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19
219.
섬서에 도착하니 워낙에 여기저기 소문이 무성하게 나 있어서 화제의 동굴이 어디 있는지 찾아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현이 간 곳과 다른 곳임을 확인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빠는 이쪽으로 오진 않은 것 같네요.”
“워낙 눈에 띄는 얼굴들이니 왔다면 소문이 파다했겠지.”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용모의 두 사람은 얼굴을 꼼꼼하게 가리며 주변을 살폈다.
섬서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유명한 곳이라 자연히 그곳 출신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화산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산파는 이런 분쟁에 끼어들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고 있다더군요.”
“다행이라면 다행이네요.”
“이곳은 아무래도 종남파와 가까우니 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림사의 무승들과 동행하니 정파 사람들이 다들 쉬이 정보를 공유해 줘 확실히 편했다.
중요한 정보까지 전해 주리라는 법은 없었지만.
“제갈세가에서 퍼트린 소문일 것 같은데 정작 제갈세가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군.”
“미심쩍긴 하지만 어차피 제갈세가는 이런 데에 몸으로 끼는 편은 아니니까요.”
제갈세가의 경우 몸으로 끼면 대부분의 경우 밀린다. 중소 문파들처럼 무식하게 달려들기에는 또 자존심이 있고. 그러니 보통은 다른 세가나 문파와 함께할 법도 한데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어지간한 유력 문파와 세가들은 얼추 다 모여 있군요.”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글쎄요.”
이린은 알아볼 수 있는 몇몇 인물을 확인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용봉지회에는 없던 사람들이 이런 곳에는 있네.’
이린은 면사로 가려진 김에 곁눈질하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내 구혼자였던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하긴 어설픈 사람들이 많았지.’
이 안에 일류로 분류될 고수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듯이 당시 연가장을 찾아왔던 이들도 대부분 나름 이름이 있다 해도 어중간한 이들이 많았다.
‘구혼자라 해도 대부분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사람들이고.’
연가장은 그리 규모가 큰 편도 아니었기에 찾아온 구혼자 수에 비하면 장원에서 필요한 일꾼이나 무사의 수는 사실 별로 많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와 있기도 했으니 희망자 외의 대부분은 표사로 돌렸었다.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었지.’
싸우고 난리 치다 남궁세가 무인들에게 쫓겨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하는 하인들에게까지 친절한 사람도 있었다.
장원에 남은 사람들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얼굴은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실 혈교의 간자들은 장원에 남은 쪽이었으니 상관없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에도 있네.”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빠가 여기 없다면 굳이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일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이린은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뜻밖의 복병이 있었다.
“비고를 찾아가 보실 생각이라고요?”
“그렇소.”
이린에게만 할 말이 있다고 잠시 천영의 일행을 내보낸 소림의 무승들이 꺼낸 말에 이린도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은 제 호위를 위해 오신 거잖아요. 이곳에 오자고 한 건 저였지만 그 안까지 들어가는 것은 위험해요.”
“아미타불. 이해해 주십시오, 연 시주. 어쩌면 저곳에, 혈교 교주에게 빼앗긴 소림의 비급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비급을 찾을 수만 있다면 소승은 어떤 비난도 불사할 수 있습니다.”
“혈교 교주에게 빼앗겼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아해하는 이린에게 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말씀드리는 일은 함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도에 벗어나거나 위법적인 일이 아니라면요.”
완고한 이린의 목소리에 승려들이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검성에게 패퇴한 전대 혈교 교주가 구파일방과 세가의 명숙들에게 비무를 청했던 일은 알고 계십니까?”
“네에. 그때 많은 고수들이 혈교 교주에게 패배해 교주의 명성이 높아졌다고 들었습니다.”
패배한 이들 중에는 남궁청휘의 부친인 검황 남궁익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소림의 방장 역시 혈교 교주에게 패퇴했는데 지금의 불성은 당시 면벽 수도 중이라 없었다던가.
이린은 자신이 동굴에서 본 적 있는 문파의 비급들과 혈교 교주에게 패한 문파들을 떠올리다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을 깨닫고 침음을 삼켰다. 표지가 없어 어느 문파의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강 분간이 갔던 것들만으로도 어쩐지 짐작이 갔다.
“설마…?”
“아미타불. 아마 시주께서 예상하시는 그대로일 겁니다. 악랄한 혈교의 교주는 비무를 청해 패배한 문파의 비급을 강탈해 갔습니다…!”
“그런….”
그 말을 들은 이린은 순간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설마, 정말 그 동굴 속에 있던 표지 없는 비급들이…?’
그렇다면 그 비급들은 혈교 교주가 동굴 속에 가져다 둔 것이란 말인가?
뜻밖의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이린은 의아한 점을 물었다.
“하지만 소림에서 비급을 그렇게 순순히 빼앗겼다니 혈교 교주가 그렇게 강했나요?”
“그건, 혈교 교주가 내건 조건이었답니다. 이기는 쪽의 청을 하나 들어주기로요.”
“방장께서 내거신 조건은 무엇이었나요?”
“혈교의… 해산이었습니다.”
크게 걸 만한 승부였다. 당시에 이미 강호의 명숙들이 암살당하고 있던 때니까.
‘억울한 승부는 아니었네.’
그건 그렇고 그들이 비급을 되찾길 원한다면 지금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엔 소림의 비급이 없….”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소승들이 여기에 있는데 다른 이들에게 비급을 빼앗긴다면 무슨 낯으로 소림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겠소! 연 시주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잔잔한 얼굴이던 소림의 무승들은 전에 없이 격앙된 표정으로 외쳤다.
