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1
21.
“그럼 아빠랑 같이 일하면 어때요?”
“린아.”
어른들의 대화에 당돌하게 끼어든 이린에게 이현이 가볍게 주의를 주었지만, 이린은 모르는 척 민영에게 과자를 먹여 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상단도 다른 지역을 오갈 일이 많으니 표국이 있으면 좋잖아요. 아저씨는 경력자고.”
“그건 그렇다만, 내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었더냐?”
“그 정도는 보면 알아요.”
일부러 어린아이다운 태도로 무심한 척 말하고 있었지만, 이린은 한때 장주로 지냈던 몸이었다.
그때 장 총관이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차라리 직접 표국을 만들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새로 경쟁에 뛰어들기에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이라 포기했다고 들었다.
‘서문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두고 새로운 표국들이 싸우기 시작했다던가?’
이린의 말이 일리 있다 여겼는지 이현도 말을 보탰다.
“생각해 보면 장원의 무사들도 상단의 무사로 차출되곤 하지 않습니까? 표사로 실전을 익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현의 의견은 이린이 장주가 된 후에 돈을 벌기 위해 했던 방식과 같았다.
이린에게 패해 유용한 노동력이 된 무림인들은 어지간한 고수들이 아니라면 장원의 일꾼과 표사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받았다.
대부분은 자존심 때문에 차마 일꾼은 못 하겠다며 표사를 택한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팔자에도 없는 표사 노릇을 해야만 했다.
그냥 도망치기에는 패배 시 연가장에서 일하겠다고 한 맹세를 지켜본 이들이 너무 많았다. 평생 강호에 비겁자로 낙인 찍혀 웃음거리로 전락할 판이니, 거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성공하면 장주의 부군, 실패하면 임시 일꾼 혹은 표사. 어찌 되었든 남는 장사라 몰려드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때 제법 쏠쏠하게 벌었지.’
가끔 명문정파 출신들이 봐달라고 눈치 줄 때면, 어떻게 안 건지 정파 사파를 가리지 않고 견원지간인 자들이 귀신같이 찾아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 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편하기도 했지만, 시비가 붙어서 성가시기도 했다.
그래도 조용하고 적막하기만 한 것보다는 나았다. 이제는 웃음만 나오는 기억이 되었지만.
“장주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은 생각 같네.”
장 총관의 말에 연적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무림맹에서 제대로 수습하고 나면 서문제우에 대한 불신은 연가장의 이름으로 충분히 덮어 줄 수 있다. 금전적인 면에서도 연가장에 손해는 없었다.
무엇보다 서문제우는 경험이 풍부한 표사 출신의 표국주.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표국을 운영한다면, 인선에 고민하거나 시행착오를 거칠 일도 적을 것이다.
“흠… 위연도수,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저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확 밝아진 얼굴의 서문제우를 보며 연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나중에 장 총관과 함께 얘기하도록 하세. 표국이 아니더라도 원한다면 우리 상단에서 일할 자리는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 말고.”
“감사합니다, 장주님!”
“민아가 아직 어리니, 표국으로 집을 비우게 되어도 우리 장원에 맡겨 두면 안심될 테지. 허허.”
은근히 운을 띄운 얘기가 잘 흘러가는 것을 보며 안도하던 이린은 화기애애한 대화 도중 생각지 못한 전개에 숨을 삼켰다.
“하하. 민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아하하, 네에.”
웃으며 대답하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 난감했다.
‘이런, 이걸 생각 못 했네.’
서문민영은 귀엽고 이린을 잘 따랐지만, 이린은 민아를 돌봐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었으니까.
물론 자영이 잘 돌봐 주겠지만, 자신을 유독 따르는 민아를 어떻게 떼어 내야 할지 고심하던 이린에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여기 달리 누가 있어.”
자신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를 보고 굳어 있는 장래의 광한검, 진여운의 모습은 볼만했다.
“민아야, 앞으로 이 오빠한테 놀아 달라고 해.”
“민아는 천녀 언니가 좋아.”
서문민영은 앞에 있는 소년은 안중에도 없는 듯 홱 고개를 돌리며 이린에게 매달렸다.
‘언제 선녀에서 천녀가 됐담.’
드물게 반항하는 서문민영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이린은 아이를 타일렀다.
“언니는 바쁘거든. 언니가 없을 때는 이 오빠가 민아랑 놀아줄 거야.”
“겍.”
싫어 죽겠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는 진여운을 보며, 이린은 내심 혀를 찼다. 싫어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거부하다니. 역시 그때 각 잡고 제대로 팼어야했나 약간 후회가 들었다.
‘아니야. 지나친 폭력은 좋지 않아.’
모든 일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하는 무림인들의 고질병에 벌써부터 물들어선 곤란했다.
이린의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진여운이 불퉁한 태도로 물었다.
“제가 왜 애를 봐야 합니까?”
“인격 수양.”
“!!”
“연가장주이신 우리 아버지의 별호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군자검(君子劍)…이시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인격이 부족하다면 아버지와 오빠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 심성을 기르는 데에는 육아… 아니, 보육만 한 게 없지.”
이린이 대충 아무 말을 하고 있는데도, 장주와 소장주에 대한 존경심으로 눈이 흐려진 여운은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할 일이 있어 바쁘고, 자영도 집안일을 해야 해서 민아를 보지 못하는 동안만 봐주면 돼. 몸이 아픈 아이긴 하지만 의원이 상시로 보고 있으니 체력 부족 외에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너만 믿을게. 잘해 봐.”
