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이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이린은 떨떠름한 얼굴로 제단을 한 번 더 살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뒤로 물러나 예를 갖췄다.
새삼 시체가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의선에게 신세를 졌다는데 아무리 고인이라지만 그 친인에게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물론 시체를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시체를 왜 동굴 속에 보관한담. 매장하지 않고?’
혹시 신교에 그런 관습이라도 있나?
“호기심으로 방해해서 죄송해요.”
고인이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찜찜했던 이린은 작은 목소리로 사죄한 뒤 동굴을 빠져나갔다.
이곳이 신교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 * *
쾅!!
“실패했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교주님!”
오랜만에 돌아와 교주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세하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지금 들어가 봤자 화풀이만 당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귀만 쫑긋 세우고 무슨 일인지 대강 파악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한월각으로 돌아오자 익숙한 이들이 세하를 맞았다.
“신녀님!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확인할 일이 있어 잠시 돌아왔네. 혈교 쪽이 시끄럽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교단 내의 소소한 일들을 맡아 처리하는 조덕은 신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얼마 전 있었던 용봉지회 때 제갈세가의 비고에 침입했는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제갈세가에? 이유는?”
“제갈세가가 가지고 있던 혈교의 물건 때문이랍니다.”
“뭐? 제갈세가가?”
세하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에 조덕은 슬쩍 신녀의 눈치를 살폈다. 진위를 파악하려는 눈빛이었다.
“혈교의 물건이라니, 뭘 말하는 거지?”
“무엇인지 아는 자는 없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탈취하는 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알았다. 내가 나중에 따로 알아보지.”
“예, 그리고…….”
오랜만에 한월각에 돌아온 세하는 조덕의 입에서 끊이지 않는 온갖 성가신 소식들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문득 조덕의 얼굴에 남은 작은 흉터 자국을 보고 물었다.
“…요즘 아들과는 어떠한가?”
“나쁘지 않습니다.”
“여전히 혈교에 남겠다던가?”
“사내들이 다 그렇지요. 혈교는 피를 숭상하고 포상이 확실하니, 신교를 따르지 않습니다.”
신교는 믿음으로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었기에 맹신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 어릴 적부터 신교에서 자란 자들도 혈교를 접하고 나면 신교가 아닌 혈교에 빠지는 경우가 잦았다.
“또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고?”
“걱정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애써 괜찮다 하는 조덕을 보며 세하는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교가 혈교와 함께하며 생긴 가장 큰 폐해, 세하를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신교는 여인이 많았고, 혈교는 사내가 많았다. 두 집단이 결합해 최소 십수 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자연히 연을 맺고 아기를 낳는 경우 역시 왕왕 있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신교가 힘이 없던 시절 태어난 아이들은 상당수가 혈교로 흘러 들어갔다. 덕분에 신교가 혈교와 떨어지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핏줄을 끊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특히 그 어미들 중에는 신교가 어려운 시절부터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이들이 많았고, 교단 내에서 그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나이가 많은 그들은 때때로 신녀인 세하를 존중하는 것조차 잊곤 했다. 지금처럼.
“요새는 그래도 제법 어미를 생각해 줍니다. 아들이 있으니 역시 든든한걸요. 신녀님도 아이를 가져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
조덕의 얼굴에 남은 흉터는 아들이 남긴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덕은 아들이 사랑스럽다고 한다. 혼인도 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않았고, 그들의 자식들만큼이나 어린 세하가 설득하는 것은 이미 통하지 않았다.
‘차라리 세뇌하는 게 나았을까? 혈교가 그러하듯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그들과 같은 방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기를 바랐을 뿐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틀렸을지도 몰랐다.
“그럼요. 이런 마음을 신녀님은 모르시겠지요.”
“내가 알아야 하나?”
“아닙니다. 신녀님은 저희 같은 자들과는 다르니까요.”
서늘해진 주변의 온도를 깨달았는지 조덕은 말을 줄였다. 그러나 세하는 자신을 보는 조덕의 눈동자에서 꺼림칙한 무언가를 느꼈다.
“신녀님, 오셨습니까.”
“소운.”
세하는 자신을 마중 나온 소운을 보고 반색했다. 소운 역시 세하의 앞으로 달려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웃는 얼굴로 조덕에게 지시했다.
“신녀님은 내가 모실 테니 자네는 가서 교주님의 심기가 어떠하신지 좀 살펴 주게.”
“예.”
소운의 지시에 내심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여인의 눈에 묘한 욕망이 일렁였다. 이를 본 세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덕의 아들은 세하보다 조금 연상이었다. 여염집이었다면 충분히 혼담이 오갔을 정도의 나이 차였다.
‘신교인이라 해도 다 같을 수 없다….’
모두 욕망이 다르니까.
세하가 원하는 것을 신교도들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가족이 혈교인이라면 더욱더.
세하가 무공으로 혈교의 부교주를 제압한 것은 신교와 혈교가 함께한 시간에 비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혈교에게 억압당하는 삶에 익숙해진 이들은 폭행을 당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따른다. 그런 이들은 자신이 아무리 보듬어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아이가 있는 모든 이들이 이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수가 적지 않으니 저들끼리 그것이 옳은 삶이라 여기며 그 삶을 지켜 가려 한다.
‘딸뻘의 어린 계집을 신녀라 부르는 게 용할 지경이지.’
반면에 그들과는 반대로 사내라면 질색을 하는 이도 있었다.