괜히 혈교와 얽힐지도 몰라 그 비급들이 우리 집 뒷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이린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
사정을 모르는 곽천영은 그저 의아해할 뿐이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열정적인 사람들이네.”
“으음. 나름 불도(佛道)를 수행해서 억누르고 있던 게 아닐까요.”
자기 가문과 사문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특히 역사가 있는 명문 정파의 경우 다소 과한 경향이 있으니 소림사의 승려들이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스님이 저래도 되나 싶긴 하지만.’
이린은 떨떠름한 얼굴로 발걸음을 뗐다.
“너도 가게?”
“으음. 일단. 저대로 보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좀 떨떠름하고.”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이린의 뒤를 따르며 곽천영도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 괜찮을까.’
본교에서 온 서신을 생각하면 이린을 이대로 놔둬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린도 그렇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곽천영이 알 리 만무했지만 이린이 곽천영을 볼 때 늘 하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지금 곽천영이 이린을 보며 하고 있었다.
“이 비고를 발견한 건 우리 종남파(終南派)이니 권리는 우리에게 있소!”
“무슨 소리! 이 지역은 우리 산운문의 영향권 아닌가!”
헤맬 것도 없이 싸우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기에 비고의 입구가 어딘지는 금방 알았다.
“소유권 주장 중이군.”
“흔히 있는 일이죠.”
이린의 시선은 종남파의 제자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는 창을 든 청년을 향했다.
“어차피 누가 먼저 들어가든 나올 때 공격해서 뺏으면 끝나는 문제 아냐?”
“부정은 못 하겠네요.”
곽천영의 막말에 주변에 있던 정파인들이 흠칫 떨며 시선을 피했다. 다들 생각은 했지만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당하자 주변은 조용해졌다.
“아미타불. 두 분 이러시지 말고 함께 들어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싸운다 한들 무엇이 바뀌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이로 소림사의 무승들이 끼어들자 다른 정파 출신 무인들까지 끼어들기 시작했다.
“안됐네요.”
“뭐가?”
이린은 아버지가 지주(地主)인 중소 문파 출신답게 땅 주인에게 이입했다.
“사람이 이렇게 몰렸으면 이미 땅 주인의 소유권 행사는 물 건너간 셈이니까요. 그나저나 이렇게 밖에서 시간만 끌다니 이상하….”
빠직- 콰지직- 쿠르르르르릉-!!
이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지면이 굉음과 함께 쩍쩍 갈라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어?!”
“으, 아아악!!”
콰르르르!!!
딛고 있던 땅이 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기겁하며 도망치려 했으나 범위가 너무 넓었다. 이린 역시 재빨리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가 피했으나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계속 다른 곳으로 피해야 했다.
“헉!”
“유영!”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곽천영의 뒤를 따라 피하던 유영이 디디려던 나무가 무너지며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이린, 멈춰!”
곽천영이 부르거나 말거나 이린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가만있어요!”
“네?!”
유영을 낚아챈 이린은 떨어지고 있는 나무와 바위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가볍게 디디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하! 젠장, 너희도 따라와!”
곽천영은 눈앞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광경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동굴 입구에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자들을 밀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여자였다.
곽천영이 뒷목을 잡거나 말거나, 이린은 유영을 붙잡고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연 소저. 괜찮으신 겁니까? 저 때문에….”
“다행이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이린의 경공이 뛰어난 것과 별개로 유영을 보호하며 떨어지는 물체를 모두 피해 안전하게 내려오다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린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생겨있었다.
얼떨떨한 얼굴의 유영은 이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구해 줬어요?’
지금껏 겪어 온 것만으로도 연이린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건지 유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연 소저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대하나요?”
“글쎄요? 다친 데가 없다면 일단 일어나죠, 우린 아무래도 무방비하게 비고인지 뭔지 모를 곳에 떨어진 모양이거든요.”
이린은 말을 돌리며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아마 유영에게는 표정이 보이지 않겠지.
유영은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겠지만 이린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제 동료였던 이들과 싸우면서 목숨을 던졌던 유영을 기억했다.
그런 사람이 위험한데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하필이면 동굴 안이라 지금 이곳과 비슷한 것 같아 더 기분 좋지 않았다.
‘남궁청휘 때도 그렇고 자꾸 옛날 생각이 나는 것이 영 좋지 않네.’
좋은 기억도 아니고 죽기 전 마지막 모습이라니. 지금 눈앞에 살아 있는데.
“떨어진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살아 있어도 움직이긴 힘들 걸요.”
이린은 그렇게 말하며 야명주를 꺼냈다. 유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가장이 부자라더니 정말이었군요.”
“우연히 얻은 거예요.”
이린은 유영과 함께 바지런히 생존자를 발굴했다. 나무나 바위에 깔린 사람들을 빼내고 응급 처치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놀라운 인성질을 접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저런 놈들보다 이 몸을 먼저 구해야지!”
“더 위급한 사람이 있으니 좀 참으시죠.”
어둠 속이라 의지할 빛은 이린이 가진 야명주뿐. 부상당한 사람들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쪽은 무너진 잔해 때문에 막혔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아까 안 떨어진 사람들도 있으니 분명 구하러 사람을 보낼 거예요. 우린 일단 다른 탈출구를 찾아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