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18
218.
괜히 얼굴이 붉어진 이린이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던졌다.
“그, 그냥 밥이라도 한번 사세요.”
“홍아같이 귀한 아이를 빌려주시는데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충분해요.”
본인이 곽천영에게 밥을 사겠다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남궁청휘는 이린의 뜬금없는 말에 문득 동정호에서 이린과 스쳐 지나갔던 날을 떠올렸다.
“그럼, 동정호 취선루에서 연 소저에게 식사를 대접하지요.”
“네?”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에 이린의 몸이 굳었다.
[그럼 저는 연 소저께 제 서툰 요리 대신 취선루의 요리를 대접하지요.] [동정호(洞庭湖)에 있는 취선루요?]오래전 나누었던 대화가 갑자기 떠오른 탓이었다.
“지난번 동정호에 가셨을 때는 사람이 많아 들르지 못하셨다고 들었으니 이번에는 아예 전세를 내드리죠.”
[네. 풍광도 좋은 곳이니 원하신다면 연 소저를 위해 층 전체를 전세 내드리겠습니다.]사람이란 참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요로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려 이린은 시선을 내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돼요. 오빠도, 남궁 공자도요.”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남궁청휘의 얼굴을 보며 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성과 불성이 함께한다면 오히려 걱정할 거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이린에게는 말해 주지 않고 몰래 대화가 오간 모양이지만 검성과 불성이 직접 움직일 정도면 아마 평범한 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몰래 따라가지도 못하게 소림승들까지 붙여 놓으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어차피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 무림맹에서 나서는 것이 혈교를 제압하는 데는 당연히 더 낫겠지.’
하지만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다칠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홍아를 보내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아, 맞다. 홍아는 오래 데리고 있으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제 손목 보호대를….”
이린이 자신의 손목 보호대를 풀어 주려 하자 남궁청휘가 당황하며 만류했다.
“연 소저의 손목 보호대는 혹시 이모님, 마련야장께 받은 물건 아닙니까?”
“맞아요.”
남궁청휘는 예전에 이모에게 손목 보호대를 선물로 받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 것도 이모님께 받은 것입니다. 냉기나 화기에도 강하다 하셨으니 아마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
이린은 마련야장이 제작비 대신 재료를 원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하긴 마련야장의 조카이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었겠지. 이린은 마찬가지로 마련야장이 조카라 불렀던 이를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떠올려 봤자 의미 없는 일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시조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연락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유독 낯을 가리는 홍아를 볼 때면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어 이린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홍아에게 당부했다.
“홍아, 네가 좋아하는 남궁 공자하고 잠시 지내렴. 괜찮지?”
끼이-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몰라도 홍아는 끼이끼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청휘에게로 넘어갔다.
‘홍아가 윤휘 언니를 잘 따르던 건 이해가 가는데. 남궁청휘를 잘 따르는 걸 보면 좀 신기해.’
그러고 보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러십니까?”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옛날에 알게 된 사람이랑 남궁 공자가 좀 닮았나 싶어서요.”
저도 모르게 남궁청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이린은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남궁청휘의 반응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저쪽이 너무 의식하니까 이쪽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정작 남궁청휘는 이린의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가슴을 눌렀다. 속이는 것이 있으니 이린 앞에서 영 당당할 수가 없었다.
‘계속 숨기고 있을 일도 아니지.’
여장이라니 부끄럽긴 했지만!
당시의 자신은 어렸고, 나름 이유도 있었으니 분명 이린은 말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연 소저, 이번에 제가 돌아오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 불길한 약속을 자꾸 잡으시는 거 같은데요.”
이야기책에서 싸우러 가기 전에 이런 소리 하면 불길한 징조던데.
이린의 말에 남궁청휘는 적극 부인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실은 제가 연 소저에게 그러니까, 속였다고 해야 할지. 말씀드리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지금 말씀하셔도 돼요.”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 주세요.”
“푸훗. 그럴게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남궁청휘의 말에 이린은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저어, 제 부탁도 한 가지만 들어주실 수 없을까요?”