“신녀님. 곤하실 터인데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고맙네, 소운. 그대가 없었다면 분명 이곳을 비우기 힘들었을 텐데. 내가 마음 놓고 황도에서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건 대모님과 그대들이 있기 때문이야.”
“감사합니다. 신녀님.”
조덕과 비슷한 연배인 소운은 혈교를 싫어하는 이들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황궁에서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부인의 손에 소황룡을 쥐여 드렸지. 서로가 서로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 줄 수 있는 관계이니 어찌 반기지 아니할까.”
조금 걸리는 일이라면 황보세가의 장남이 자꾸 곁을 맴돈다는 것 정도일까.
‘파혼했다더니 개인적 호감이라도 남았나.’
방해만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어설프게 건드리기도 힘든 상대였다.
“혹시 그대도 혈교의 소식을 들었나?”
“제갈세가에 관한 일 말씀이시라면 알고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지?”
“글쎄요. 하지만 만약 신교의 것이라면 저희가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찻물을 올리며 소운은 싱긋 웃었다.
“이런, 소운은 너무 극단적이야.”
“그렇기에 대모님께서도 저를 곁에 두시는 거겠지요.”
“대모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나?”
“…혈교가 제갈세가에 침입할 때 이전에 신교가 남겨 두었던 연줄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건… 그래, 제갈세가의 담장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세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세가에 남아 있던 신교의 교인이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신교의 뜻이라 생각하고 행동했겠지. 신교의 이름으로 무고한 이를 이용했음에도 처벌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에게 세하는 깊은 회의를 느꼈다.
‘정보의 유출도 걱정해야 하니….’
특히나, 자식이 혈교에 투신한 여인들은 혈교를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늘 주의를 기울였다.
“위지선은 어떻게 하고 있지?”
이번 제갈세가에서의 일은 분명 위지선이 주도했을 텐데 아까 교주에게 혼나고 있던 목소리는 분명 위지선이 아니었다.
“부교주께선 작년부터 교주님의 명으로 다른 일을 진행하느라 부재중이십니다.”
“그럼 이번 일은 교주께서 직접 주도하셨겠군?”
그런데도 실패했으니 저리 역정을 내고 있던 모양이었다. 모르는 척하길 잘했지, 세하는 키득 웃으며 다향을 즐겼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신경 쓰이는 일이 있습니다. 그간 무림맹에 혈교의 정보를 유출하던 자에 관해 드러난 일이온데.”
“말해 보게.”
“그동안 혈교의 정보를 유출하던 자가 보내는 서신에 뱀 무늬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뱀?”
이번에 무림맹이 정보의 혼선으로 소란스러울 때 혈교의 간자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연이린이 비슷한 무늬가 있는 종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요.”
“연이린이?”
제갈세가에서 들어온 이야기였다. 용봉지회 이후로 외부인은 물론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철저하게 단속해서 소식을 전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으니 생필품을 사기 위해 드나드는 이를 통해 겨우 전달된 사실이라 했다.
“연이린은 어릴 적부터 뱀을 데리고 있었으니… 아직도 키우고 있다면 우연히 종이에 무늬가 찍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 검성의 집안사람이라는 것도, 용봉지회 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도 걸렸다. 무엇보다 이린은 아직 어린 소녀답지 않은 실력을 가진 고수였다. 잠깐이지만 직접 검을 맞대본 세하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궁청휘와 당자혜의 이름에 가려져 있어 혈교 역시 아직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린은 결코 소문처럼 경공만 뛰어난 이가 아니었다. 어쩌면 제갈세가에서도 혈교의 일을 방해했을지도 몰랐다.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어쩌면 검성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어린 연이린이 혼자 그런 정보를 얻어 혈교를 방해할 수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세하를 포함한 신교의 사람들은 대부분 연가장을 적대하는 데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그곳은 옛 동료의 고향이며, 죽은 선대 교주의 고향이기도 했다. 선대 교주는 연가장을 떠나기 전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의 연가장주와 그 자손이 장주로 있는 동안은 결코 연가장에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죽기 전까지 늘 연가장을 그리워하곤 했다고 대모는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신교는 그 약속을 지킬 여력이 없구나.’
검성이 이끄는 연가장의 무인들이 혈교와 격전을 벌인 적도 있으니 약속은 어디까지나 ‘연가장’으로 한정되어 었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신교의 힘이 남아 있기에 존중해줄 뿐. 아마 혈교에게 좀 더 힘이 생긴다면 교주는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혈교에서는 알고 있겠지?”
“제갈세가 쪽 정보망은 이미 오래전 혈교에게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소운의 말에 세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 일은 가능한 대모에게 알리지 않고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신교의 일은 대모님과 소운이 맡고 있으니 숨길 순 없었다.
“나는 곧 다시 황도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부재중인 동안은 지금까지처럼 소운이 대모님을 돕도록 해.”
“예. 신녀님.”
분명 대모님은 연이린을 죽는 걸 원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러하듯.
하지만 교주는 다르겠지. 일을 방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검성과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전도유망한 여고수라는 것만으로도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세하는 마지막으로 본 이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면 검성과도 닮았을까.’
혈연이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교주는 더욱 연이린을 죽이고 싶어 할 것이다. 힘없는 어린 소저가 아니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인이라면 특히나 더.
“화근의 싹을 잘라버리고 싶어 하겠지. 무엇보다….”
교주는 검성을 증오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