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23
223.
곽선후는 그날 제자가 보낸 서신을 받고 잠시 머리가 멍했다.
18세, 검성의 딸. 어떻게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데려오라고 했고, 그다음에는 직접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고에 휘말려 의식을 잃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자신과 같은 금발에 벽안. 한눈에 확신했다.
눈에 들어간 독 가루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소녀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버지? 아빠?]아직 의식이 흐릿한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하면서 안심한 듯 말갛게 웃으며 제 소매를 붙잡았다.
교주가 된 후 여유가 생겨 여인에게 관심을 둔 적이 있으니 교태를 부리며 매달리는 여인이야 심심치 않게 겪어 보았다.
하지만 자식이라는 건 달랐다.
[아버지.]온전하게 자신을 믿고 매달리는 존재.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
아이를 주워 성과 이름을 붙여 제자로 키울 때도 이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본교 보고(寶庫)에 있는 영약, 있는 대로 다 가져와 봐.] [그거 한 번에 다 먹으면 멀쩡한 사람도 죽어요.] [됐으니까 가져와.]아이의 눈은 자신과 같은 파란색이라 했다. 어떻게든 그 눈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 온전히 내 딸로 삼을 수 있잖아.]그렇게 기억을 잃은 연이린은 곽선후의 딸이 되었다.
제자에게 붙여 준 ‘곽’이라는 성은 전대 교주의 것.
본래 자신의 것도 아니었으니 애착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린의 성과 이름은 그대로 남겼다. 연화문의 아이, 연씨 성을 붙이는 것이 가장 어울렸다.
“…검성과 군자검에게도 애틋한 피붙이일 겁니다.”
“내 딸인 게 더 중요해.”
애초에,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검성과 그 동생이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것보단 딸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연화문은 동생과 지인들 앞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자신 앞에서는 늘 그다지 말이 없었다.
동행은 했지만 표정이 바뀌는 일도 별로 없는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 심지어 늘 우울하고 권태로워 보여 가끔씩 생존 확인하듯 말을 붙이는 것 외에는 그다지 대화조차 없어 일부러 시비 걸어 검을 뽑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게 재미있었지만….’
자신을 경쟁 상대로 보지 않으면서,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존재.
심지어 그 돌덩이 같던 여자가 검을 뽑았을 때 가장 생생한 얼굴을 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가장 사람 같은 얼굴을 한 때는 자신 앞이 아니었다.
여자의 그 단단한 껍데기는 힘들게 발견한 신교의 흔적 앞에서 무너졌으니까.
‘연가장의 옛 지인들이라는 자들의 시신들을 처리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모처럼 도와주겠다고 했는데도 자신이 할 일이라며 굳이 홀로 불에 타지도, 평범한 날붙이는 들어가지도 않는 시신들을 홀로 처리했다.
워낙에 피에 익숙하다 보니 당시에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시 연화문이 꽤 고통스러웠을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연화문을 무너지게 만든 것은 누군가가 남긴 서책들이었다.
혈교 교주가 과거 연화문의 벗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개인적인 유품을 수습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비록 아는 것이 없었지만 연화문이 괴로워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날 연화문은 드물게 먼저 비무를 청했고, 비무를 빙자해 전에 없이 주변에 있던 자연물을 파괴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진탕 취해 버려 팔자에 없는 보모 노릇을 하며 주정뱅이를 수습해야 했다. 그렇게 망가진 연화문은 처음이라 신기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이, 내 앞에서 이렇게 한심한 상태로 있어도 괜찮겠어?] [한심하다라… 그래, 한심하네…….]시력에 이상이 없다면 누구나 연화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았으리라.
내버려 뒀다가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하면 허무하고 뒷맛도 좋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방으로 데려갔다. 마시던 술도 함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혈교 교주를 죽인 검성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는군.] [왜, 이해할 수 없었지…?]그렇게 말하며 연화문은 곽선후의 몸 위로 올라탔다.
[?!]살기도 없고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대로 당했다만 황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대로 밀쳐 내려 했는데, 얼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늘 무덤덤한 얼굴이던 그 여자가 울고 있어서, 밀쳐 낼 수가 없었다.
‘좀 예뻐 보였던 거 같기도 하고….’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 밤은 무언가에 홀렸던 것도 같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보았기에, 무언가 다른 표정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멀쩡하게 일어난 연화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 병은 없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어마어마한 첫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로는 두 사람은 의미 없이 함께 밤을 보냈다.
나중에는 습관처럼 한 침대에 들었다.
누군가가 곁에서 잠든다는 것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어느 날 연화문이 물었다. 길에서 구걸하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들려 보낸 후였다.
[너, 애 키워 본 적 있어?] [부모도 없는데 애를 키워 본 적이 있을 리가. 내 얘기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어?] [아마도.]천마 곽선후의 출신에 대해서는 강호에 소문이 파다해 모르는 이가 없건만.
그 정도면 그냥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여자는 곽선후에게 무심했다.
그렇기에 연화문이 먼저 질문을 던지는 건 드문 일이었다.
[싫어해?] [아마도?]거리에서 보이는 아이들은 빽빽 소리만 지르고 시끄럽고 지저분했다. 물론 본교 내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기억은 없었다.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생물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던 거 같다.