“뭔데요?”
“한 번만, 그때처럼 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때요?”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더듬던 이린은 곧 청휘가 말하는 게 언제인지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남궁청휘가 죽을 때가 생각나 울고불고 매달렸던 그때.
“싫으시면, 싫으시면 안 하셔도… 어쩔 수 없지요.”
대담하게 부탁해 놓고 소심하게 빼는 것을 보면 조금 못 미더웠지만 그런 사람이라 이린도 입가가 허물어지며 맘이 누그러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속 편하게 사랑놀이나 할 때가 아니지. 하지만….’
이린은 남궁청휘의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오면요.”
“!!”
남궁청휘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이린은 매몰차게 뒤돌아서서 달려갔다. 남궁청휘는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말 안 해도 알아요.”
청춘 남녀의 풋풋한 모습을 지켜보던 소림사의 스님들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린은 이현에게도 청아를 맡기고 싶었지만 이현은 거절했다.
“남궁 공자에게 홍아도 맡겼다며, 하나는 네가 데리고 있어야 오빠도 안심될 거야.”
“나는 위험한 곳에 가는 게 아니라 상단으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이현은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이린을 먼저 떠나게 했다. 절대 못 따라오게 하려고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제가 함께 갈 테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곽 공자, 유 소저. 이린을 부탁드립니다.”
자신들을 빼놓은 이유를 알 텐데도 곽천영의 일행은 별로 불쾌해하지도 않고 이린과 함께 소림사를 떠났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현은 이린을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상한 불안함에 가슴이 수런거렸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곽 공자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 소저에게만큼은 진실되고, 소림의 무승들이 함께하시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남궁청휘의 위로에 연이현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으로 나서야 하는 건 이쪽인데 왜 이렇게 이린을 보내는 것이 불안한지 모를 일이었다.
* * *
“저희 오라버니가 걱정이 지나쳐서 여러분들께 괜한 폐를 끼치는 듯합니다.”
“아미타불. 소림사로 오는 동안에도 혈교의 습격이 있었다니 연 시주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린을 장사까지 바래다주기로 한 소림의 무승들은 미안해하는 이린에게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소저를 데려다주는 일이다 보니 젊은 승려들은 애초부터 배제한지라 다들 이린에겐 숙부뻘인, 나이가 조금 있는 승려들이었다. 덕분에 호위가 필요 없다는 이린의 거절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으음. 식사라도 잘 대접하고 싶은데 마땅치가 않군요.”
“마음만으로 충분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동행한 이들 중에는 무뚝뚝한 사람도 유쾌한 사람도 있었지만 낯선 아저씨들과 함께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했다.
‘오빠 친구들은 그래도 익숙한 얼굴이어서 덜했던 거구나. 오빠도 함께였고.’
옆에 곽천영과 유영이라도 없었으면 탈주하고 싶었을 정도였다.
“꽤 딱딱하네.”
“수도승이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종교와 별로 인연이 없는 이린은 대놓고 불편해하는 곽천영의 말에 피식 웃으며 무심하게 답했다. 함께 여행하는데도 두 집단은 묘하게 서로를 달갑지 않아 했다.
아무래도 곽천영이 정파 사람같이 보이는 않은 탓이 큰 듯했다.
“그렇게 식사 대접하고 싶으면 나한테 사. 전에 제갈세가에서 말했지?”
“여행 중에 곽 공자 몫도 제가 계산한 기억이 있는데요.”
“네가 아니라 네 오라비가 샀겠지.”
“보기보다 쪼잔한 구석이 있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린은 가장 규모가 있는 객잔으로 들어섰다.
들어간 주루에서 곽천영은 사양 없이 마음껏 요리를 시켰다.
승려들은 육식을 꺼리고 있기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이 태반이었다.
“그걸 다 누가 먹어요.”
“먹기 싫음 말고.”
의미 없는 실랑이를 하는 두 젊은이를 승려들은 허허 웃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요리가 나온 덕분에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일행의 귀에 들려왔다.
