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14
214.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아이들까지 돌봐야 하나?”
“지현문에 맡기러 가는 것뿐인데 그것도 못 견뎌요?”
이린의 한숨 어린 핀잔에 곽천영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살면서 아이를 돌본 적이 없나 봐요?”
“…없어. 그딴 거.”
곽천영이 툴툴거리며 아이들을 외면했다.
일행이 데리고 나온 아이들은 부모님은 물론 돌봐 줄 이도 없이 천애 고아가 된 아이들이었다.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들은 축 처져서 훌쩍훌쩍 울었고, 다소 어린아이들도 겁을 먹었는지 눈치를 보며 음식을 먹고 있어 사정을 모르는 이들도 딱하다며 쳐다볼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스러운 건 표정을 잃고 멍하니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아이들이었다.
이런 아이들과 곽천영을 보며 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랑 혼인하지 않길 다행이지.’
남편 노릇은 물론 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았다.
“연 소저,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괜찮다니까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돕던 청휘가 그날 이후로 기운이 없어 보이는 이린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린은 그때 제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더 퉁명스레 고개를 돌렸다.
‘강시에게 습격당한 일로 많이 놀라기도 했겠지.’
그래 봤자 영 기운이 없어 걱정만 살 뿐이라는 걸 이린은 알지 못했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흘낏 남궁청휘를 살피는데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린은 울컥해서 따졌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연 소저가… 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싫기는, 싫어하는 사람에게 누가 그런 소릴 할까.
자신이 그날 저지른 짓을 떠올린 이린은 민망함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몰라서 저질렀을까.
공연히 억울하고 무안하여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얼굴을 붉히는 청휘를 보자 이린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옆에서 보기엔 참 재밌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많은 덕분에 두 사람은 어색해하면서도 결국 아이들 때문에, 조용히 대화를 이어 가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묘한 공기는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 * *
“언니!”
지현문으로 가는 도중 이린은 개방에 잠시 보호를 부탁했던 아이들을 만났다.
기대에 차서 웃으며 달려 나온 오누이는 이린이 시선을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린의 뒤에는 낯익은 동네 아이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엄마 아빠가 이제 정말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지현문에서는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흔쾌히 아이들을 맡아 주었다.
“아이들의 몸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어른보다 아이들의 회복력이 더 뛰어나기도 하니 지금 문제가 없는 아이들이라면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역시 마음의 상처가 크겠지요.”
개방의 제자들 몇이 따라오긴 했지만 지현문에서는 별 내색을 하지 않고 아이들의 용태만을 확인했다.
‘애초에 지현문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지현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데 감시만 할 것이 아니라 이 근방에 좀 더 신경을 쓸 수는 없었던 걸까.
개방의 행동이 썩 맘에 들지 않는 이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을 비교적 빨리 찾아낸 것도 지현문이 이상을 눈치채고 우리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야. 개방에서는 지현문이나 우리가 이상하다고 말해도 새겨듣지 않았지. 만약 이번에 우리가 지현문에 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싹한 추측이었다. 이번에는 이현이 직접 찾아왔기에 말을 꺼낸 것이지, 지현문은 문파에 직접적인 해가 미치는 것도 아닌 이런 작은 일로 연가장에 도와 달라고 요청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마 예전에는,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이린이 보기에는 가장 높은 확률로, 혈교가 만들고 있던 강시들은 지현문에서 벌어진 그 날의 참사와 연결이 있어 보였다.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한숨을 내쉬던 이린은 따라온 개방도들이 자신을 보고 움찔움찔 떠는 것을 보고 조용히 경고의 말을 남겼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 괜한 트집으로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고 믿겠어요.”
“연 소저,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현은 아이들이 몸이 회복되고 나면 연가장에 연락해 달라고 청했다. 지현문에서 모두 맡기에는 아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저기, 저랑 동생은 언니 따라가면 안 돼요?”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게 좋지 않겠니?”
“저 애들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걸요.”
아이들은 마을에서 조금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자랐다.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나마도 이번 일로 잃었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잃은 외로움을 아는 이린은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매달리는 아이들을 못 본척할 수 없었다.
“…나와 같이 가도 내가 너희들을 돌봐 줄 수는 없단다. 그래도 괜찮겠니?”
“그럼 언니처럼 강해질 순 없어요?”
“으음. 글쎄.”
지현문도 당연히 무공을 익히는 곳이지만 아이가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날 이린이 개방도들 앞에서 벌인 일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애들 앞에서 못 할 짓을 했군.’
뜻밖에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된 이린은 원하는 대로 아이들을 데려가기로 했다. 아이는 무술에 자질이 있어 보였고, 본인이 희망하는데 굳이 거절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꽤 남쪽으로 내려왔던지라 연가장이 더 가까웠기에 일행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단 연가장으로 향했다.
“연가장이요? 저도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지금까지 계속 함께 다녔으면서 새삼스럽게 뭘 확인하고 그래요.”
“그래도요.”
그렇게 말하며 남궁청휘는 수줍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날 일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린은 남궁청휘를 피하듯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고 청휘는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이린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곽천영은 무언가 심란한 얼굴로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어린애들 연애 사정에 관심이 지대한 아저씨들은 드디어 향방이 정해진 건가 저들끼리 수군거리다 최연장자 어르신과 극성 오라비에게 등짝을 맞았다.