[그렇군.]연화문은 그 이상 말을 이어 가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나누는 대화가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날의 대화는 기억에 남았다.
얼마 후 연화문은 ‘집에 간다’는 편지 한 장 남기고 사라졌다. 아니, 그건 편지가 아니라 쪽지였다.
한 침상에서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사람은 없고 탁자 위에 종이 한 장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때의 어이없음이란. 주변 생각 안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걸로는 비길 데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자신보다 더 상식을 무시하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그냥 말하고 가면 어디가 덧나냐!]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날짜를 헤아려 보면 아마도 그때 이미 배 속에 이린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제멋대로인 여자….”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희생자는 던 셈이죠.”
“뭐가 비슷해!”
“남 생각 안 한다는 점에서…? 그래도 검성은 현명하게 본인 스스로도 그걸 아니까 아이를 동생 부부에게 맡겼겠죠.”
“…….”
연수혜의 말은 너무 옳아서 가끔 할 말이 없었다.
그날 헤어진 이후로 연화문과는 마주치지 못했다. 단지 가끔 잠자리에 누웠을 때 불현듯 생각이 났을 뿐.
몇 번인가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당최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다 내 죄다만….’
머리카락이 너무 눈에 띄어 곤란해하는 것을 보고 부하를 시켜 역용술의 비급을 가져다준 것이 자신이었다. 곽선후 자신도 금발 벽안 때문에 용모를 숨기고 다니다 보니 백발에 난처해하는 모습에 생각 없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린 역시 역용술을 익히고 있었다.
연화문과 같은 무공을 익히고 있는 아이. 거기에 역용술까지 익히고 있다면…
‘연화문을 만난 적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이린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무공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고, 역용술은 자신이 가르쳐 주자 바로 따라 한 것을 보아 원래 익히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이린을 돌려보낼 수 없는 이유는 자네도 잘 알지 않나?”
“혈교 말씀이십니까?”
그날, 이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안구와 상처 부위에 독이 스몄고 중독된 상태로 검을 휘두르다가 도리어 온몸에 퍼졌다. 게다가 그들이 뿌린 것 중에는 산공독(散功毒)도 있었는지 그들과 싸우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이린은 싸울수록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곽천영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린을 데리고 나온 것을 본 곽선후는 눈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토굴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날 비고에 들어갔던 이들 중 생존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생존자들에게 있었다.
‘어설픈 제자 놈 같으니.’
마교의 마공은 정파의 것과 다르다. 곽선후 정도의 경지라면 모를까, 아직 미숙한 곽천영은 위급한 상황에서 제 묵기(墨氣)를 드러냈다. 안 그래도 이린을 노리던 혈교의 간자들은 도리어 그를 혈교의 수괴라 외쳤고, 다른 목격자들도 그가 이린을 감싸는 것을 본지라 이린이 혈교와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마 일부러 퍼트렸겠지만 이런 상황에 이린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뭘 먹고 자랐는지 의외로 튼튼해서 몸의 회복은 비교적 빨랐지만 독에 당한 눈은 회복도 어려웠다. 본교에 있는 약으로 치료에 성공해 눈은 완쾌되었으나 이린은 기억을 잃었고 곽선후를 아버지로 알고 지내 왔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나는 내 딸을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러다 검성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 여자가? 찾아올 거면 벌써 찾아왔겠지.”
마교가 십만대산에 있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다. 검성이 찾아올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 찾아왔겠지.
“몰랐을 때면 모를까 내 딸이란 걸 아는데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
“불쌍하게도, 힘들게 다 키워 놓은 자식을 말도 없이 빼앗기겠군요. 심지어 생사도 몰라 애태우고 있을 텐데.”
“누가 나한테 숨기랬….”
당당하던 곽선후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추측할 수 있는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예상대로 곧 탁탁 소리와 함께 이린이 나타났다.
“아버지! 저희 다녀올게요.”
“…아빠라고 부르래도. 그리고… 얼굴도 바꾸고.”
이린은 아까와는 달리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금발 벽안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흑발 흑안이었다.
“얼굴도 바꿔야 해요?”
“너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성가시니까.”
“옆에 사형 있는데 상관없지 않을까요?”
5년간 이곳에서 지내면서도 얼굴을 마주한 사람은 손에 꼽는 이린이 의아해했지만 곽선후가 막무가내로 우기니 할 수 없이 따랐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아버지는 좀 거리감 있지 않느냐?”
이린의 의식이 흐릿할 무렵, 몇 번인가 곽선후를 붙잡고 아빠라 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회복한 후엔 아빠라는 호칭으로 불려 본 적이 없는 곽선후의 미련에 이린이 고개를 저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좀 거리감 있을 때죠.”
“…….”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천마신교의 교주를 시무룩하게 만든 이린은 그렇게 곽천영과 함께 사라졌다.
“절대 아빠라고는 안 부르네요.”
“뭔가 어색해서 싫다 그러네… 기억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어색한가.”
이제 나이도 있는데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웃던 이린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영에게도 오빠나 오라버니라는 호칭은 뭔가 안 어울린다며 차라리 사형이라고 부르겠다고 할 정도니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군요.”
“좋아야지.”
“…정말 혼인이라도 시키시게요?”
“그래. 이곳에 계속 묶어 두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