“그래서 지금 섬서로 강호인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거야!”
“거기에 혈교의 비고가 있단 말이지?”
“아직 어딘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다는 소문이지.”
“하지만 섬서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는 곳 아닌가? 이미 가 봤자 늦은 거 아냐?”
“혹시 모르지 않나. 뭐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혈교가 가지고 있다는 비급이 적지 않다며?”
“혈교 교주의 비급 말인가? 그런 거 익혔다 자네도 사파로 몰려 죽는 수가 있어!”
“그래도 절세 고수의 비급 아닌가.”
“그거 말고도 왜, 혈교 교주가 명문 정파의 비급들도… 크흠.”
다들 조용히 음식을 씹으면서도 들려오는 소문에 온통 주의가 집중되어 있었다. 이린이 대화를 나누는 쪽을 힐끔거리자 곽천영이 물었다.
“관심 있어?”
“…그냥요.”
저들이 말한 섬서의 지명들은 이린의 기억 속에도 있는 곳이었다.
‘시기는 다르지만 예전에 혈겁이 벌어졌던 곳인데.’
보통 혈교에 관한 일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든 편이었지만, 그곳에 대해서는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남궁청휘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비천산과는 조금 다르지만 동굴에 비고가 있었다고 했었지. 싸움 끝에 벽력탄이 터져 무너졌다고.’
어쩌면 그것도 혈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혈교의 신물이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닌 모양이었으니까. 게다가 제갈세가의 장보도 유출 이후로 여기저기 동굴을 들쑤시는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결국 다르지 않은 듯했다.
‘뭔가 나온다면 당연히 제갈세가의 함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명이 너무 구체적이라 신경 쓰이는걸.’
게다가 이현이 어디로 가는지 이린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어쩌면 섬서 쪽으로 가는 걸지도 몰랐다. 동행한 스님들 역시 아는 바는 없는 듯했다.
이린은 오래전 남궁청휘에게 들은 이야기를 더듬었다. 당시 두 사람은 함께 있어도 나눌 이야기가 많지 않았고 이린은 남궁청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기에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남궁청휘였다.
‘생각해 보니 지금은 안 그런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성격이 됐담.’
호감을 품고 있는 상대와 있을 때는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하게 되는 법. 지금의 남궁청휘는 워낙 주변에 방해물이 많아 그럴 수 없었던 것이지 실상은 그리 다른 점이 없었다. 당시의 남궁청휘는 나이를 먹고 조금 여유와 연륜이 생겼을 뿐이었지만 본인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린은 그저 의아해할 뿐이었다.
‘당시 남궁청휘는 그때 많은 이가 죽었다며 침통해 했었지.’
이현이 만약 그곳에 간다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가 봐야겠어요.”
“그렇게 해.”
“?”
의아해하는 이린을 보며 곽천영은 히죽 웃었다.
“나도 그쪽이 재밌어 보이니까. 같이 가 줄게.”
“안 와도 되는데요.”
“사양할 거 없어.”
자꾸 따라붙는 게 뭔가 찜찜한데, 또 의외로 태도는 담백하니 정말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따돌리기도 힘들고 혼자 다니는 것도 확실히 위험하니 일단 동행할까.’
문제는 동행하고 있는 스님들이었다.
“저희는 연 소저를 무사히 모셔다드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으음. 제가 장사로 돌아간다 해도 결국 섬서로 갈 텐데 의미 없지 않을까요. 그냥 여기서 돌아가시면….”
“그렇다면 동행하겠습니다.”
“?!”
묘하게 적극적인 태도였다.
‘혹시 혈교 교주가 정파의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 때문인가.’
아까 그 얘기도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쪽에 앉아 있는 스님들이 신경 쓰였는지 그 화제에 대해서는 다들 입을 열지 않았다.
‘만약 정말 혈교의 비고에 사문의 비급이 있다면 찾고 싶겠… 어라?’
이린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으나 침묵하기로 했다.
‘비천산 동굴에서 분명, 소림사의 비급을… 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