* * *
“소장주님! 아가씨! 돌아오셨어요?”
외유를 나갔던 두 사람이 돌아오자 연가장 사람들은 서둘러 장주를 부르러 달려갔다.
“그 아이들은요?”
“음. 내가 맡기로 한 아이들이야. 낯설어할 테니 잘 돌봐 주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서 연적훈이 나와 아이들 얼굴을 한번 확인하고 나자 다들 알아서 신입을 이끌었다.
“지현문에 갔었다고?”
“네. 좋은 분들이시더라고요.”
“음. 그래.”
이제는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에서 장보도가 유출되었다는 소문은 퍼져 있었으나, 아이들에게 다른 진실을 들은 연적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정보는 다들 감추려고 하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알 방도가 없구나.”
“아무래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저들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자기들끼리라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니 그 사이에 끼고 싶지는 않다만… 어중간한 중소문파들은 언제나 소외되고 이용만 당하는 법이라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군.”
“장보도가 사실일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제갈세가 놈들이야 가짜 장보도라도 만들어서 뿌릴 놈들이야.”
어쩐지 안면이 있는 듯한 말투에 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난 적이 있으세요?”
“으음. 글쎄. 그보다 마련야장의 조카들과 친해졌다고? 그 댁과도 서신을 주고받을 거니?”
“모르겠어요. 저도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쪽은 정말 사회생활이 단절되어있는 것 같아서… 본인들도 편지를 보낸다고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비교적 속내를 드러내는 제갈수원이나 제갈지원과 달리 제갈세원은 어딘지 벽이 있었다. 가장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정작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윤휘 언니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
이린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벽이 두꺼웠던 이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다들 이렇게 감추는 게 많은 걸까. 어릴 때야 아무래도 비교적 허물없이 대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장주일 때보다야 낫지만.’
이린이 장주였던 시절에는 주변에 얕보이지 않으려 필사적이었으니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이도 적었다. 조금이나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자영과 장 총관 아저씨뿐. 새로 만난 이들 중에선 늘 곁을 지켜 주던 유영 정도였고, 당자혜와는 생사고락을 함께했지만 실제로 알고 지낸 시간은 무척 짧아 대화를 나눈 적도 많지 않았다.
‘남궁청휘와는 선을 그어야 했고, 곽천영은 친밀해지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지.’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쓸쓸한 삶이었다.
‘그래서 더 과거 인연에 집착했던 걸지도 모르지.’
이린은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의 안부를 한 번씩 살핀 후, 제 방에서 쉬는 대신 집을 빠져나왔다. 아마 아버지와 오라비는 여전히 자신을 빼고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듯했다. 이젠 자신도 성인이니 함께 들어도 상관없을 텐데 아직도 어려운 얘기를 함께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현문이 엄마와 관련되어 있다면 엄마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고.’
어릴 적에는 기억에도 없는 엄마를 그리워했던 것도 같은데, 이젠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으니 그것 또한 서러웠다.
발길은 자연히 늘 가던 동굴을 향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듯 익숙한 그곳의 입구는 이린이 떠날 때와 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촤아악―
‘저건 그때 그놈인가, 다른 놈인가.’
아무래도 이 동굴 속 호수에는 거대 붕어와 유사한 놈들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이린이 처음 동굴을 찾았을 때 자신을 노렸던 그 녀석도 그때 죽지 않고 도망친 모양이었고.
‘으음. 더 커서 잡으면 그것도 좋겠지.’
그날 일로 겁을 먹었는지 사람을 덮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면 잊을지도 모르지만.
오랜만에 안쪽 호수까지 들어간 이린은 자신이 내부에 남겨 둔 것들의 흔적을 꼼꼼히 살폈다. 아무래도 누군가 침입한 것 같지는 않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이 고생해서 만들어 둔 위조본들 중 하나를 꺼냈다.
“역시 일치하지 않아.”
신교에서 신도들 스스로가 직접 자신의 몸을 사후 강시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과 이번에 본 움직이는 시체들의 증상은 일치하지 않았다.
‘신교의 것이 아니라면 역시 혈교의 것인가.’
그럼 자신이 죽기 전에 본 것은 신교의 것일까, 혈교의 것일까? 하지만 몸이 쇠처럼 단단해지고 불에도 타지 않는 것은….
‘어쩌면, 혈교의 방법은 미완성, 신교의 방법은 완성된 상태일지도 몰라. 지현문에서 본 그 시체….’
혈교가 신교의 방법을 응용했거나, 자체적인 연구를 통해 저들이 필요한 대로 개량했고, 그것이 이린이 죽기 전에 본 그 혈강시였던 게 아닐까.
이린은 책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책은 그때도, 이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의선의 딸은 죽기 전 이미 스스로의 몸을 훼손하는 것조차 어려운 몸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다른 곳에 최소 한 권 더 존재하거나, 존재했다는 뜻이었다.
‘지금 단계로는 아직 미완성. 하지만 2년이 지난 후에는 지현문과 연가장의 무인들을 몰살시킬 정도는 된다는 뜻이겠지.’
아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모두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이 발각된 이상 정파에선 다들 경계하기 시작할 터, 과연 혈교가 전과 같은 일을 벌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