지난번 대련 이후 설득력이 생겨 버린 이린의 말에 뭐라 대거리도 하지 못하고 여운은 뭐 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눈을 부릅뜨고 이린에게 청했다.
“대신 대련해 주십시오.”
“내키면.”
맡겨 놨니.
이린은 혼자 노는 게 익숙해져 있어 지금도 풀을 뜯으며 혼자 잘 놀고 있는 서문민영의 손에서 풀을 뺏고는 당부했다.
“장원에 아이들은 많으니까 같이 놀아 줘. 너 만날 혼자 노는 건 아닐 거 아냐?”
“…….”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진짜냐.
‘그래, 그럴 거 같았어. 저 성질머리.’
어색한 침묵을 수습하기 위해 서문민영을 여운에게 내밀며 이린은 슬슬 뒤로 물러났다.
“민아를 잘 챙겨 주면 오빠도 기뻐할 거야. 이 기회에 애들이랑 교분도 좀 다지고.”
“알겠습니다.”
소태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여운은 서문민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어느새 또 새로운 풀을 뜯어 놀고 있는 민영의 손에서 풀을 빼앗았다.
하지만 민영은 이린에게 순순히 내줄 때와는 달리 진여운의 손을 철썩 쳐냈다.
“놔!”
“이게……!”
여운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이린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민아야, 언니는 이제 가 볼게. 누가 괴롭히면 언니나 이현 오빠한테 말해야 한다!”
“응~!!”
민영이 방싯방싯 웃으며 이린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남겨진 두 사람의 모습이 영 불안했다.
‘한동안 좀 지켜볼까.’
장원에서 아이들끼리 지내니 어느 정도 아이를 돌본 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애를 본 적이 전혀 없다면 조금 걱정이었다.
“전에도 그랬던가?”
진여운에게 관심이 너무 없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장원 내에서야 고수였으니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고.
성격도 실력도 남다르니 배척당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또 딱히 친밀하게 지내는 이도 없었던 것 같다. 늘 이현을 따라다니던 것만 기억났다.
‘설마 그래서 오빠한테 더 집착을……?’
이린 자신도 장원에 틀어박혀 살았으니 안타깝게도 인간관계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었지만……. 여운을 보니 갑자기 경계심이 들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게 이런 거구나.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집은 산중에 외따로 떨어진 장원이고, 외모도 특이해서 친구 사귀기에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만들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젠 집에만 틀어박혀 살 순 없으니까.
‘혈교가 하는 짓들을 내버려둘 수도 없고.’
이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곰곰이 떠올렸다.
장주가 되고 나선 장원에 처박혀 있었지만, 바깥일에 귀 닫고 지내지는 않았다. 동굴 안에서 남궁청휘에게 들은 이야기들도 있기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지만, 일단 지금 자신은 어린아이였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일단 필요한 건 무공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수준 이상으로 향상시키는 거고.’
장원을 지키기 위해선 아버지와 오빠는 물론이고 장원 무사들의 실력 향상도 필요했다.
“우선 먹여야겠다.”
모처럼 영물을 잡았는데 유용하게 써야지.
그날부터 연가장에서 지옥의 식단이 시작됐다…고 하면 과장이지만, 사실 영물이라는 게 몸에 좋은 것이지 딱히 맛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린과 이현이 잡은 것은 도마뱀과 지네. 도마뱀은 그래도 괜찮지만 지네의 맛은…….
“대체, 요즘 음식이 왜 이러지?”
“역시 그렇지? 이거 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몸에 좋은 거니까 먹어 둬라!”
“총관님! 이거 대체 뭔가요!”
“누가 실수로 상한 고기라도 매입한 겁니까?”
음식 맛에 대해 항의하는 장원 무인들에게 장 총관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어리석은 놈들! 소장주님과 아가씨께서 산에서 우연히 귀한 영초(靈草)를 찾아내셔서 장원 식구들에게 함께 먹자고 하셨거늘 그 깊은 뜻도 모르고!”
영물을 찾았다고 하면 당연히 내단에 대해 알려질 터, 이현과 이린은 장원 사람들에게 고기가 아닌 국물에 들어간 영초가 특별한 것이라 속이기로 했다. 그러면 어쨌든 다 먹기는 할 테니까.
“기분 탓인가. 요즘 몸이 가뿐하지 않아?”
“정말.”
“듣기로는 아가씨께서 발견하신 영초라며.”
“크흠. 거 요상한 눈이라 뭐가 더 잘 보이는 거 아닐까?”
“좋은 거 얻어먹고 흰소리하다 쫓겨나도 난 모르네. 먹기 싫으면 먹지 말게. 내가 먹을 테니.”
“아니, 누가 안 먹는댔나!”
아무리 맛이 이상해도 몸에 좋다는 걸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쉽게 넘어가지 않고 음식의 정확한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이 괴상한 음식은 대체 뭡니까?”
“몸에 좋은 거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린의 앞에서 차마 못 먹겠다는 말은 못 하겠어서, 서문제우는 꺼림칙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었다.
“오빠가 뒷산에서 잡아 온 영물인데~”
“감사히 먹겠습니다.”
몸에 좋다면 가리지 않는 게 무인들 아니던가. 안 그래도 요새 마음고생이 심해 몸이 축난 서문제우는 괴상한 맛이 나는 이 음식을 꼭꼭 씹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